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영원을 살 수 없지만 영원할 것처럼 살면서 찰나를 기억한다. 매일매일 쳇바퀴를 굴리다가 특정한 시간을 기억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의 탄생의 시간을 기억한다. 강렬한 기억이지만 그 아이는 과연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언제까지 기억하게 될까? 신생아 때? 유아기? 아무튼 적어도 나는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기억들은 가지고 있다. 처음 동생을 만나던 순간. 어렸을 적같이 자란 강아지를 묻어주던 순간, 첫 교복을 입었을 때의 느낌(희미해지긴 했지만.) 등등.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산다. 아마도 그 순간에 대해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은 단순히 나에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옆집 사람의 탄생의 순간이나 교복을 입었을 때 느낌이 어땠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굉장히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1부는 고문 수준이었다. 긴 인생에서 그것도 인생의 초반부라고 할 수 있는, 그 단 하루. 그 단 하루의 묘사에 총 4부로 구성된 500여 페이지의 책 중 1부를 전부 할애한다. 그 정도로 이 책의 주인공인 브리오니에게는 마치 태어나는 순간처럼 강력한 유년기의 치기 어린 하루였다. 그 하루가 나비효과가 되어 그의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의 인생을 모두 바꿔버렸으니. 다 읽고 나면 굉장히 인상 깊은 하루이다. 견딜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실 독서토론을 위해서 읽었기에 읽었지, 아마 몇번이고 덮어 버리고자 했던 순간들이 왔으니... 1부의 시작은 꼭 등장인물의 묘사와 그 지루한 순간들을 표현하는데 할애한 해리포터 1권의 첫 시작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브리오니는 청소년기가 누구나 그렇듯 감수성이 예민한 몽상가 소녀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브리오니. 창작의 고통이 사물의 관찰에서 시작하듯 주변인에 관심이 많은 그 어린 소녀가 어느 날 그의 언니 세실리아와 그의 집 가정부의 아들 로비가 분수대에서 하게 되는 실랑이를 바라보던 하루, 그 하루부터 속죄는 시작된다. 깨진 화병의 조각을 찾으러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든 세실리아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로비, 그리고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본 브리오니. 어쩌면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부터 브리오니는 어렸을 적 짝사랑에 빠졌던 다정한 로비에게서 강압적인 남성을 읽었을지 모른다. 사실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연인들이 그렇듯 '썸'타는 단계의 밀당중인 그들이 적어도 브리오니에게는 그렇게 비췄던 것이다.

 브리오니와 세실리아 그리고 로비의 인생을 바꾼 사건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일어나지만 이 날 하루에 일어난다. 로비는 분수대 사건들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보내기로 마음먹는데 그만, 연습하면서 썼던 망측한 단어가 써져있는 편지를 밀봉해 들고 나왔고, 이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보내달라고 브리오니에게 부탁했다. 로비의 손을 떠난 편지는 곧바로 세실리아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브리오니가 뜯어보게 되고 로비에 대한 혐오감을 사춘기 소녀들이 그렇듯, 집에 머물고 있는 사촌지간인 롤라에게도 전한다.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네 사람. 문제는 그 날 밤 저녁식사 시간 롤라의 남동생들이 가출을 하면서 그들을 찾아 온 집안 식구들이 헤매던 순간 발생한다. 롤라가 강간을 당한 것이다. 한밤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실루엣만을 보았지만 롤라를 부축하며 '그'임을 확인한다. 우물쭈물하던 롤라는 그렇다고 대답할 뿐이다. 결국 로비는 가출한 쌍둥이를 찾아왔지만, 감옥에 갇히고 만다. '돌아와'. 세실리아는 로비가 그런 것이 아님을 확신했고. 그 길로 집안을 떠났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싱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그 뒤로 성장을 하면서 브리오니는 로비가 그럴 사람이 아님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게 되면서 속죄를 담아 문학이 아닌 세실리아와 같은 간호사가되고, 그들을 찾아 나서고 과거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한다는 내용의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지만 브리오니만큼이나 어렸던 롤라 역시 사실은 먼저 유혹하지 않았을까. 보통 강간을 한 상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 어린 시절의 치기와 어른의 욕심. '아모(사랑)초콜릿'을 만든 남자이지만, 만인에게 베풀며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남자일 뿐이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한 내용인데, 사실 책에는 나오지 않으니 확인할 길은 없고 나 혼자만의 몽상이다.

 

이 긴 소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을 굳이 찾으라면, 브리오니가 간호사로 전쟁통에서 뤽을 만난 장면이다. 무수한 장면이 전쟁을 묘사하고, 그녀의 잘못과 타인의 시선들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녀의 소설 안에서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이제 막 수습 간호사가 되어 전쟁통에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시작하면서 우쭐해진 그녀가 마주친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단지 프랑스어를 할 줄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뤽의 말동무가 되라는 수간호사의 말을 따르게 된다. 막 수술을 끝마친 뤽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를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했고 자신이 사는 고향에 대해 말하는 듯한 행동에 그녀는 여기는 그 곳이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두개골이 함몰되어 임종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뤽이 그녀의 머리에 기대어 죽음을 맞이 한 순간, 그 하루가 안되는 시간 동안에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 자세하진 않지만 확실한 어조로 표현한 그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더 마음에 드는 순간은 그 감정을 채 느끼기도 전에, 다른 환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그를 옮기고 일상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분이다.

20억명의 사람들이 20억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20억 개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P.61>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사회. 평범함이 최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평범할 수 없는 사회. 속죄 속의 전쟁 통은 그런 사회였다. 읽는 내내 브리오니가 자신의 죄를 자신의 잘못을, 자기방어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긴 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런 내용들이 가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서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P.449> 

 속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아직 브리오니는 완전하게 속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써, 모든 사실들을 글로 남겨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모습이. 그리고 사실은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의 애닳은 사랑 이야기가 두 사람이 만나면서 끝나길 바라며 마무리한 3부의 내용이. 1999년의 어느날 늙은 여인이 고백하게 되는 그 순간이, 아직 그녀의 척추를 찾지는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속죄라는 단어가, 정말 지극히 이기적인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 단순한 단어의 해석만으로 단정 지어지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속죄라는 것은 용서처럼 해를 입은 사람의 능동이 아닌 피해자를 배제하고 가해자가 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아직 브리오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죽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브리오니는 소설을 수단으로 그녀의 죄를 만 천하에 알림으로써 그 죄를 속죄하려고 했다. 과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 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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