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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는 나의 인생을 내가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회의론자의 발언이 되기 쉽지만, 곱씹어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한동안 책리뷰를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말이 조심스러워지는 시점이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리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책을 만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책들이 있다. '무의미함', '불가능함', '무기력함'.... 그 외에도 많은 단어들이 생각만 해도 축
처지는 부정적인 단어들로 치부된다. 그런데, 그런 부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
- '휴머니즘' :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표방하기 위해 자주 쓰는 단어 휴머니즘. 단어를 부정/긍정으로
나눈다면 보통 휴머니즘이 가진 어감은 긍정적에 가깝다. 이 시대의 휴머니스트들. 그런데,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존그레이는 인간을 호모라피엔스라 했다. 약탈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어디로부터(보통은 자연으로부터 혹은 잔인하게도 본인이
속한 인간으로부터까지도)뺏어오는 것 부터 시작된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곳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근처를 채워가는
것이다. '인간적이다'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단어가 아닐 수 도있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처럼 휴머니즘 역시 단순히 인간성을 믿는 하나의 종교로서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인간성'은 정말
'긍정적인' 단어인 것인가? 존 그레이는 묻는다.
'의식'은 만물의 체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장 의식적인 순간에 인식하는 것이 궁극의 실재라고 생각했다. 또 지식은 의식적 지각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 이래 자명한 진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인식과 지각은 의식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각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각과 인식은 동식물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P.86>
'나'는 순간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 '나'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우리에게서 없앨 수 없다. 현재에 대한 정상적 인식에서 자아관념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자아관념은 태고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오류며, 그 자아의 힘으로 우리는 꿈속에서처럼 삶을
살아간다.<P.109>
"도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편의품이다."
'나라면 다르게 행동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짜 바닥에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영웅들이 없는
세계'에서 숨을 거둘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다.<P.134>
- '과학의 진보' : 인간은 정말 과학을, 테크놀로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전기를 사용하고, 이렇게 아날로그를 벗어나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점. 과학의 진보는 정말 인간이
'인간적으로'사는데 필요한 진보일까? 과학의 발전은 증명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편안함은 어떻게 증명해 보인다는 것인가?
과학은 우리에게 윤리와 정치가 주지 못하는 것, 즉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과학만이 이단자를 침묵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제도다.
과거에 교회가 그랬듯, 과학은 주류를 따르지 않는 독립적 사상가들을 파괴하거나 주변부로 몰아낼 힘을 가지고
있다.<P.37>
세계는 인간이 기껏해야 일부분밖에 이해할 수 없는 반 혼돈의 상태다.
과학은 세계에서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최신 물리학은 사물과 세계가 본질적으로 인과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몸소 겪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들마저도 실상은 착각일 수 있다.(...)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면에서
인류가 다른 모든 동물과는 다르다는 속임수를 지탱하기 위해 사용돼왔다. 하지만 사실 과학의 최고 가치는 인류가 그들에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인식하는 세계는 가공의 환상임을 드러내주는 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P.43>
-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 책을 읽다보면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어차피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극히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 움직일 뿐이며, 삶의 목표가 필요한 동물이 아닐지도모른다. 심지어 인간은 언젠가(혹은
가까운 시기에)멸종될 것이며, 인간만이 언어와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유독 인간은 타종을, 그리고 자신의 종족을
파괴하기 즐기는 것일까? 하지만 존 그레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결정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허무하다'는 것이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라는 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호모라피엔스는 많은 생물 중 하나일 뿐이고, 딱히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머지않아 인간종은
멸종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 인간 종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후,인간이
파괴하려고 했던 다른 많은종들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들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잊을 것이다. 삶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P.196>
- '목적없이 산다는 것'은 정말 한량을, 실패한 인생을 뜻하는 것일까? 존그레이는 말한다. '호모루덴스'.
향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도 노동도아닌 오락이 될 것이라고. 실제로 1차산업에서 쭉 진화하여 현재 경제학자들은 5차산업을 규정짓고
있지않은가? 꼭 '왜'살아야하는지가 중요한 삶이 되었는지, 인생의 목적이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 묻는다. 혹시,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건가.
나는 책을 왜 읽는 것일까. 어딘가에 읽었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말도안된다. 단순히 책이 재밌어서? 그렇다고하기엔 너무 지루한 책들도
많이 읽어왔다. 가만히 앉아 생각해보면 그저 목적없이 책이 눈앞에 있어서 제목에 홀려 읽는 일이 허다하다. 그럼 그것은 나쁜 일일까?
그렇지않다.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피착취자로서의 자신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목적을(보통은, 자본을 조금이나마 더
움켜쥐고하는 목적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격려하고 목표점을 향해 올라간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말을 이제는 비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에 책을 읽다가 2장에서는 덮어버릴뻔했다. 칸트를 이렇게까지 씹어댈 수도있구나, 인간은 정말 자유의지가 없을까? 그렇다면 존
그레이 당신은 대체 왜 이런 사유를 하고 이런 책을 써나가게 된건가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책은 읽을 가치가있고,
다른말을 할 뿐 틀린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삶의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삶의 목적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