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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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흘러가는 생각을 책 속에 가두고 감각을 함께 나누는 것. 정형화된 어떤 것이 없는 일련의 과정들.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단어가 문학이 아닐까. 나는 닥치는 대로 읽어나간다. 그렇게 읽어나가다가 우연히도 너무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기도 하고 한 페이지를 못 읽고 내려놓는 책도 생긴다. 나는 내 인생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이 없다. 바꿔 말하자면 내 인생과 닮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아니에르노를 사랑하는 이유는, 마치 내가 오래전에 적어둔 일기를 들춰본 듯 한 느낌의 소설 아닌 소설을 쓰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니에르노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글쓰기 철학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이 책이 와 닿았다.

<남자의 자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평범한 소시민의 생에서 끄집어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든 아니에르노. 이 사람의 글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열등감에서 시작해 열등감으로 끝난다.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 나의 경험과 닿아있어서 더 와 닿았을까. 가난했던 남자의 딸. 그녀는 교사가 되었다. 일종의 신분상승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열등감 이 답답한 마음과 일련의 서술이 아름다운 것은 미사여구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이 부분을 극복했다는 식의 감성팔이가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그런 열등감이 있었고, 그 열등감에서 다른 열등감으로 돌아 들어갔을 때 나는 그것을 한동안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모은 돈으로 상인이 되었다. 물건을 떼다 파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신선한 충격. 그리고 딸은 상인도 아닌 지식인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갈 때의 기분과 사소한 열등감에 대해서.

 아니에르노의 글은 독자에게 자꾸 말을 건다. 자꾸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는다.


얼마 전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 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 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과거 내가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런 글 말이다.<P.21>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P.48>


나는 그가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P.93>


내가 미끌어져 들어간 이 세계의 반쪽에서 다른 반쪽 세계는 하나의 배경에 불과했다.<P.108>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려웠고 어려웠던 점은, 읽는 내내 혹여나 아버지를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 때 조금은 읽기 힘들어진 감정들도 있었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해하진 못해도 사랑했음을 그리고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넘어갈 때 그곳은 결코 수직선에 위치한 위와 아래가 아닌 수평선 쪽 어딘가 일 것이라는 것을. 사람이 사는 무리들 중 이 무리에서 저 무리로 옮겨서, 유식과 무식과 경계에서 우월한 것은 결코 없음을. 그런 감정들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 위안 삼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한 남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남길 수 있는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니 오늘따라 나도 그 한 남자가 보고 싶어진다. 장편의 글을 쓰게 된다면 나 역시도 한 남자로서의 아버지의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서전 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문학이 정말 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아니에르노는 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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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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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원을 살 수 없지만 영원할 것처럼 살면서 찰나를 기억한다. 매일매일 쳇바퀴를 굴리다가 특정한 시간을 기억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의 탄생의 시간을 기억한다. 강렬한 기억이지만 그 아이는 과연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언제까지 기억하게 될까? 신생아 때? 유아기? 아무튼 적어도 나는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기억들은 가지고 있다. 처음 동생을 만나던 순간. 어렸을 적같이 자란 강아지를 묻어주던 순간, 첫 교복을 입었을 때의 느낌(희미해지긴 했지만.) 등등.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산다. 아마도 그 순간에 대해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은 단순히 나에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옆집 사람의 탄생의 순간이나 교복을 입었을 때 느낌이 어땠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굉장히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1부는 고문 수준이었다. 긴 인생에서 그것도 인생의 초반부라고 할 수 있는, 그 단 하루. 그 단 하루의 묘사에 총 4부로 구성된 500여 페이지의 책 중 1부를 전부 할애한다. 그 정도로 이 책의 주인공인 브리오니에게는 마치 태어나는 순간처럼 강력한 유년기의 치기 어린 하루였다. 그 하루가 나비효과가 되어 그의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의 인생을 모두 바꿔버렸으니. 다 읽고 나면 굉장히 인상 깊은 하루이다. 견딜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실 독서토론을 위해서 읽었기에 읽었지, 아마 몇번이고 덮어 버리고자 했던 순간들이 왔으니... 1부의 시작은 꼭 등장인물의 묘사와 그 지루한 순간들을 표현하는데 할애한 해리포터 1권의 첫 시작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브리오니는 청소년기가 누구나 그렇듯 감수성이 예민한 몽상가 소녀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브리오니. 창작의 고통이 사물의 관찰에서 시작하듯 주변인에 관심이 많은 그 어린 소녀가 어느 날 그의 언니 세실리아와 그의 집 가정부의 아들 로비가 분수대에서 하게 되는 실랑이를 바라보던 하루, 그 하루부터 속죄는 시작된다. 깨진 화병의 조각을 찾으러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든 세실리아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로비, 그리고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본 브리오니. 어쩌면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부터 브리오니는 어렸을 적 짝사랑에 빠졌던 다정한 로비에게서 강압적인 남성을 읽었을지 모른다. 사실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연인들이 그렇듯 '썸'타는 단계의 밀당중인 그들이 적어도 브리오니에게는 그렇게 비췄던 것이다.

 브리오니와 세실리아 그리고 로비의 인생을 바꾼 사건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일어나지만 이 날 하루에 일어난다. 로비는 분수대 사건들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보내기로 마음먹는데 그만, 연습하면서 썼던 망측한 단어가 써져있는 편지를 밀봉해 들고 나왔고, 이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보내달라고 브리오니에게 부탁했다. 로비의 손을 떠난 편지는 곧바로 세실리아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브리오니가 뜯어보게 되고 로비에 대한 혐오감을 사춘기 소녀들이 그렇듯, 집에 머물고 있는 사촌지간인 롤라에게도 전한다.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네 사람. 문제는 그 날 밤 저녁식사 시간 롤라의 남동생들이 가출을 하면서 그들을 찾아 온 집안 식구들이 헤매던 순간 발생한다. 롤라가 강간을 당한 것이다. 한밤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실루엣만을 보았지만 롤라를 부축하며 '그'임을 확인한다. 우물쭈물하던 롤라는 그렇다고 대답할 뿐이다. 결국 로비는 가출한 쌍둥이를 찾아왔지만, 감옥에 갇히고 만다. '돌아와'. 세실리아는 로비가 그런 것이 아님을 확신했고. 그 길로 집안을 떠났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싱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그 뒤로 성장을 하면서 브리오니는 로비가 그럴 사람이 아님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게 되면서 속죄를 담아 문학이 아닌 세실리아와 같은 간호사가되고, 그들을 찾아 나서고 과거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한다는 내용의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지만 브리오니만큼이나 어렸던 롤라 역시 사실은 먼저 유혹하지 않았을까. 보통 강간을 한 상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 어린 시절의 치기와 어른의 욕심. '아모(사랑)초콜릿'을 만든 남자이지만, 만인에게 베풀며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남자일 뿐이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한 내용인데, 사실 책에는 나오지 않으니 확인할 길은 없고 나 혼자만의 몽상이다.

 

이 긴 소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을 굳이 찾으라면, 브리오니가 간호사로 전쟁통에서 뤽을 만난 장면이다. 무수한 장면이 전쟁을 묘사하고, 그녀의 잘못과 타인의 시선들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녀의 소설 안에서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이제 막 수습 간호사가 되어 전쟁통에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시작하면서 우쭐해진 그녀가 마주친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단지 프랑스어를 할 줄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뤽의 말동무가 되라는 수간호사의 말을 따르게 된다. 막 수술을 끝마친 뤽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를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했고 자신이 사는 고향에 대해 말하는 듯한 행동에 그녀는 여기는 그 곳이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두개골이 함몰되어 임종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뤽이 그녀의 머리에 기대어 죽음을 맞이 한 순간, 그 하루가 안되는 시간 동안에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 자세하진 않지만 확실한 어조로 표현한 그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더 마음에 드는 순간은 그 감정을 채 느끼기도 전에, 다른 환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그를 옮기고 일상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분이다.

20억명의 사람들이 20억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20억 개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P.61>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사회. 평범함이 최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평범할 수 없는 사회. 속죄 속의 전쟁 통은 그런 사회였다. 읽는 내내 브리오니가 자신의 죄를 자신의 잘못을, 자기방어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긴 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런 내용들이 가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서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P.449> 

 속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아직 브리오니는 완전하게 속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써, 모든 사실들을 글로 남겨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모습이. 그리고 사실은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의 애닳은 사랑 이야기가 두 사람이 만나면서 끝나길 바라며 마무리한 3부의 내용이. 1999년의 어느날 늙은 여인이 고백하게 되는 그 순간이, 아직 그녀의 척추를 찾지는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속죄라는 단어가, 정말 지극히 이기적인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 단순한 단어의 해석만으로 단정 지어지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속죄라는 것은 용서처럼 해를 입은 사람의 능동이 아닌 피해자를 배제하고 가해자가 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아직 브리오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죽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브리오니는 소설을 수단으로 그녀의 죄를 만 천하에 알림으로써 그 죄를 속죄하려고 했다. 과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 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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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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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작가는 짓궂을 정도로 독자에게 묻는다. 시간과 공간 역시 정해져있지 않다. 제목만 정해져 있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래서? 왜 가볍고 왜 그것을 참을 수 없는가 당신은 무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가벼움에 대한 이야기? 물어봐도 책은 종이이기 때문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사실 책을 몇 번 더 읽었다. 아마도 처음에 읽었던 때에는 줄거리를 쫓느라 너무 놓치는 것이 많아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밀란쿤데라의 책은 짧든, 길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참 지치는 책이다.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이야기할 때, 최초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의 감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이 웅장한 멜로디를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의 우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으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사실 이 노래를 처음 작곡할 때, (돈을 갚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곡을 붙인 것이라고 덧붙여놓는 가벼움이라니.

끊임없는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책이다. 무섭게시리 시작에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한 번뿐인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인생'이라며 가벼움을 토로하는 미친사람...ㅋㅋㅋ 그래서 그런가 5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이 들고 다니는 내내 한결 가벼웠던 것은 기분 탓일지도. 아무튼 소비에트 체제의 전체주의를 배경으로 한없는 역사의 무거움에서 밀란쿤데라가 찾아낸 가벼움. 그는 그 가벼움이 과연 무거움에 비해 질량적이 아닌 의미적으로도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여기 네 사람과 한 마리의 애완견이 있다.

 

토마시

그는 '가벼움의 절정'에 서 있는 사람이다. 한 사람에게 머무는 무거운 사랑보다는 차라리 '에로틱한 우정'을 택한 남자. 그 우정을 이해해 준다고 믿는(사실은 그러지 못했던) 비를 좋은 친구로 두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여섯 개의 우연이 겹쳐 나타난 테레자는 그의 인생을 흔든다. 불문율을 깨고 테레자와의 결혼을 통해 사랑의 무거움을 택했지만 사실, 그 시간 동안에도 어떠한 가벼움을 놓지는 못한다. 특유의 가벼움으로 툭 뱉은 한마디가 문제가 되어 외과의사직을 내려놓고 창문 닦는 사람이 되었을 때도 그의 삶은 가벼웠지만 무거웠던 여인 테레자는 놓지 못한다. 결국 그는 모든것을 놓아버리고 '토끼'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P.17>

테레자

 그녀는 꼬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태생적으로 인생의 무거움을 짊어지고 다녔던 테레자는 그 무거움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그곳에서 가벼웠던 외과의사 토마시를 만나게 된다. 첫 눈에 끌린 그를 위해 평생을 살려했던 테레자. 그를 위해서 직업도, 삶의 방식도 모든 것을 바꿨지만 그 특유의 무거움을. 옭아메고자 했던 습성을 결국 버리지는 못했다.

 토마시가 그녀를 위해 죽음을 준비했을 때까지도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려고 했던 그녀는 육체(가벼움)와 영혼(무거움)을 분리해 보고자 했으나, 결국은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아마도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방에는 소파, 작은 탁자, 그리고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예전부터 그녀를 기다리던 램프가 켜져있었다. 그리고 램프 위에는 커다란 두 눈이 장식된, 날개를 활짝 편 나비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테레자는 자기가 목표를 달성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토끼에 얼굴을 비볐다.<P.496> 

사비나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매력적인 예술가 사비나. 그녀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토마시의 '에로틱한 우정'을 이해해준 단 하나의 여자. 그러나 그녀는 결코 가볍지 못하다. 공산주의 치하의 삶이 싫어서 뉴욕으로 갔지만 그 곳에는 또 다른 자유주의라는 키치가 있어 절망을 맛봤던 그녀. 그녀는 토마시를 '키치의 왕국에 나타난 괴물'이어서 사랑했지만 사실은 어쩌면 프란츠에게 끌리던 마음을 애써 참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첫 그림 '무대장치'. 극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려낸 그림, 되려 가르치는 사람보다 더 변덕적으로 사실주의를 표현한 그 그림의 얼룩 한 곳에서 시작되는 이상학적인 뒷면에 대해 상상하는 그녀는, 그녀가 골라낸 아버지의 유산인 중산모자만큼이나 긴 회귀속에서 살고있다. 그러나, 'A를 배신하고 간 곳의 B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A와 화해하기는 커녕 점점 멀어져 갈 뿐' 이다.

이 그림은 망친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마음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용으로 그려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자국은 찢어진 틈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그런 이유로 내가 그린 첫 연작을 무대장치라 불렀던 거야. 물론 아무도 내 그림을 보진 못하게 했지. 보았다면 나는 퇴학당했을 거야.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P.114>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P.411>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었다.<P.201>

프란츠

대학교수였던 그는 그 누구보다 무거운 인물이다. 키치의 왕국의 괴물이 토마시였다면, 그는 아마도 왕이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시선의 대비로 더욱 강조하긴 했지만, 무거움은 가벼움과 짝을 짓는다고 했던가. 그는 사비나와 결혼하기 위해 마리클로드와 이혼을 결심한다. 사실 마리클로드는 프란츠의 마음에 드는 부인은 아니었지만, '사랑을 위해 죽겠다'는 그녀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었기에 결혼생활을 해 오다가 마침표를 찍고 사비나와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났고 그의 마지막은...

프란츠는 갑자기 이 대장정이 끝에 다다랐다는 인상을 받았다. 침묵의 국경들은 유럽으로 좁아졌고, 대장정이 완수된 공간은 지구 한복판의 조그만 연단에 불과해졌다. 한때 연단 및에 몰려들던 군중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대장정을 외면했고, 대장정은 관중 없는 고독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마침내 무대는 더욱더 좁아져 어느 날 면적없는 한 점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P.433>


그리고, 한마리의 개 카레닌

나는 사실 이 책의 핵심적인 이야기는 카레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키치'에 갇혀 산다. 굳이 어려운 책 속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테레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애완견 카레닌처럼 테레자만 바라보며 살다가 어느순간 늙어서 죽는건 아닐까. 카레닌은 좁은 테레자의 집에 적응하여 그녀의 삶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살았다. 마지막 죽는 날까지도. 사실 산책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온 힘을 다해 그녀와의 삶을 정리했고, 전직 의사였던 토마시의 도움으로 죽곤 테레자가 봐 두었던 묏자리에 묻힌다.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에서 쿤데라는 행복이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안정을 반복하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라면, 인간은 선형의 삶을 살기 때문에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지만 개였던 카레닌은 원형의 삶 속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아마도 오랜시간이 지나면 카레닌은 잊혀지겠지만(카레닌 뿐만아니라 테레자도, 토마시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 애완견의 삶은 밀란쿤데라가 서두에 던진 것처럼 '한번 뿐인 삶'이었기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 그리고 '키치'


그의 모든 친구들 중 오로지 사비나만이 그를 잘 이해했다. 그녀는 화가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모든 점에서 키치와는 정반대라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키치의 왕국에서 당신은 괴물이야. 미국 영화나 소련 영화에서 당신같은 사람은 파렴치한 역할밖에는 할 수 없을 거야."<P.24> 

전체주의적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P.411>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P.415>

 키치의 왕국에서 당신은 괴물일 것이다. 사비나가 토마시를 좋아했던 이유는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만은 않았다. 이제 키치라는 용어는 너무 광범위해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 사람이 속해있는 소속의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사비나가는 키치의 무거움을 피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인이 아니었을까. 소련의 전체주의의 무거운 키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자유만세!'를 외치는 또 다른 키치를 보고 한없이 무너내려야 했던 사비나. 그녀는 아마도 한 여자에게 예속되지 않는 토마시를 보면서 사랑은 한 여인에게만 귀속되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버리고 '에로틱한 우정'을 주장하는 토마시의 가벼움(!!!)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토마시 역시 테레자의 왕국에서 마침내는 그 숭고한 무거움의 키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가장 가벼워 지려고 했지만 결국은 무거움을 동경했던 것은 사비나가 아니었을까.

 사비나를 사랑하여 이혼까지 한 프란츠. 어쩌면 끝끝내 토마시만큼 사비나의 마음을 잡아 끌지 못 했던 것은 '키치의 왕국'에서 '키치의 왕'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책을 참을수 없게 무겁게 만든 밀란쿤데라. 결국 하고싶은 이야기는 주변의 흔한 사랑이야기 였었으면 한다. 많은 배경적인 가벼움과 무거움 아이러니가 존재하지만 그저 '네 사람의 지독한 사랑이야기'로 마무리 될 수 있기를.

 

+++ 그리고 '중산모자'

 

 사비나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들 중 형제간의 다툼속에서 사비나는 그 싸움을 경멸하고 단 하나를 챙겨나왔다. 아버지의 중산모자. 그 모자는 아마도 할아버지의 것이었고, 어쩌면 그 전에도 누군가가 쓰던 것일수도. 소설의 첫 마디에 등장하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한번 산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를 잇는 절묘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중산모자만 쓰고 나체로 서 있는 사비나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면서도 이 책의 가벼움(한번뿐인 사비나의 숨겨지지 않은 삶)과 무거움(모자가 지켜본 사비나 가족의 이력)을 이어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밀란쿤데라는 이렇게까지 해석해보기를 원한걸까 그냥 아 섹시한 장면이군 하고 넘어가기를 원했을까...^^;

 

+++ 그리고 '테레자의 꿈'

 

그녀는 토마시와 살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꿈을 꾼다. 나체로 여려 여인들과 함께 수영장을 행진하며 춤추고 노래하다가 동작이나 음이 틀리면 바로 지켜보고 있던 토마시가 총살하는 꿈. 마침내 어느순간 그녀도 꿈에서 죽어 어디론가 다른 시체들과 옮겨지는데 살아있다고, 소변이 마렵다고 외치자 그 시체들도 일제히 '감각일 뿐'이라며, 자신들도 요의를 느끼지만 소변은 나오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꿈을 꾼다. 이 꿈은 단순히 토마시의 여러 여인들 사이에 끼인 그녀의 괴로움만을 나타냈던 것일까? 한번 더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고싶었던 부분이 있다. 과연 이 책의 주인공(책의 가장 큰 시점)은 누구이며,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이다. 이 책의 결말은 어느 부분으로 봐야하는가? 그리고 밀란쿤데라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내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토로하는 인물은 사비나이며, 이 책의 결말은 토마시와 테레자의 부고를 듣고 알수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꼈던 그 시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식으로 책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만큼이나 사비나라는 인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낀 책. 시간이 지나서 줄거리가 잊혀져 갈 때 쯤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강추!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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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멋진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흠칫 놀랐다. 분명히 읽었던 책인데, 단순한 SF소설로 남아있던 그 책에 대해 문학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뒤로 사실 부끄러워 졌다. 과거에 읽은 책들은 나는 과거의 감정으로 읽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무도 늙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세계.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고, 만인은 만인의 것인 세계. 당신은 더이상 고통을 참을 필요가 없고 더러움을 보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당신은 늙지 않고 죽음은 당연한것으로 괴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곳. 그런 유토피아가 존재한다면. 그 곳은 정말 모두가 '행복'한 것일까.

 사실 나는 일본의 문학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의 행복을 찾는 방식들에 대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들을 볼 때면 가끔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대다수의 영화가 액션, 조폭들,부조리에 대한 이야기 이고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에서 빠질 수없는 것은 사랑이라는 조미료인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영화들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부러워지는 오늘이다.

이런 책을 읽고나면 항상 혼란스럽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더 힘든 질문이다. '내가 사는 이 세계는 괜찮은가' 혹은, '여기는 어디일까', '어디쯤에서 나는 살고 있는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대답한다. 모든 고통은 몇 알의 소마로 소멸된다고. 그로 인한 반작용은 고작 몇 년의 여생이 줄어듦이다. 하지만 문제는 안된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 당연한 것이며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입'하면된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다. 어머니는 상스러운 말이다. 여기있는 모든 사람들은 공장에서 태어났으며 그저 유희를 즐기고, 자는 동안에는 수만번씩 반복되는 여러가지 규율들을 뇌로 익힌다. 우리는 그저 행복을 위해 산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결합하는 일은 없고, 더구나 아이를 낳는 비상식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이는 모두 시험관에서 나오면 되니까.

우리는 식은 죽 먹듯 새로운 개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단말일세. 우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거야. 이단적 행위는 단순한 한 개인의 생명 이상의 것을 위협하거든. 다시 말해서 그 것은 사회 자체에 타격을 주는 것이지. 바로 사회 자체에게<P.184>

책을 읽는 내내 소름끼치도록 공상소설이 아니라는 생각만 잔뜩들었다. 2016년에 읽어 내려가는 독자가 1932년도에 쓰여진 책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다는건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그 시대의 그 상상력으로 소름이 돋는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바라보는 멋진 신세계는 정말 먼 미래가 아닌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나이어린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소모품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멋진 신세계는 정말 멋지게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아랫계급은 교육을 할 필요조차없다. 세익스피어는 낡은 것이기에 필요가 없으니 아무리 멋지더라도 최상위 계층만이 확인 할 정도로만 남아있으면 된다. 어려운 단어들 어려운 말들로 빙빙둘러서 설명하고자하면 정말 힘겹게도 써 내려갈 수 있겠지만 어쩌면 현실은 허상이어서 낡은 진실들을 가려야할 이유가 어딘가에는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발상이 과거에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최적의 인구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빙산과 같은 형태를 띠도록 구성되는 것이야.-구분의 팔은 물 밑에 있고 구분의 일은 물 위에 있어야 되는거야."

"물 밑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까요?"

"물 위에 있는 것보다 더 행복을 느끼는 법이야. 예컨데 여기 있는 자네 친구보다 더 행복하지."<P.278>

사실 읽는 내내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읽어 내려왔다.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저 스토리를 따라내려가면서 외설적이고 야만적인 단어로서의 '어머니'.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에 대한 것들이 맴돌 뿐이었다. 이것은 현실과 너무 닮아있다. 빅데이터시대인 오늘, 사람들은 말한다. 모든걸 다 알 수 있기에 모든 걸 다 알필요가 없다고. 정보는 너무 흔한 것이되었고. 내가 알게된 정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귀하지 못한 시대. 헉슬리가 1932년 이야기했던, '주입식 교육'은 어쩌면 지금 랜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보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들.

이를테면 물방울은 단단한 화강암에 구멍을 뚫지만 그것은 물방울이라기보다 오히려 액체의 형체를 띤 밀랍 방울들이다. 어떤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에 밀착하여 외피를 덮고 한 덩어리가 되어 마침내 진홍색 일체로 되어 버리는 방울이다. P.38

"결국 만인은 만인의 소유물 이니까."

4년간, 매주 3일 밤, 1백 번씩 반복한 말이다, 하고 버나드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는 수면시 교육의 전문가 였다. 6만 2천 4백 회의 반복이 한 개의 진리를 만든다. 바보같은 것들! <P.61>

만인이 만인의 것인 사회. 고통과 불필요한 것이 모두 사라진 이 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나의 얼굴은 너의 얼굴과 같고, 각자의 계급에 불만이 없기를 끊임없이 주입받아 살아온 당신은 과연 행복한 걸까 아니면, 독약에 감염된 것일까.

문명이 닿지 않은 어딘가에서 '비 문명'의 '야만'을 간직한 어느 나라에 문명을 주입하고 이해하라 강요하는, 자본을 들이대는 다큐멘터리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던 경험들.. 시뮬라르크를 현실이라고 믿으면서, 그저 소마라는 약을 먹으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과연 행복을 극대화 하는 삶일까? 아니 애초에 괴로움이 사라지는 삶이라는게 원래의 삶이고 고통이 가득한 지금이 가짜의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과연 당신은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거짓된 공간이 진실보다 훨씬 편안하고 편리하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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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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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재화만 있다면 가능한 긍정사회. 그래서 인류는 더 피로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몇번의 클릭질 만으로 알아 볼 수 있고, 원한다면 직접 날라가지 않아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급부도 필요하고,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하고싶다는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사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렇다.

 독일에서 유명해졌다는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한국으로 번역되어 수입되었다. 사실 눈여겨 보면 종종 지하철에서 눈에띄는 보라색(피로사회), 파랑색(투명사회)책을 읽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읽긴 읽었나보다. 읽는 내내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철학에 대한 기본 단어의 이해가 없거나, 필경사 바틀비를 안읽어보았다면 조금은 난해해 지는 책이다. 사실 나는 아직 바틀비를 접해보지 않아서 한 챕터가 조금 난해하긴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



<신경성 폭력>

21세기는 박테리아의 시대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피로사회. 면역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이미 암까지도 정복되었다고 선언하는 이 시대의 고유한 질병은 신경성 질환이다.

적대성은 바이러스적 형태를 띠는 경우에조차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적대적 바이러스는 시스템에 침입하고, 시스템은 면역체계처럼 작동하면서 침입해온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대성의 계보학은 폭력의 게보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P.20-21>

더 이상의 물리적인 폭력성이 없는 평화사회. 이런 긍정화된 사회에서는 또 다른 폭력이 나온다는 주장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바이러스'가 아니기 때문에 면역체계에서는 '항체'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자주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않는가. 그래서 생기는 '스트레스'. 이 것을 이 책에서는 내재성의 테러라고 표현하고 있다.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을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P.2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책에서는 이미 규율사회는 지났다고 선언한다. '~을 하면 안된다' 라는 식의 규제가 만연한 사회는 이미 종말을 고했고 현대의 사회는 '성과사회'라는 주장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개인적으로 규율사회에 더 가까운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일단은 책의 주장을 따라 읽어 가보면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관계적 상태에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29>

 이 책의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테두리가 아닌 나의 잣대때문에 나를 가혹하게 몰아붙일 때가 많다. '올해 100권의 책을 읽겠어'라던가, '올해 자격증을 따야지' 이러한 목표를 정해놓은 가해자도 나이고, 이것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야하는 사람도 나 일수밖에없다. 이는 실로 역설적인 자유이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기위해 나를 가둔다. 읽다보니, 현대 사회는 정말 규율사회를 넘어서 성과사회가 된 것일까. 그 성과사회의 자유의 제약은 규율사회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깊은심심함~바틀비의 경우>

 빠른것. 조금더 가까이에 밀착되어서 배워야한다. 눈이 깜빡 하는 그 순간에도 저 앞으로 나아가 버리는 경쟁상대들. 현대사회는 빠르고 즉각적인 대처를 요구한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알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P.48>

현대인은 말그대로 감정이 없는 기계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스마트폰 없는 나 를 생각해 본적이있다. 나는 혹시 스마트폰에 갖힌 게 아닐까. 나는 내면의 나를 만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옆에 누군가가 있지않은데 그 작은 기계가 주는 피로감은 대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놓지 못한다. 얼마전에 리뷰하였던 <오래된 미래>에서 나왔던 구절처럼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 위는 텅 비어 있다고 말했다. 

 텅 빈 성과사회. 혹은 텅빈 내면을 보기위해 빠르게 배우고, 빠른 속도로 가고있지만 실은 그 윗부분은 텅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 


<피로사회>

그리하여.. 피로사회. 저자는 이제 성과주의의 시대도 지나가고있고 앞으로는 도핑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있다. 신경향상제. 스포츠맨십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경향상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어려운 예문은 집어치고 당장 내가 매우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있는데, 이를 위해서 박카스를 마시든, 청심환을 먹든 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단, 공정성만 보장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오히려 긍정의 과잉을 유발하고,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첨언한다.

 고백해보건데, 나는 이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챕터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앞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기 때문일지도모르고, 뭔가 불편한 부분이 있어서 일지도모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아직 이 챕터를 이해할 만큼 농익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사회>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첨언해 두었다는 우울사회. 개인적으로는 피로사회보다 공감가는 구절도 부분도 많은 챕터이다. 우울사회.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게는 신이 보상의 심급이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장하고 인정해준다. ... 사람들은 열려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 버렸다.<P.86-87>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는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P.113>


읽는 것은 되려 쉽게 읽히는 책이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건너뛰는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

변명을 해보자면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서 꾸역꾸역읽었다. 사실 짧은 책이고 명료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책이라서 반박하며 읽기보다는 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있구나 하면서 읽어 나가서 더 빠르게 읽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만인의 대한 투쟁이 끝나고 내면의 나의 피로함(성과)과 대결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온전하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심심찮게 나오는 뉴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없어 극단적으로 분신하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되려 냉소적인 비판을 받기도하는 현대 사회이다. 이런 사회의 극단에서 싸우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호모사케르다. 우울과 피로가 지배하는 사회. 우리나라는 아직 현대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싶은 사람이 있는지 몰라도, 책에서 말하는 내면의 피로함이 아닌 사회적인 억압에서, 전통적인 규율사회에서 오는 첨탑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양립이 불가능 하다는 말은 아니다. 만인이 사는 사회이므로.



"Cogito ergo Sum".

생각의 주체인 내가 사유하는 것이 피로해진다면 그 피로감 역시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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