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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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리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아이러니하게도 <일루셔니스트>가 생각났다. 그 영화의 줄거리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 단지 저 장면. 마법사가 마술 쇼 중 오렌지나무를 키워내는 장면이 기억났을 뿐이다. 어떤 트릭을 썼던, 오렌지 나무는 더 이상 '자연적'인 형태가 아니라, 마법사에 의해서 짧은 시간 안에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 '인위적인 오렌지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말도 안 되는 트릭을 사용하는 마법'으로 치부했던 일. 기계적으로 수 초내에 아주 아름다운 오렌지나무로 자라나는 하나의 오렌지 씨앗. 그것을 컨트롤하는 마술사...

"만약, 당신이 만든 오렌지나무가 아주 썩어버렸거나, 타인을 섞게 만들 오렌지 나무라면."

아마 당신은 당신의 트릭이 실패했다고 관객에게 말하거나, 아예 오렌지나무를 없애거나 혹은 다시 마술을 재개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마술 쇼의 일부분이었다면 말이다.

맨 첫 장을 보았더니 제목이 쓰여있더군. <시계 태엽 오렌지>라고. 그걸 보고 내가 말했지, "거참 멍청한 제목이로군. 도대체 누가 태엽 달린 오렌지에 대해 들어보기라도 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일부분을 설교하듯 위엄찬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었지. "인간, 즉 성장하고 다정할 수 있는 피조물에게 기계나 만드는 것에 적합한 법과 조건들을 강요하려는 시도나 또 수염이 난 신의 입술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시도. 여기에 대항하여 나는 나의 칼, 펜을 든다." <P.31>

이 책은 제목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 책이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뒤통수를 맞은 듯 이해하기 힘든 책이었다. 내게 이 책을 권한 사람은 이렇게 소개했다 '또라이가 판을 치는 책이다. 아주 충격일 거야.' 참고로 나는 또라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똘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다. 한 곳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책 역시 어딘가 미쳐서 나사를 풀어버린 책이 좋다. 그런데 이 책은, 아주 많은 곳의 나사가 풀려있다.

어떤 정부라도 버젓한 젊은이를 태엽 감는 기계로 만드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그건 탄압을 자랑스레 여기는 정부나 하는 짓이야. <P.183>

요즘 나라가 시끄럽다. 얼마 전에 박근혜 게이트라는 단어를 썼다가 뭇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대통령의 이름이 볼드모트도 아니고, 확실히 현실이 소설보다 즐거운 시기에 살고 있다. 드라마 작가들은 분발하시길. 아무튼 이 책의 주제는 이거다. '사회는 공동의 선을 위해서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가'

책의 주인공 알렉스는 아주 못된 소년이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알렉스. 책은 3부로 구성되어있는데 1부는 알렉스의 입에 담기 어려운 비행에 대해서, 2부는 그 후 소년원에 가게 된 이야기와 알렉스에게 더 부당하게 선을 강요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3부에서는 더욱더 처참하게 강요된 선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책은 전후반 내내 충격요법을 사용한다. 아주 자극적인 범죄행위들 살인, 마약 강간에 대하여 서슴치 않은 날것의 단어로 늘어놓는다. 알렉스는 아주 못된 아이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광적인 인물이다. 이 사람은 교화되지 않을 인물이며, 소년원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그려진다.

교도소에서 알렉스는 자유를 억압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일련의 사건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서 알렉스는 새로운 실험 '루드비히 요법'의 첫 사례가 된다. 그는 더 이상 사회의 악이라 생각되는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면 심각한 두통과 고통을 느낀다. 참을 수 없는 구토 때문에 그는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고 되레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교도소를 나와 자유를 얻었지만 더 이상 그의 일상이었던 살인과 강간 마약은 눈앞에 두기도 힘든 더러운 일이 되었다.

한 사람의 자유가 강압당한 사회. '살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진 인간 알렉스.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완벽하게 사회의 편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는 그를 부품으로 받아들여줄 준비가 안된듯했다. 그는 이 삶이 싫었다. 더 이상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택했다.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이 일로 어떤 득을 보나요? 지금의 상태가 치료가 되나요? 내가 다시는 속이 메스껍지 않고도 <합창>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나요?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나요? 나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나요?<P.189>

일련의 과정들은 충격적이다.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화자'는 알렉스이고, 알렉스는 이곳저곳에서 자신보다 더 흉폭한 '사회'의 굴레에 갇힌다. 정작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회는 더욱 가혹했으며, 공범들은 잡히지 않았고 경찰이 되거나 행복한 삶을 산다. 같은 일을 했지만 본인만 괴로움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 이익,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모독하는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된 거죠. 그게 진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쟤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의 피조물도 더 이상은 아니지요. <P.150>

넌 내 생각에도 죄를 저질렀어. 그렇지만 그에 대한 처벌이 너무 심했어. 저들은 너를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었어. 네겐 선택할 권리가 더 이상 없는 거지. 넌 사회에서 용납되는 행동만 하게 되었어. 착한 일만 할 수 있는 작은 기계지. 이제 똑똑히 알겠구나. 조건반사기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P.183>

이 책이 참으로 못된 날것이라는 이유는, 책 안에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자는 중범죄자이고, 그를 교화하려 했었던 성직자 역시도 썩어있다. 그를 가둔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사회를 향해 '펜'을 들었던 알렉산더는 또 하나의 알렉스일 뿐이다. 그의 아내는 알렉스에게 강간당하고 죽었다. 알렉산더는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알렉스를 죽이려 했다. 그는 또 하나의 '사회의 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참 거지 같은 소설이다.

 

강요된 선이라는 아주 직관적이지만 낯선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이 책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날것의 느낌이 나는 책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나쁜 책이다.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 화자 알렉스를 이해하라고 말하는 책이, 공동의 선을 위해서 알렉스를 교화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을 못되게 그리는 이 책이 날것의 느낌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할 일이다. 강요된 선과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한 사람. 둘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세상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렌지는 씨앗을 심으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 또한 아니다. '자연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오렌지 씨앗은 애초에 틔워지지 않을 수도 있고, 썩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컨트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알렉스는 교화가 될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처음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는 삭제되었던 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여러분, 여러분은 갈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길이야. 내일도 향기로운 꽃이 피겠고, 더러운 세상이 돌아가겠고, 별과 달이 저 하늘에 떠있을 거고. 여러분의 오랜 동무 알렉스는 홀로 짝을 찾고 있을 거야. 엄청 구리고 더러운 세상이야. 여러분, 자 이제 여러분의 동무로부터 작별 인사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게는 커다란 야유를, 엿이나 먹으라 그래. 그러나 여러분들은 가끔씩 과거의 알렉스를 기억하라고. 아멘, 염병할.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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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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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양말을 신고, 팬티와 바지를 입고 나서 넥타이를 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15-16>

근 일 년 만에 다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웃 블로거 벨레누스님의 글을 읽다가 예전에 필사하던 아니 에르노의 책이 생각났다. 한때 정말 빠져서 읽었었기 때문에 어떤 구절은 뇌에 새겨져있는 책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외관은 나의 사랑 이야기와 너무 다르지만, 그 본질이 너무 같았기 때문에 더 특별했었다.

글 쓰는 사람은 나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온전히 벗어서 독자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는 외관만을 보고 글에 대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독자는 그 외관이 아름다워 매료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왜 그 작가가 나체로 글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정도로 친근한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글은 내 손을 떠났을 때 이미 독자적인 운명을 시작했다'라는 작가들의 이야기처럼 아마 아니 에르노의 그 어떤 작품보다 호불호가 갈렸을 이 책을 아주 오랜만에 뽑아들었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시작>

책의 주제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A와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출판 시기와 비슷한 현대이고 아마도 '나'는 정말 아니 에르노 본인이라 믿고 시작할 수 있도록 모든 배경이 제시된다. 그녀는 A의 가정을 깰 마음이 없다.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A는 본인의 가정을 깰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미 끝이 준비되어있는 '오갈 곳 없는 열정'만이 남은 소모성 사랑 이야기이다.

그녀의 외도는 특별하다. 그녀는 A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이별을 준비하는 방법에 있어서 소설 속의 그녀는 가장 작가다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에게 향했던 그 열정들을, 이제는 더 이상 뜨겁더라도 향할 곳이 사라진 그 단순한 열정을 책에 가두는 것이다. 어떤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을 때 '마음에 묻는다'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하는데, 그녀는 '글에 묻어둔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P.24>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큰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출간 연도는 내 동생의 출생연도와 같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파문이 일었을지, 어떤 논란으로 그녀가 고통을 받았을지를 그때 그 시간 속에서 같이 느껴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애초에, 아니 에르노는 그녀는 본인이 경험해 본 일들만을 소설로 남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이고, '자전적 허구'라는 말도 안 되는 장르로 분류되는 그녀의 책은 변태성이 있다. 책이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은, 그녀는 구구절절한 아픔을 표현하지 않는다. 울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도 내지 않는다. '왜 나는 안 아픈데 너는 울고 있냐'라는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풀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단순한 열정>은 그저 불륜 소설이 아닌 그녀의 사생활을 은밀하게 들여다보는(아니 사실은 노출증에 가깝도록 관찰자로서 들어가 볼 수 있는) '소설'이었기에 더 문제가 컸던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마지막>

묘한 매력이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사실 아무리 사실적으로 현실에 있음 직한 일로 글을 풀어낸다고 해도 대부분의 책에서는 '그래서, 이게 진짜야? 세상에.'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책은 일단 먼저 '이 소설은 정말 있었던 일이다.'라고 전제를 깔고 읽어보게 되기 때문에 더 밀착되어있고, 더 도덕적 잣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더 심하고 더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한 사람들도,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열정의 A는 누구일까>가 소설의 줄거리 속 질문이 아닌 실제 그녀의 주변에서 찾아보고 싶어지는 욕망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같으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성기의 결합 장면이나 남자의 정액을, 수 세기가 흐르고 여러 세대가 지난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에서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유보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시작>

그녀는 그 짧은 70페이지 속에서도 망설임을 들어낸다. 처음 포르노를 보았던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일은 마음속에서 잊혀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다. A와의 관계 역시도 그렇게, 잊히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글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도 그녀는 소설의 퇴고에 대한 고심과, 이 소설에는 나와 A가 아닌 그 상황의 감정을 담았을 뿐이라는 말로서 애써 정리한다. 그 마음 씀씀이가 이 소설을 더욱 리얼하게 만들어 낸다.

예전에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다가 기계적으로 읽고 끝났던 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다.

당신은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내 정신에 관심이 없으며, 당신은 내 마음에 관심이 없다. 내가 준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리하여 이 마음이 다시 내게로 되돌려질 때마다 나로부터 남는 것은 마음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마음은 계속해서 내게 남아있는 것이며, 이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잊히지 않는 '마음이다. 스스로에 의해 채워진 썰물의 잊히지 않는 마음.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

아니 에르노는 본인에게 남겨진 A에 대한 마음들을. 이제는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 가버린 A를 생각하면서, 본인의 마음에 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마음을 글에 담았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것이 너무 고맙지만, 만약 이 책이 정말 100%의 현실이고, 하나의 안정장치도 없이 꾸밈없는 글이었다면 일기장에나 남아있어야 했을 것이다. 출판이 되었다는 시점에서. 가공이 되었다는 그 시점부터 나는 더 이상의 현실에 대한 의문 없이 <단순한 열정>을 한 여자의 갈 곳 없어진 사랑을 감금한 소설로 읽기로 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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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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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만큼이나 독서 편력도 심한 나는 부끄럽지만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는 타입은 아니다. 고작 초딩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해리포터>가 아마 가장 긴 독서력일 것이다. 하지만 제법 가볍기도 하고, 그래서 더 무거운 한병철의 책은 한 번씩 잊을 만 할 때마다 꺼내어 보게 되는 것이 있다. 소설책도 가십거리도 아닌데 쉽게 꺼내볼 수 있는 철학서라니. 그 정도로 어쩌면 내용은 단순하고 명쾌한 내용일 수 있으나 왠지 모르게 중독되는 무언가가 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문학적인 어떤 것이 내재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전공한 것은 금속공학이라니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금속공학과 철학 사이엔 무엇이 있었을까? 기회가 된다면 한번 파헤쳐 봐야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저 독자로서 저자의 생각에 표류하고 싶다.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한다.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한다. 충실함은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충실함의 형이상학이, 나아가 초월성이 있다. (...)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 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이런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있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마지막>

이번 책의 키워드는 <매끄러움>이다. 이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에 녹아있는 위험성이란.

매끄러운 것 역시 투명성과 비슷한 속성을 같는다. 모난 곳이 없고 끝이 없이 유려하다. 같은 것을 반복하고 쭉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그곳에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근데, 내가 이거 제대로 이해한 게 맞겠지??)

기가막힌 생각이다. 최근 읽은 미학에 관한 책들 중에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고 있다.

현대사회는 알게 모르게 동일성을 추구한다.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나름 모났다 하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정도로만 모가 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이미 바틀비 이전에 끝난 듯 하다.​

한병철의 책은 <투명사회>,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 <피로사회> 정도는 내용을 복기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드를 잡아가며 읽었다. 사실 그 외의 책들은 읽긴 했으나 기억나지 않거나 음, 역시 철학자는 알수없는 사람이군 하고 넘겼었던 것 같다. 아무튼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책들을 '문학적'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는데 작가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들리는 말의 위험함을 잡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투명성에는 향기가 없다.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직접적인 반응과 욕구의 해소 역시 외설적이다. 프루스트에게 "즉각적 향락"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무언가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회상을 통해 나타난다.<투명사회/P.69>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을증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피로사회/P.22>

<투명함>,<긍정성>,<유대감> 등 충분히 긍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많은 단어들. 저자는 그 속에서 다른 의미를 잡아낸다.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고 그 깊이가 없다는 것을. 긍정적인 것은 되려 폭력이 되어 나를 다그치고 있음을. 그리고 유대감 속에 빠져 죽은 나에 대해서. 제일 먼저 접했었던 것은 <투명사회>였는데, 한동안 친구들에게 저자의 시선을 엄청 많이 써먹었었다.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는 투명의 그늘에 대해서 말이다.

​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글쓴이는 기존의 책과 일괄되어 있는 생각으로 현대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에로스의 종말>을 고했듯, 미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부분이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한다. 모든 것을 좋아하고 부정하지 않는 긍정사회는 아름다움 마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매끄러움>은 곧 <좋아요>이며, <보편적인 무언가>이고 <모두가 인정한 편리함>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체주의적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P.411>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P.415>


책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려본다. 사실은 <키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평준화 된 인간을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투명사회>를 이번에는 언뜻 보기에는 아름다워보이는 <매끄러움>으로 지적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있는 아름다움은 한없이 다듬어진 무엇인가이다. 물론 그건은 아름답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사회화된 사람들의 개성없는 판단일지도 모를 일이다. 매끄러움의 세계에는 질문을 던지는 자가 없다.

이상적인 소비자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이 개성없음이 무차별한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 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 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P.75>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할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개인 간의 기준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유난히도 아름다움의 기준이 맞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파리의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의 카피 옷을 구할 수 있고 음악은 어디에나 흐르고 있으며 핸드폰 안에서는 계속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들을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키치'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독서력이 조금씩 늘면서 편견이 생긴다는 것을 최근 느껴가고 있는데,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으면서 필연적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났다. 키치에 갖힌 사람들. 그게 싫어서 탈출했던 사바나는 다시 또 키치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키치의 왕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키치는 자꾸 생겨난다. 새로운 매끄러움 역시 자꾸 생겨난다. 하지만 그 키치의 왕국의 왕을 사랑하게 된 사바나처럼 나도 매끄러움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없다. 그것에는 어떤 포르노그래피적 성질이 있다. 미는 병이다. "건강의 창궐은 그 자체로 언제나 병이기도 하다. 이 병의 해독제는 자신을 읫기하는 병이며 삶 자체의 제한이다. 그런 치유력을 지닌 병이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삶을 저지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쇠멸을 저지한다. 삶만을 추구하느라 병을 부정하면, 그렇게 실체화된 삶은 다른 계기로부터 맹목적으로 분리되어 바로 이 계기로 파괴적이고 악한 것, 뻔뻔스럽고 우쭐대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한다. 오로지 죽은 것만이 왜곡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의 비유다."<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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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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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책을 읽다 보면 철학서를 이렇게 쉽게 풀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평이한 문체로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혹은 번역자가 능력자일지도.

<피로사회>에서 현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몰아붙여 피로해지고 있다는 역설을 하던 책을 읽고 일 년 만에 그 책의 근간이 되었다는 책 <시간의 향기>를 읽어보게 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저자의 머릿속 알고리즘에서 나온 쌍둥이이지만 <피로사회>와는 다르다. 깊은 심심함과 성과주의로 마침표를 찍은 <피로사회>와는 또 다른 현대의 불치병. <향기가 없는 시간>에 대해서 한병철은 말한다.

깊은 권태의 원인은 행위의 결단에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인 삶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P.135>

산업혁명 이전의 근대사에서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에 우월하는 사회였다. 모든 행동은 기도 이후 시작되는 삶. 그러나 바퀴로 힘차게 시간을 쪼개어 나가는 전철의 발명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시간을 쪼개어 나아가는 '근면한''산업'시대에는 사색적 삶은 '시간이 없어서' 뒷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사색적 삶과 활동적 삶은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것일까?

현대의 삶은 빠른 시간의 흐름을 잡아가며 발전하는 듯하다. 모든 일들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동기화'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세상. 현대사회는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은 '흐르고 있는'것이 맞는가?

세계가 온통 여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저기는 제거되고 만다. 여기의 가까움은 먼 곳의 아우라를 소멸시킨다. 여기와 저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을,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을 분리하는 문턱이 사라진다. (...) 인간은 더 이상 문턱의 동물이 아니다. 문턱은 물론 괴로움과 정념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인데 말이다.<P.70>

나는 제라늄을 키운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 물을 주고, 식사를 하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시간 동안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는 책을 한 권 골라 기계적으로 읽는다. 가끔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다시 책장에 꽂고, 다른 책을 기계적으로 읽는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중 또 한 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한다.

나는 오늘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 동료들, 가족들, 거래처 사람들 그리고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길가의 누렁이도 본다. 아마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각자 나름의 내 역할을 정해놓고 동료로서, 친구로서 혹은 악의를 품고 다다닥을 만났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이처럼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흐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의 시간은 해가 뜨면 시작하고 농촌에서의 하루는 물고기가 잠든 밤에 시작되는 것처럼 각자의 삶에서 흐르는 시간을 나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세상은 이미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계'를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루를 초 단위로 끊어 살기 원한다. 오늘 아침, 눈을 뜨고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시간은 변화이고 과정이며 전개인 것이다. 현재 속에는 어떤 실체도 담겨있지 않다. 현재는 오직 이행의 지점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되어간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동일 자의 반복이 사라지고 사건이 이를 대신한다. 운동과 변화는 무질서를 낳기보다는 다른 질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 시간의 의미는 미래에서 나온다. 이처럼 미래가 지향점이 됨에 따라 시간은 앞을 향해 빨려가게 되고, 이는 가속화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P.37/향기 없는 시간>

우리는 눈을 뜬다. 노동의 현장을 향해 가기 위해서 완전 무장을 한다. '활동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긍정 사회'를 향해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저자의 말처럼 투명하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데이터들에 의해서 제약되는 삶이다. 시간은 더 이상 향기가 없다. 시간은 단순히 '지금'일 뿐이고, '더 빠른 미래'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여가시간 조차 '힐링'이라는 단어로 평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은 사색을 위한 시간들 보단 생산을 위한 시간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사막 같은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순례자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무형의 것에 형태를, 에피소드적인 것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파편적인 것에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낸다. 근대의 순례자는 계획을 향한 삶을 실천한다. 그의 세계는 "​일정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 <P.57>

근대는 탈소여와 자유의 시대다. (종교인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보다 근사한 무언가를. 신이 장악하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있다. 근대는 신이라는 이름의 던지는 자에 의해 초래된 피투성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신학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전진하지 않는다. 정신적 저항은 이미 거대한 증기열차에 의해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현대는 어떠한가?


나는 아직도 나를 찾지 못 했다. 문학책들 중에서도 특히나 <모래의 여자>. <고도를 기다리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끌리는 이유는 나 역시 아직도 나를 찾지 못했고, 아마 찾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에는 이런 생각들보다는 출근을 위해서 휴식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닌 시대.


"나였던 그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프루스트의 시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해체될 위기에 처한 자아의 동일성을 다시 안정시키려는 시도이다. 시간의 위기는 동일성의 위기로 경험된다. <P.76>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속화된 사회에서 권태 해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므로.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한병철의 책을 완독하려고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진행하고 있지만 옮긴이가 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자의 어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피로사회>나 <투명사회>가 사회의 단면을 철학적인 단어들로 나열한 책 들이었다면, <시간의 향기>는 강한 어조로 현대사회의 사라진 향기에 대해 비판하고, 한나아렌트의 저서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나름 보완하고자 하는 느낌이다. 책의 주제처럼 '사색하는 삶'을 책안에 담아낸 것이다. 머무름의 기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모든 책들을 다 읽고 나면 한 번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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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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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는 나의 인생을 내가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회의론자의 발언이 되기 쉽지만, 곱씹어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한동안 책리뷰를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말이 조심스러워지는 시점이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리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책을 만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책들이 있다. '무의미함', '불가능함', '무기력함'.... 그 외에도 많은 단어들이 생각만 해도 축 처지는 부정적인 단어들로 치부된다. 그런데, 그런 부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

- '휴머니즘' :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표방하기 위해 자주 쓰는 단어 휴머니즘. 단어를 부정/긍정으로 나눈다면 보통 휴머니즘이 가진 어감은 긍정적에 가깝다. 이 시대의 휴머니스트들. 그런데,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존그레이는 인간을 호모라피엔스라 했다. 약탈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어디로부터(보통은 자연으로부터 혹은 잔인하게도 본인이 속한 인간으로부터까지도)뺏어오는 것 부터 시작된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곳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근처를 채워가는 것이다. '인간적이다'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단어가 아닐 수 도있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처럼 휴머니즘 역시 단순히 인간성을 믿는 하나의 종교로서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인간성'은 정말 '긍정적인' 단어인 것인가? 존 그레이는 묻는다.


'의식'은 만물의 체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장 의식적인 순간에 인식하는 것이 궁극의 실재라고 생각했다. 또 지식은 의식적 지각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 이래 자명한 진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인식과 지각은 의식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각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각과 인식은 동식물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P.86>

 

'나'는 순간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 '나'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우리에게서 없앨 수 없다. 현재에 대한 정상적 인식에서 자아관념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자아관념은 태고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오류며, 그 자아의 힘으로 우리는 꿈속에서처럼 삶을 살아간다.<P.109>

"도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편의품이다."

'나라면 다르게 행동 할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짜 바닥에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영웅들이 없는 세계'에서 숨을 거둘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다.<P.134>


- '과학의 진보' : 인간은 정말 과학을, 테크놀로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전기를 사용하고, 이렇게 아날로그를 벗어나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점. 과학의 진보는 정말 인간이 '인간적으로'사는데 필요한 진보일까? 과학의 발전은 증명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편안함은 어떻게 증명해 보인다는 것인가?

과학은 우리에게 윤리와 정치가 주지 못하는 것, 즉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과학만이 이단자를 침묵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제도다. 과거에 교회가 그랬듯, 과학은 주류를 따르지 않는 독립적 사상가들을 파괴하거나 주변부로 몰아낼 힘을 가지고 있다.<P.37>

세계는 인간이 기껏해야 일부분밖에 이해할 수 없는 반 혼돈의 상태다. 과학은 세계에서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최신 물리학은 사물과 세계가 본질적으로 인과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몸소 겪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들마저도 실상은 착각일 수 있다.(...)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면에서 인류가 다른 모든 동물과는 다르다는 속임수를 지탱하기 위해 사용돼왔다. 하지만 사실 과학의 최고 가치는 인류가 그들에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인식하는 세계는 가공의 환상임을 드러내주는 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P.43>

-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 책을 읽다보면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어차피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극히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 움직일 뿐이며, 삶의 목표가 필요한 동물이 아닐지도모른다. 심지어 인간은 언젠가(혹은 가까운 시기에)멸종될 것이며, 인간만이 언어와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유독 인간은 타종을, 그리고 자신의 종족을 파괴하기 즐기는 것일까? 하지만 존 그레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결정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허무하다'는 것이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라는 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호모라피엔스는 많은 생물 중 하나일 뿐이고, 딱히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머지않아 인간종은 멸종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 인간 종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후,인간이 파괴하려고 했던 다른 많은종들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들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잊을 것이다. 삶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P.196>

- '목적없이 산다는 것'은 정말 한량을, 실패한 인생을 뜻하는 것일까? 존그레이는 말한다. '호모루덴스'. 향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도 노동도아닌 오락이 될 것이라고. 실제로 1차산업에서 쭉 진화하여 현재 경제학자들은 5차산업을 규정짓고 있지않은가? 꼭 '왜'살아야하는지가 중요한 삶이 되었는지, 인생의 목적이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 묻는다. 혹시,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건가.

나는 책을 왜 읽는 것일까. 어딘가에 읽었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말도안된다. 단순히 책이 재밌어서? 그렇다고하기엔 너무 지루한 책들도 많이 읽어왔다. 가만히 앉아 생각해보면 그저 목적없이 책이 눈앞에 있어서 제목에 홀려 읽는 일이 허다하다. 그럼 그것은 나쁜 일일까? 그렇지않다.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피착취자로서의 자신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목적을(보통은, 자본을 조금이나마 더 움켜쥐고하는 목적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격려하고 목표점을 향해 올라간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말을 이제는 비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에 책을 읽다가 2장에서는 덮어버릴뻔했다. 칸트를 이렇게까지 씹어댈 수도있구나, 인간은 정말 자유의지가 없을까? 그렇다면 존 그레이 당신은 대체 왜 이런 사유를 하고 이런 책을 써나가게 된건가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책은 읽을 가치가있고, 다른말을 할 뿐 틀린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삶의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삶의 목적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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