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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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호, 얼루어 매거진 창간 15주년 기념호에서 치프 에디터 FAZIN LEE 는 이 시대의 테마를 ‘YOUNG & RICH’로 선언했다. ‘지금의 우리가 가장 원하는 건 뭘까. 젊음, 부, 강력한 영향력! 이 시대가 칭송하는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춘 사람과 브랜드.’ 2018년의 미덕은 성실, 용기, 겸손 같은 것들이 아니라 젊음, 부, 영향력이며, 이 세 가지를 갖춘 신흥 강자들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고 말이다.


‘김사과가 약쟁이들을 그린 것인가, 혹은 김사과 자신이 약쟁이가 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약빨고’ 쓴 듯한 신작소설 ‘N.E.W.’를 읽었다.  불륜 소설이며 세태 소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젊은이가 오직 몸뚱이 하나와 타고난 매력만을 무기삼아 거대한 부와 권력의 세계로 달려가 부딪히는 이야기. 화려하고 공허한 언변으로 가득차 흡사 약에 취한 정신병자의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이지만 그 구조는 의외로 교과서적이다. ‘N.E.W.’는 작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발자크 류의 프랑스 근대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의 교과서라는 ‘고리오 영감’의 패러디가 아닌가 싶었으니 말이다. 1800년대 프랑스의 라스티냑은 시골에서 올라온 잘생기고 야심만만한 법대생이었고, 2010년대 대한민국의 이하나는 고졸 출신의 유튜브 BJ다. 그녀가 입주를 허락받은 메종드레브는 라스티냑이 살던 파리 하숙집의 더욱 진화된 형태다.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젊은이들을 엄선하여 입주시키는 이곳은 야심의 둥지라 할 수 있다.

일단 이 둥지에 입주를 허락받은 이하나는, 메종드레브라는 성 바깥의 허름한 식당에서 만두와 칼국수를 파는 ‘마녀’ 성공자를 오른팔로 두고, 충실한 '기사'인 이우진을 왼팔로 두고 즐겁게 살아가다, 거대한 성채의 주인, 정지용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만남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며 이하나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 관계는 정지용에 의해 선택된 것이고 이하나는 완벽한 비주체 - 개나 미술품처럼 주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된 오브제에 불과하다. 정지용이 우연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잘못 눌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화살을 거듭 날려 수천 발의 화살 중 하나가 우연히 과녁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게 만들겠다는 최영주의 다짐을 무색하게 만들 듯, 거짓말 같은 우연으로, 우연과 무지와 오해 속에서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1)의 산물로, 이하나와 정지용은 만나고 운명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동시에 기이한 꿈 같은 시간으로 천천히 패닉에 빠져들었다.’2)


한국의 뉘싱겐 부인, 하지만 뉘싱겐 부인보다 몇 배 더 덩치가 키워진, 젊음, 부, 영향력의 세 가지 덕목을 한몸으로 실현하고 있는 신흥 강자 정지용은 누구인가. 그는 오손그룹의 후계자이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의 눈길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정대철은 오손그룹의 회장이며, 막대한 부를 쌓은 ‘제분업자’ 고리오 영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인물 역시 2010년대 버전으로 변주되어 있다. 그는 ‘몰락하지 않았다’. 정대철은 메종드레브의 초소형 원룸에서 하나뿐인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죽어가지 않는다. 그는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부로 영향력을 가졌으며, 그만의 화려한 언변과 신비주의로 영향력을 종신적인 것으로 굳혔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선언한다. “이따금 내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곤충이거나, 신이거나.” “아버지, 저희를 위해 죽어주시면 안 되나요?” 라고 정지용-뉘싱겐 부인이 묻자 정대철-고리오 영감은 대꾸한다. “ 넌 꿈, 희망, 야망 같은 관념을 이해 못 하는 것 아니냐?” 고. 3) 아버지는 ‘죽어주어야’ 하는 인간이 아니고, ‘죽여야’ 하는 인간이다. 정지용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최영주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지용은 어리석었지만, 최영주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라는 그의 직관만은 옳았다.) 그녀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다. ‘자신 있게 환상을 깨부수고 나간 자는 현실의 광기에 의해 으스러질 뿐이며, 망상은 유일한 구원이라’4)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페이크 다큐를 찍는다. 정대철의 하나 뿐인 손자를 구덩이에 던져 죽이는 환상을 만들어 정대철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우리를 위해 죽어달라.’ 고 강변하던 아들 정지용의 ‘말’ 보다 강한 것은 갓난아기를 던져 죽이는 ‘만들어진 이미지’, ‘거짓된(페이크) 현실 기록 (다큐멘터리)’ 였고 이 방식으로 최영주는 마침내 부친 살해에 성공한다. 2010년의 성공한 고리오 영감은 자신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지만 결국 친-자식이 아닌 새로운NEW-자식의 ‘만들어진 현실-환상’ 속에 죽음을 맞는다.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것이다. 최영주는 이 ‘보여짐’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보여짐’ 을 그냥 자기 삶으로 생각할 뿐 ‘연출’은 하지 못한다. 이하나는 ‘보여지고’ 싶어하고 ‘연출’도 하지만 그녀는 이류일 뿐이다. 이하나의 삶 자체가 이류이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리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도 ‘타고난 촌티’를 어쩌지 못하고 그녀의 모든 이미지는 수백 개의 프릴 장식처럼 과잉의 것이 된다. 최영주는 ‘어쨌든 예쁘고 좋아 보이는,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는 삶’5) 속에 자신을 세련되게 연출할 줄 아는 일류이다. 답답함과 허무함 속에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기분에 사로잡혀6) 살아가는 현대인- 그들의 권태와 무력감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젊음과 부와 영향력의 세련된 연출이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신의 부와 젊음을 ‘전시’하고 그로 인해 더 큰 영향력을 획득하는 21세기 SNS 인플루언서는 바로 정대철 회장이 그토록 강변하는 새시대의 젊은이-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초상이다.7) 심지어 최영주는 자신의 슬픔까지 ‘전시’하는 것으로 쿤데라가 말한 키치의 절정에 오른다.8)


이들은 이해되지 않는다. ‘보여지고’ ‘연출되지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진정한 매력을 획득한다. 다 이해되는 것, 알 수 있는 것, 빤한 것, 속이 보이는 것에는 어떤 매력도 없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내가 와 있는 이 장소는 과연 실재하는 곳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9) 싶은 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21세기의 신흥 귀족들은 바로 그 ‘알 수 없음’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것이 바로 오손그룹 일가를 향한 그 많은 루머와 선망의 원인인 것이다. ‘저 알 수 없음! 저 유령적인 것! 갖고 싶다! 전부! 전부 다!’ 정대철이 쏟아내는 정신나간 주문 같은 말들과 정지용의 난데없음, 최영주의 제멋대로성, 은미라의 미스터리한 죽음까지도, 모두, 모두, 모두! 이 생태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 성공자는 조언한다.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 그저 꽉 물어. 절대 놓지 마.”10) 그렇다, 주인의 도덕을 노예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노예는 보복할 수 없다. 다만 지배되고, 다만 복종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뜯어먹은 주인의 관대함과 다정함 앞에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이다. “고마워요, 맛있게 먹어줘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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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사과, ‘N.E.W.’, 문학과지성사, 2018, p.213~214

2) 위와 같은 책, p.20

3) 위와 같은 책, p.262~264

4) 위와 같은 책, p.213

5) 위와 같은 책, p.43

6) 위와 같은 책, p.43

7)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은 8월 마지막주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2주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8) 눈물을 전시한 후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최영주의 모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사비나의 멜론모를 떠올리게 한다.

9) 위와 같은 책, p.20

10) 위와 같은 책, p.119

11) 위와 같은 책,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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