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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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양말을 신고, 팬티와 바지를 입고 나서 넥타이를 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15-16>

근 일 년 만에 다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웃 블로거 벨레누스님의 글을 읽다가 예전에 필사하던 아니 에르노의 책이 생각났다. 한때 정말 빠져서 읽었었기 때문에 어떤 구절은 뇌에 새겨져있는 책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외관은 나의 사랑 이야기와 너무 다르지만, 그 본질이 너무 같았기 때문에 더 특별했었다.

글 쓰는 사람은 나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온전히 벗어서 독자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는 외관만을 보고 글에 대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독자는 그 외관이 아름다워 매료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왜 그 작가가 나체로 글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정도로 친근한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글은 내 손을 떠났을 때 이미 독자적인 운명을 시작했다'라는 작가들의 이야기처럼 아마 아니 에르노의 그 어떤 작품보다 호불호가 갈렸을 이 책을 아주 오랜만에 뽑아들었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시작>

책의 주제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A와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출판 시기와 비슷한 현대이고 아마도 '나'는 정말 아니 에르노 본인이라 믿고 시작할 수 있도록 모든 배경이 제시된다. 그녀는 A의 가정을 깰 마음이 없다.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A는 본인의 가정을 깰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미 끝이 준비되어있는 '오갈 곳 없는 열정'만이 남은 소모성 사랑 이야기이다.

그녀의 외도는 특별하다. 그녀는 A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이별을 준비하는 방법에 있어서 소설 속의 그녀는 가장 작가다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에게 향했던 그 열정들을, 이제는 더 이상 뜨겁더라도 향할 곳이 사라진 그 단순한 열정을 책에 가두는 것이다. 어떤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을 때 '마음에 묻는다'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하는데, 그녀는 '글에 묻어둔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P.24>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큰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출간 연도는 내 동생의 출생연도와 같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파문이 일었을지, 어떤 논란으로 그녀가 고통을 받았을지를 그때 그 시간 속에서 같이 느껴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애초에, 아니 에르노는 그녀는 본인이 경험해 본 일들만을 소설로 남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이고, '자전적 허구'라는 말도 안 되는 장르로 분류되는 그녀의 책은 변태성이 있다. 책이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은, 그녀는 구구절절한 아픔을 표현하지 않는다. 울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도 내지 않는다. '왜 나는 안 아픈데 너는 울고 있냐'라는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풀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단순한 열정>은 그저 불륜 소설이 아닌 그녀의 사생활을 은밀하게 들여다보는(아니 사실은 노출증에 가깝도록 관찰자로서 들어가 볼 수 있는) '소설'이었기에 더 문제가 컸던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마지막>

묘한 매력이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사실 아무리 사실적으로 현실에 있음 직한 일로 글을 풀어낸다고 해도 대부분의 책에서는 '그래서, 이게 진짜야? 세상에.'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책은 일단 먼저 '이 소설은 정말 있었던 일이다.'라고 전제를 깔고 읽어보게 되기 때문에 더 밀착되어있고, 더 도덕적 잣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더 심하고 더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한 사람들도,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열정의 A는 누구일까>가 소설의 줄거리 속 질문이 아닌 실제 그녀의 주변에서 찾아보고 싶어지는 욕망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같으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성기의 결합 장면이나 남자의 정액을, 수 세기가 흐르고 여러 세대가 지난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에서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유보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시작>

그녀는 그 짧은 70페이지 속에서도 망설임을 들어낸다. 처음 포르노를 보았던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일은 마음속에서 잊혀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다. A와의 관계 역시도 그렇게, 잊히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글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도 그녀는 소설의 퇴고에 대한 고심과, 이 소설에는 나와 A가 아닌 그 상황의 감정을 담았을 뿐이라는 말로서 애써 정리한다. 그 마음 씀씀이가 이 소설을 더욱 리얼하게 만들어 낸다.

예전에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다가 기계적으로 읽고 끝났던 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다.

당신은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내 정신에 관심이 없으며, 당신은 내 마음에 관심이 없다. 내가 준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리하여 이 마음이 다시 내게로 되돌려질 때마다 나로부터 남는 것은 마음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마음은 계속해서 내게 남아있는 것이며, 이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잊히지 않는 '마음이다. 스스로에 의해 채워진 썰물의 잊히지 않는 마음.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

아니 에르노는 본인에게 남겨진 A에 대한 마음들을. 이제는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 가버린 A를 생각하면서, 본인의 마음에 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마음을 글에 담았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것이 너무 고맙지만, 만약 이 책이 정말 100%의 현실이고, 하나의 안정장치도 없이 꾸밈없는 글이었다면 일기장에나 남아있어야 했을 것이다. 출판이 되었다는 시점에서. 가공이 되었다는 그 시점부터 나는 더 이상의 현실에 대한 의문 없이 <단순한 열정>을 한 여자의 갈 곳 없어진 사랑을 감금한 소설로 읽기로 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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