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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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재화만 있다면 가능한 긍정사회. 그래서 인류는 더 피로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몇번의 클릭질 만으로 알아 볼 수 있고, 원한다면 직접 날라가지 않아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급부도 필요하고,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하고싶다는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사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렇다.

 독일에서 유명해졌다는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한국으로 번역되어 수입되었다. 사실 눈여겨 보면 종종 지하철에서 눈에띄는 보라색(피로사회), 파랑색(투명사회)책을 읽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읽긴 읽었나보다. 읽는 내내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철학에 대한 기본 단어의 이해가 없거나, 필경사 바틀비를 안읽어보았다면 조금은 난해해 지는 책이다. 사실 나는 아직 바틀비를 접해보지 않아서 한 챕터가 조금 난해하긴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



<신경성 폭력>

21세기는 박테리아의 시대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피로사회. 면역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이미 암까지도 정복되었다고 선언하는 이 시대의 고유한 질병은 신경성 질환이다.

적대성은 바이러스적 형태를 띠는 경우에조차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적대적 바이러스는 시스템에 침입하고, 시스템은 면역체계처럼 작동하면서 침입해온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대성의 계보학은 폭력의 게보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P.20-21>

더 이상의 물리적인 폭력성이 없는 평화사회. 이런 긍정화된 사회에서는 또 다른 폭력이 나온다는 주장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바이러스'가 아니기 때문에 면역체계에서는 '항체'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자주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않는가. 그래서 생기는 '스트레스'. 이 것을 이 책에서는 내재성의 테러라고 표현하고 있다.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을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P.2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책에서는 이미 규율사회는 지났다고 선언한다. '~을 하면 안된다' 라는 식의 규제가 만연한 사회는 이미 종말을 고했고 현대의 사회는 '성과사회'라는 주장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개인적으로 규율사회에 더 가까운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일단은 책의 주장을 따라 읽어 가보면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관계적 상태에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29>

 이 책의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테두리가 아닌 나의 잣대때문에 나를 가혹하게 몰아붙일 때가 많다. '올해 100권의 책을 읽겠어'라던가, '올해 자격증을 따야지' 이러한 목표를 정해놓은 가해자도 나이고, 이것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야하는 사람도 나 일수밖에없다. 이는 실로 역설적인 자유이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기위해 나를 가둔다. 읽다보니, 현대 사회는 정말 규율사회를 넘어서 성과사회가 된 것일까. 그 성과사회의 자유의 제약은 규율사회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깊은심심함~바틀비의 경우>

 빠른것. 조금더 가까이에 밀착되어서 배워야한다. 눈이 깜빡 하는 그 순간에도 저 앞으로 나아가 버리는 경쟁상대들. 현대사회는 빠르고 즉각적인 대처를 요구한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알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P.48>

현대인은 말그대로 감정이 없는 기계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스마트폰 없는 나 를 생각해 본적이있다. 나는 혹시 스마트폰에 갖힌 게 아닐까. 나는 내면의 나를 만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옆에 누군가가 있지않은데 그 작은 기계가 주는 피로감은 대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놓지 못한다. 얼마전에 리뷰하였던 <오래된 미래>에서 나왔던 구절처럼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 위는 텅 비어 있다고 말했다. 

 텅 빈 성과사회. 혹은 텅빈 내면을 보기위해 빠르게 배우고, 빠른 속도로 가고있지만 실은 그 윗부분은 텅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 


<피로사회>

그리하여.. 피로사회. 저자는 이제 성과주의의 시대도 지나가고있고 앞으로는 도핑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있다. 신경향상제. 스포츠맨십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경향상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어려운 예문은 집어치고 당장 내가 매우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있는데, 이를 위해서 박카스를 마시든, 청심환을 먹든 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단, 공정성만 보장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오히려 긍정의 과잉을 유발하고,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첨언한다.

 고백해보건데, 나는 이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챕터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앞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기 때문일지도모르고, 뭔가 불편한 부분이 있어서 일지도모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아직 이 챕터를 이해할 만큼 농익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사회>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첨언해 두었다는 우울사회. 개인적으로는 피로사회보다 공감가는 구절도 부분도 많은 챕터이다. 우울사회.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게는 신이 보상의 심급이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장하고 인정해준다. ... 사람들은 열려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 버렸다.<P.86-87>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는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P.113>


읽는 것은 되려 쉽게 읽히는 책이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건너뛰는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

변명을 해보자면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서 꾸역꾸역읽었다. 사실 짧은 책이고 명료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책이라서 반박하며 읽기보다는 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있구나 하면서 읽어 나가서 더 빠르게 읽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만인의 대한 투쟁이 끝나고 내면의 나의 피로함(성과)과 대결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온전하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심심찮게 나오는 뉴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없어 극단적으로 분신하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되려 냉소적인 비판을 받기도하는 현대 사회이다. 이런 사회의 극단에서 싸우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호모사케르다. 우울과 피로가 지배하는 사회. 우리나라는 아직 현대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싶은 사람이 있는지 몰라도, 책에서 말하는 내면의 피로함이 아닌 사회적인 억압에서, 전통적인 규율사회에서 오는 첨탑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양립이 불가능 하다는 말은 아니다. 만인이 사는 사회이므로.



"Cogito ergo Sum".

생각의 주체인 내가 사유하는 것이 피로해진다면 그 피로감 역시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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