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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한병철의 책을 읽다 보면 철학서를 이렇게 쉽게 풀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평이한 문체로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혹은 번역자가 능력자일지도.
<피로사회>에서 현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몰아붙여 피로해지고 있다는 역설을 하던 책을 읽고 일 년 만에 그
책의 근간이 되었다는 책 <시간의 향기>를 읽어보게 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저자의 머릿속 알고리즘에서 나온 쌍둥이이지만
<피로사회>와는 다르다. 깊은 심심함과 성과주의로 마침표를 찍은 <피로사회>와는 또 다른 현대의 불치병. <향기가
없는 시간>에 대해서 한병철은 말한다.
깊은 권태의 원인은 행위의 결단에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인 삶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P.135>
산업혁명 이전의 근대사에서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에 우월하는 사회였다. 모든 행동은 기도 이후 시작되는 삶. 그러나 바퀴로 힘차게
시간을 쪼개어 나가는 전철의 발명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시간을 쪼개어 나아가는 '근면한''산업'시대에는 사색적 삶은 '시간이 없어서' 뒷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사색적 삶과 활동적 삶은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것일까?
현대의 삶은 빠른 시간의 흐름을 잡아가며 발전하는 듯하다. 모든 일들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동기화'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세상. 현대사회는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은 '흐르고
있는'것이 맞는가?
세계가 온통 여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저기는 제거되고 만다. 여기의 가까움은 먼
곳의 아우라를 소멸시킨다. 여기와 저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을,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을 분리하는 문턱이
사라진다. (...) 인간은 더 이상 문턱의 동물이 아니다. 문턱은 물론 괴로움과 정념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인데 말이다.<P.70>
나는 제라늄을 키운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 물을 주고, 식사를
하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시간 동안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는 책을 한 권 골라 기계적으로 읽는다. 가끔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다시
책장에 꽂고, 다른 책을 기계적으로 읽는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중 또 한 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한다.
나는 오늘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 동료들, 가족들, 거래처 사람들 그리고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길가의 누렁이도 본다. 아마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각자 나름의 내 역할을 정해놓고 동료로서, 친구로서 혹은 악의를 품고 다다닥을 만났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이처럼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흐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의 시간은 해가 뜨면 시작하고
농촌에서의 하루는 물고기가 잠든 밤에 시작되는 것처럼 각자의 삶에서 흐르는 시간을 나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세상은 이미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계'를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루를 초 단위로 끊어 살기
원한다. 오늘 아침, 눈을 뜨고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시간은 변화이고 과정이며 전개인 것이다. 현재 속에는 어떤 실체도 담겨있지
않다. 현재는 오직 이행의 지점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되어간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동일
자의 반복이 사라지고 사건이 이를 대신한다. 운동과 변화는 무질서를
낳기보다는 다른 질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 시간의 의미는 미래에서 나온다. 이처럼 미래가 지향점이 됨에 따라
시간은 앞을 향해 빨려가게 되고, 이는 가속화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P.37/향기 없는 시간>
우리는 눈을 뜬다. 노동의 현장을 향해 가기 위해서 완전 무장을 한다. '활동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긍정 사회'를
향해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저자의 말처럼 투명하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데이터들에 의해서 제약되는 삶이다. 시간은 더 이상
향기가 없다. 시간은 단순히 '지금'일 뿐이고, '더 빠른 미래'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여가시간 조차 '힐링'이라는 단어로 평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은 사색을 위한 시간들
보단 생산을 위한 시간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사막 같은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순례자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무형의 것에 형태를, 에피소드적인 것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파편적인 것에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낸다. 근대의 순례자는 계획을 향한 삶을 실천한다. 그의 세계는 "일정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 <P.57>
근대는 탈소여와 자유의 시대다. (종교인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보다 근사한 무언가를. 신이 장악하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있다. 근대는 신이라는 이름의 던지는 자에 의해 초래된 피투성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신학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전진하지 않는다. 정신적 저항은 이미 거대한 증기열차에 의해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현대는 어떠한가?
나는 아직도 나를 찾지 못 했다. 문학책들 중에서도 특히나 <모래의 여자>. <고도를 기다리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끌리는 이유는 나 역시 아직도 나를 찾지 못했고, 아마 찾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에는 이런
생각들보다는 출근을 위해서 휴식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닌 시대.
"나였던 그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프루스트의 시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해체될 위기에 처한 자아의 동일성을 다시 안정시키려는 시도이다. 시간의
위기는 동일성의 위기로 경험된다. <P.76>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속화된 사회에서 권태 해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므로.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한병철의 책을 완독하려고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진행하고 있지만 옮긴이가 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자의
어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피로사회>나 <투명사회>가 사회의 단면을 철학적인 단어들로 나열한
책 들이었다면, <시간의 향기>는 강한 어조로 현대사회의 사라진 향기에 대해 비판하고, 한나아렌트의 저서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나름
보완하고자 하는 느낌이다. 책의 주제처럼 '사색하는 삶'을 책안에 담아낸 것이다. 머무름의 기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모든 책들을 다
읽고 나면 한 번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