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판 머리말 중에서...
사고의 혁명.

단 한 번에 성취된 혁명에 의해 현재와 같은 것이 된 수학과 자연과학의 실례는, 생각하건대 그것들을 그토록 유리하게 만든 사고방식의 변혁의 본질적인 요소를 성찰하기 위해, 그리고 이성 인식으로서 그것들의 형이상학과의 유비가 허용되는 한에서, 여기에서 최소한 그것들을 모방하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이런 일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요구되는바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사상이 처해 있던 상황과 똑같다. 전체 별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가정에서는 천체 운동에 대한 설명이 잘 진척되지 못하게된 후에, 코페르니쿠스는 관찰자를 회전하게 하고 반대로 별들을 정지시킨다면, 그 설명이 더 잘 되지 않을까를 시도했다. 이제 형이상학에서 우리는 대상들의 직관과 관련하여 비슷한 방식의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직관이 대상들의 성질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가를 통찰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상이 (감관의

객관으로서) 우리 직관 능력의 성질을 따른다면, 나는 이 가능성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직관들이 인식이어야 한다면, 나는 이 직관에 머무를수만은 없고, 표상인 그것을 대상인 무엇인가와 관계 맺고 저 표상을 통해 이대상을 규정해야 하므로,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가정할 수 있다. 하나는 그 것을 통해 내가 이 규정을 실현하는 그 개념들이 대상들을 따른다고 가정할 수 있고, 그때 다시금 내가 이에 관해 무엇인가를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가의 방식 문제 때문에 똑같은 곤경에 빠지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그러니 까 같은 말이 되겠지만, 나는 오로지 거기에서만 대상들이 (주어진 대상들로서) 인식되는 경험이 이 개념들을 따른다고 가정하고, 경험이란 그 자체가 일종 의 인식방식으로서 내가 그것의 규칙을 대상들이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 안에서,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지성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규칙은 경험의 모든 대상들이 반드시 그것들에 따라야 하고 그것들과 합치해야만 하는 선험적 개념들에서 표출되는 것이므로, 이내 좀 더 쉽게 빠져나갈 길을 발견하는 경우이다. 순전히 이성에 의해 그것도 필연적으로 생각되지만, (적어도 이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는) 결코 경험에 주어질수 없는 그런 대상들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그런 대상들을 생각하려는 모든시도들은 ㅡ 어쨌든 이런 대상들을 생각할 수는 있으므로 ㅡ 나중에, 우리는곧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것들 안에 집어 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는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의 빛나는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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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 2021-11-0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세한 정성 감사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