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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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독서모임에서는 이동식 박사의 '현대인과 노이로제'를 읽었고, 각자 노이로제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Y씨는 '과거지향'을 꼽았다. H씨는 동의하며 '사람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고 덧붙였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하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면 최소 현재지향이라도 해야 한다'고 보탰다. 좋게 말해 과거지향이지,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를 반추하는데 소모되는 삶이다. 돌이킬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며 후회와 수치심, 죄책감에 빠져드는 것. 이게 바로 노이로제가 된다.


케케묵은 과거사의 잘 꾸며진 전시, 쓰는 사람만 예쁘다고 생각하지 보는 사람으로서는 흔하고 지루할 뿐인 낭만성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며 앞부분의 세 소설을 읽다가 네 번째 소설 '모래로 지은 집'의 첫장을 읽고는 거의 불쾌감에 가까운 '어이없음'을 느꼈다. '99년 천리안 동호회에서 만나...' 아니,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소설로 응답하라 시리즈를 찍고 있는 건가?


'복고는 반동이다'는 나의 주된 신념이며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고 찬탄하고 감격하는 글, 그림, 영화, 드라마, 뭐든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가 배경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과거에 무언가 있다고 말하는 것, 중요한 것-아름다운 것-빛나는 것-때묻지 않은 것-순수하고 깨끗한 것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고 상정하는 모든 텍스트는 좋아하지 않는다. Y씨의 말대로 그것은 과거지향적이며, 인간의 삶을 현재에서 유리시키고 미래에서 멀어지게 하며, 과거라는 림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動에 反하는 反動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과거에 그 모든 것은 있지도 않다.


이 소설집은 바로 그 거대한 반동의 집결체이며, 심각한 노이로제의 서사다. 이 소설집의 여섯 작품은 모두 삼십 대에 이른 화자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빛나는' (이라고 쓰고 착각하지 말라고 덧붙이고 싶은) 시절을 '돌아보는', Look back in Regret의 이야기다. 그들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들은 과거만을 말하고, 반추하고, 복기한다. 과거는 아름답고 순수하였지만 그 시절 나는 철이 없었고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뭔가 큰 잘못을 했고 그 잘못의 대가로 나는 현재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고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들은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최소한 현재조차 이야기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과거의 것들, 과거의 복기와 과거의 부활일 뿐이다. 림보에 빠진 자들. 노이로제의 완성이다.


없던 경향이 생긴 게 아니고 전작 '쇼코의 미소'에서 희미하게 냄새를 풍겼던 것이 본격화된 것이다. 뭔가 찜찜하고 답답하다고 느꼈던 것의 정체를 이제 확인하게 된 것 뿐. 이 책은 전작에 비해 명백한 '퇴행' 이며 이것은 한국소설의 '퇴행'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우리 시대의 '퇴행' 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응답하라 같은 드라마가 대유행을 하고 과거를 반추하는 '이불킥'의 서사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무엇의 징후인가.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시대의 우울과 노이로제. 힘든 현실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좋았던 옛날을 굳건한 환상으로 만들어 그에 고착되어 버리는 회피적, 퇴행적 방어기제의 완성.



 



이 분야에서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책을 인용으로써 소개한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로 시작되는 대부분의 자기 진술은 가족 로망스의 전형적인 틀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기 진술은 지금의 내가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지만 지금의 나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확증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이야기 만들기의 구조이다. 즉 좋았던 옛날의 자신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의 부족한 나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보완하면서, 이상적인 나를 만들어가려는 이야기 구조는 기본적으로 가족 로망스의 구도이다. (중략)

직장과 가정 등 지금의 자신을 구성하는 준거점들이 자신을 강력하고 안정된 존재로 만들어주기보다 자신을 소외시키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무기력감과 자괴감 때문에 군대라는 상상적 아버지가 항상적으로 불려들여진다. 한국 남자들에게 현실의 무기력한 자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군대'라는 상상적 아버지는 군대 시절 이야기라는 회고담의 형식 속에서 끝없이 강조되고 신성화되는 것이다.

(중략)

즉 첫사랑의 여인은 지금의 타락하고 '망가진' 나가 아니라 '원래의' 순수한 나를 되찾아줄 수 있는 '진짜 부모'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순수한 여인의 초상이 (남성들에게) 원래의 나를 만들어줄 수 있는 '상상적 아버지'로 기능하게 된다. 현실의 ''를 부정하고 과거의 순수한 나를 찾아가는 이 영화의 구도는 마치 왜곡된 한국 근대사를 재기술하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반성적인 인식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순수'에 대한 강박관념과 허구적으로 만들어지는 순수(상상적 아버지)에 대한 찬가이다. (중략)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적 고착을 투영하는 것이다.

- 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 2000, p.141~142





또 하나, 최근 읽었던 신문 기사 하나를 링크로 단다. 시대의 병적 징후를 읽을 수 있었던 기사.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70216169800017&mob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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