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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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 섬 >

 

얼마 전, 달달한 책을 소개해달라는 이야기에 달린 댓글. 김연수의 소설을 추천해준 분께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한국소설은 왠지 한국어인데도 잘 안 읽힌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책은 왠지 모를 가슴 시림 때문에 못 읽겠더라.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얼마나 달달한 이야기인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절절하게 전하는 고백이겠지만, 김연수의 소설 속에서는 눈물이 난다.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100퍼센트의 엄마를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33.3퍼센트의 엄마가 위안이 되는 건 아니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100퍼센트의 엄마여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진 속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33.3퍼센트의 엄마가 100퍼센트의 나를 안고 어떤 나무 앞에 서있다.<P.47>

카밀라 포트만. 그녀는 입양아이다. 여섯 박스로 남겨진 그녀의 어린 시절과, 양모의 죽음 그리고 양부의 재혼. 자신을 사랑해주는 만남과 그 남자가 발견해준 작가의 인생. 모든 것들은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 한국으로 떠밀었다. "카밀라"라는 이름. 그녀는 그 이름이 싫었지만 그녀의 고향 진남에 오게 되면서, 동백꽃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름은 운명이었음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아주 시리고 아프다. 사회에서 여러 사람의 압박, 친아버지의 죽음. 모든 상황은 그녀를 자살로 떠밀었다. 그녀의 나이는 현재를 살고 있는 카밀라보다도 어렸다. 열일곱, 그녀는 그렇게 카밀라를 잃고 죽었다.

 

***제가 읽은 책은 자음과모음이라는 출판사의 구본인데,

절판 되고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책이 나왔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표지의 시점이 재밌습니다. 구판은 왠지 정지은의 시점인것 같은데, 문학동네는 훗날 찾아온 카밀라. 희재가 파도와 대화하는 듯한 장면이네요..^^***

시점은 매번 변한다. 정말 마음에 든다. 특히나 2부에서 정지은, 카밀라의 엄마 시점에서 적어내려가는 그 부분은 너무나 아프다. 주인공은 너이지만, 너에게 보내는 2인칭. 그러나 정작 너는 이 말을 들을 수 없겠지. 카밀라와 정지은은 핏줄이지만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더 시리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보다 어린 엄마를 만난 적이 있어요.

나는 네가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지훈처럼 나도 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P.228>

살면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네 말이 맞더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을 100%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 절반이라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오만인지를 깨닫는다. 소설에서 김연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히 카밀라 포트만이 엄마로서의 이지은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럼에도 그때의 우리는 유령처럼 지금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도서실, 타워트레인, 피터 한트케, 동백나무 등은 그대로니까. <P.201>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다. 날개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사람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너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말 역시 존재하지만 사람의 것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33.3%의 엄마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는 카밀라. 그녀가 위안을 찾을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도 날개는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 <P.275>

소설은 시원스럽게 달려간다. 시점을 뒤바꿔 가면서. 덕분에 2부가 처음 시작할 때 많이 헤맸었다. 2부의 첫 등장은 너이다. 너가 누군지 모른 채 한참을 지나서야 깨닫는다. 화자는 카밀라의 엄마. 이지은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것을 깨닫는 순간 2부는 끝난다. 목차를 처음에 읽어봤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부분이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하는 선의 이야기로.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있고 나빠질 수도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번이고 달라지리라.<P.201>

여러 시점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진행되는 과거. 모든 것은 되풀이되어 자꾸자꾸 진행되지만 진행될 때마다 과거는 자꾸자꾸 변하기만 한다. 마치 파트릭모디아노의 소설 같다. 어쩌면 마지막에 가면 카밀라는 결국 희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이 들 정도로 변한다. 결말을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지?에 맞춰 읽다 보면 그렇다. 하지만, 결국 결말은 희재와 희재의 만남. 지은이 파도의 일처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만남으로 바라본다면 더욱 마음이 아리지 않을까. 책 속에 숨어있는 표현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낮과 밤은 이렇게나 다른데 한 군데 모아 하루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은 이렇게나 다른데 어떻게 그 점을 한 군데 모아서 인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문학동네에서 재판되었던데, 그걸 다시 집어봐야 할 것 같다.

소설의 끝에서 결국 카밀라는 어머니는 찾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호하게 결말이 난다. 그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든다. 사실 끝부분에 가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참 묘한 작가이다. 작가의 말은 보통 읽지 않는데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책에 여백으로 남겨둔 것을 독자가 눈치채기 바란다. 어떤 것을 남겨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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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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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자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이 실제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오로지 겉보기에는 다 아문것으로 보이던 상처가 한밤중에 돌연 다시 쓰라려오는 그 드문 순간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벌떡 일어나 일종의 방심상태로, 그 도진 상처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면서, 갑자기 다시 생생해진 그들의 고통을, 또 그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의 간절한 표정을 한 줄기 섬광속에서 다시 찾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재앙속으로, 즉 습관적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P.241>

신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은 나의 신발 안에도 신은 살고있다. 그래서 좋은 신은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는걸까..^^일단은 여기까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똥철학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생명체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고 죽고 하는데 하물며 신이 단 한 명이지는 않을 것만 같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굽혀지지 않는 신념이기에 다루기가 어렵지만... 신앙은 강요될 수 없으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더구나 중세 시대 흑사병이 판을 치던 북유럽에서는 더욱이 신의 '심판'으로서의 페스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몇 세기가 지난 뒤 알제리의 오랑에서. 다시 시작된 페스트.

이 이야기는 수백의 쥐떼가 죽어나가는 것으로 그리고 곧이어 동률의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현대판 페스트를 다시 겪는 오랑에서 벌어진 삼라만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카뮈가 무섭다. 사실 페스트는 몇 번을 집었다가 또 몇 번을 내려놓았다. 처음 추천받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겠지만, 그 때는 읽을 엄두가 안났고 작년 메르스 사건이 터지고서는 사실 메르스의 본질과 이 책의 본질이 연결되어있지 않겠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내려놓았다. 아마도 독서토론을 이 책으로 진행하게 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여전히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아있겠지.

카뮈의 글은 음산하다. 글의 전반적인 어조가 그렇다. 하지만, 그는 인간애를 감히 말하건데 동시대 작가들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렵다. 자신이 가진 애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망할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 삶에서 포기해 봤거나 혹은 다 이뤄봤거나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독자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 카뮈의 책이어서, 이방인을 읽어서 가지게 된 편견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태양'이라는 관념에 갇혀버린 것 같다. 이방인이라는 책에 갇혀 페스트를 읽었다고 생각되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을 정도이다. 까뮈는 왜 그렇게 태양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내리쬐는 볕을, 만약 까뮈에게 신이 있다면.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끄는 무언가로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그토록 그 태양을 두려워했다. 알제리의 태양을 만나보신 분이 있으신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알제리에 가보고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말 인간적이게도. 그는 어딘가에 비치거나 반사된 태양은 따사롭다 느끼거나, 계시로 삼았다. 아마 내가 다시 까뮈의 책을 집는다면 태양의 존재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그들은 이제 변두리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들은 멈췄다. 리유는 자동차앞에서 타루에게 들어가겠느냐고 물었고 타루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늘의 반사광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리유는 갑자기 정다운 웃음을 터트렸다. <P.174>

그리고 갇혀버린 관념은 하나가 더 있다. 시기상의 선후는 알 수없지만 책 안에서 유일하게 절대 악의 편에 서 있는 인물 코타르. 이 인물의 첫 등장에서부터 나는 이 사람은 이방인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뫼르소의 악행을 돕던 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가 친구라고 불렀던 인물 레몽. 그 사람과 코타르는, 닮아있었다. 그저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겠지만 혹시 이름을 바꿔 이 도시로 흘러들어온 코타르는 역시나 리유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나쁜 친구가 되지 않았을는지. 재밌는 부분이다.

>> 삶에서 가지게 되는 관념들은 한가지가 아님을.

진정한 선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책에서 리유는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던 기자가 결국 탈출하지 않고 도시에 남기로 하자 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도시 안에 감금되었던 한 남자. 최초에는 그곳에 남아있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살면서 마침내는 그 삶에 대한 일종의 책임의식과 약간의 영웅심리로 도시의 일원이, 페스트의 일원이 된 남자에게서 <모래의 여자>에서의 실종된 남자의 냄새가 났다. 왜 나는 그 사람이 '멋있다'라는 생각보다는 보다 쓸모 있다고 생각되는 현실에 안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안쓰러움이 더 드는 걸까. 나도 온전히 그들을 바라보지는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도 한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성직자와 리유의 이야기. 한 소년이 이유 없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갈 때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서이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또 대체로는 그 둘 사이의 구별은 쉽사리 된다. 그러나 악 그 자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서, 명백히 필요한 악이 있고 또 명백히 불필요한 악이 있다. 지옥에 빠진 돈 후안과 어린애의 죽음을 놓고 볼 때 탕아가 벼락을 맞아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애가 고통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어린애의 고통과 그 고통에 따르는 공포,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보다 이 땅 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파늘루의 말) <P. 291>

나는 파늘루의 말 역시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가 겪어야 했을 내적 갈등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동조한다. 만약 내가 신학을 공부했다면 역사상 가장 깊은 아이러니에 당면했을 것이다. 한 아이의 죽음. 그것도 그 누구보다 긴 고통 속의 죽음에서, 신부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속죄해야 할 원죄가 없는 짧은 생에게 맞닿은 아주 고통의 죽음. 어린아이의 죄 없는 죽음 앞에서 신부는 종교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음에 있어서, 선후관계가 없음을 그리고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과관계가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인간의 탄생의 인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그 안의 과정들은 사실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

페스트는 저마다의 이기심을 발동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다 불공평의 감정만 심화한 것이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P.309>

>> 페스트는 어디에나있고,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별로 괴롭지도 않은 기억이라 한 번씩 꺼내보긴 하지만 누구나 한 가지씩 힘든 경험을 하듯 나도 아주 힘든 20대 초반을 보낸 적이 있다.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은 병이 왕성한 몸을 잠식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한가지 했던 생각은 그저 결론이 빨리나기를 바랬던 것뿐이었다. 당시에 썼던 일기장들을 지금은 태워 없애버렸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없애지 말 것을 그랬다. 그때의 나는 사랑도 필요 없었고, 그저 이 순간이 끝이 어딘지 알 수없다면 눈 뜨고 있는 이 시간 동안의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 병원에서 보낸 일 년여의 시간 동안 가장 많이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마치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듯 행동했고 마침내 내 이기심을 이해한 사람들만이 같이 웃어줄 뿐이었다. 부끄럽게도 지금은 아주 건강해서 이런 이야기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그리고 만약에 인간이 행복하면서 동시에 침울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행복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누렇고 뿌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버리는 것이었다. (...)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나는 밤과 낮, 아니다. 그런 모든 것도 그 한나절의 평화를 없애버리기에 충분하지 못 했다. <P.58>

극한의 고통을 마주쳤을 때, 되려 냉정해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있으니 말이다. 페스트를 읽어내려가며 내 삶의 곳곳을 읽는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생각이 났고 나의 죽음에 빗대어보기도 하고. 까뮈는 그래서 더 소름끼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이 책을 이해하기엔 너무 적은 경험을 해 본 사람일 수도 있지만, 페스트 속 오랑의 죽음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가지 이유로 죽어가야 했다는 것만 다를 뿐, 어디에나 있는 죽음과 어디에나 있는 고통이다.

그들은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자칫 냉정함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절망감은 그들을 공포로부터 건져 주었고, 그들의 불행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누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본인은 그것을 깨달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리된 것이었다. 눈앞에 있지도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를 상대로 계속해온 기나긴 마음속 대화로부터 끌려 나오는 즉시 그는 다짜고짜로 가장 무거운 침묵만이 전 부인 흙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그는 앞뒤 돌아볼 시간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P.105>

>> 그래서, 두 번째 선과 괜찮은 악

그 속에서 나는 리뷰의 제목으로도 걸어놓은 '두 번째 선과 괜찮은 악.'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떠나기 보다 마을에 남아 같이 페스트를 헤쳐나가기로 다짐했던 랑베르나, 신을 믿지 않지만 성자가 되고자 했던 성인 타루. 그리고 역시 직업적 소명과 인간의 당위성으로 마을에 남은 리유. 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를 한다면(절대선이라는 것이 유행을 타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 아닌 타인, 나아닌 사회를 위해서 마을에 남았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다른 갈망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채. 그리고 중범죄를 저지르고 마을로 들어온 코타르. 그는 이 순간이 혼란스러운 페스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괴로운 이 상황에서 그는 꽤나 괜찮은 삶을 산 것이다. 두 가지 유형의 삶 속에 잘못은 전혀 없었다. 단지 살아갈 뿐.

매일 11시경이 되면 중심가에는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밀려드는데, 이 행렬에서 사람들은 커다란 불행의 도가니 속에서도 자라나는 삶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지던 그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여기서도 다시 보게 될 판이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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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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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읽어보려던 책은 이 책이 아니었다.

이름만 익숙한 작가 김숨의 책, 카프카님의 리뷰에서 만났던 L의 운동화. 그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실패하고 대신 빌려온 책이었다. '한 명'. 신간이 나왔구나 하며 별생각 없이 집어온 책 때문에, 다른 책을 읽을 생각도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일주일이 지나갔다. 소설의 내용은 위안부로 일본에 끌려갔던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 소녀는 이십만 명 중 돌아온 이만 명. 그중에서도 두 명 남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시간이 흘러 어르신들 중 한 분이 살아남았을 때를 가정하여 책의 배경은 설정되어있다. 자신이 위안부임을 등록하고 모든 것을 증언한 혼자 남은 여성과, 숨어지내는 또 다른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인 화자. 책은 단순하다. 그리고 매끄럽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전혀 자극적인 말 하나 없는 심심한 문체. 그런데도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못하겠다.

옷 수선 가게를 나와 골목을 걸어가던 그녀는 중얼거린다

왜 하필 나인가? <P.54>

양파망에 넣어지는 순간 새끼 고양이는 늙은이의 것이 되었다.

밭메다가, 목화따가가, 물동이 이고 동네 우물가에 물길러 갔다가, 냇가에서 빨래해 오다가 학교에 가다가 집에서 아버지 병간호 하다가 억지로 끌려나온 소녀들이 하하나 옥상이나 오바상이나 오토상이라고 부르던 일본인 업주의 것이 되었듯. <P.77>

사실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숨겨진 진상이 자극적인 것인데, 어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내용만큼은 이게 정말 소설안의 이야기였으면 싶다. 그리고 이런 일을 상상하는 작가는 못됐다며 마무리하고 싶어진다.

아래는 무시로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졌다.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P.88>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위안부 관련된 자료들을 탐독했을 것이다.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에는 거슬릴 만큼의 미주가 달려있다. 대사 하나하나를 고를 때마다 고심했을 작가의 괴로움이 느껴지면서도 이 이야기가 단순한 소설이 아님에 힘겨워지는 숫자들이다. 누군가의 생을 알리는 데에 그리고 기억하는 데에는 고통이 따른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세련된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에 조금 더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하지도 못하면서.

의정부역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 가끔 지나다니다가 한 번씩 눈길을 주는 게 다이다. 그렇게 조각나서 묻히고 있는 삶이 이 책에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어를 외우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소설의 제목이 한 명이 아니라 恨命으로 읽혀 너무 힘들었다.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 몰라도. 한자음이 없고 소설의 설정도 위안부였던 할머니 한 명의 이야기인데도. 전부 읽고 나니 정말 원망으로 가득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여서. 나는 왜 표지를 조금 더 유심히 보지 않았나 괴로워하면서 읽었다.

 

누군가 나를 표현해 보라고 묻는다면 이 책을 읽는 시점에서 헛똑똑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우연한 기회에 손글씨 릴레이를 참여하라는 권유로 참여를 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도 모르면서 지금의 마음보다는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내려갔던 몇 개의 글씨가 부끄러워진다.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중간중간 마음이 심란해서 책을 덮는다. 내가 뭘 안다고.

할 수만 있다면, 10월의 나를 찾아가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을버스는 어느새 사거리 너른 대로로 들어서 있다. 차창너머 세상으로 눈길을 주면서 그녀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여전히 무섭다는걸.

열세 살의 자신이 아직도 만주 막사에 있다는걸.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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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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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자유가 있다?

금지된 욕망이 비뚤어짐을 낳기 전에, 왜 그 욕망이 금지되어야 했는지 혹시 그 금지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소설 속에서 서양 소설이 금지된 이유가 단순히 자유에 대한 억압이었다는 것을. '일괄된 생각'과 '일괄된 목표'를 가지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파생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책 안의 배경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문화대혁명은 '예술은 정치의 도구가 되어야 하고,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혁명적 영웅에 대한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문학들만 허락되고, 서양문학은 철저하게 사장되어 볼드모트가 되어버린 시대이다. 지식층의 자녀들이 시골로 소위 '재교육'을 받으러 가면서 시작되는 나와 뤄 그리고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와 뤄는 형제처럼 지내며 바늘구멍보다 통과하기 어렵다는 '재교육이 끝나는' 시기를 기다린다. 하늘 긴꼬리닭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국 소녀를 만나게 되고, 셋은 우정을 쌓는다.(물론 사랑도..) 마을의 또 다른 재교육을 받던 '시인'의 아들 안경잡이 소녀는 큰 가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방 안에는 서양의 책들이 들어있었다.

사실 배경이나, 이야기들은 평이하다. 한 여자를 마음에 두었던 두 남자가 지붕을 쳐다보게 된 이야기이다. 발자크의 소설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여자가 마을을 떠나면서 마무리되는 이 짧은 이야기에는 시대적 답답함이나 문학에 대한 열망이 가득가득 들어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들었던 단상들은

- 책에서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은 뤄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특징으로 기억된다.

- 발자크의 책 내용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 문학에의 접근을 막고 혁명에 대한 것들을 주입하면, 정말 사람은 교화되는 것일까.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 책을 다시 집었다.

책에는 몇 구절 정도가 한 페이지에 할애되어 쓰여있는데 그중 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Republic of Korea'.

손바닥으로 하늘을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시대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생각보다 많고 넓게 썩어버린 부분이 드러나는데 몇 년이나 걸렸던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아직 알지못한 빙산의 아랫부분엔 무엇이 있는걸까.

아직 청춘의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p.80>

사실 나는 정치에 대해선 문외한에 가깝다. 그저 jtbc의 뉴스를 듣거나 썰전을 보거나, 20대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일들을 할 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사상 초유의 대통령이 연루된 게이트가 터지게 되면서야 보게 되는 것이다. 어설프게 알면서 '어떤 방향으로 가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선동가이다. 자신이 아직 확고한 방향을 정해두지 않았는데, 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방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정치와 밀접한 과를 나왔음에도, 후배들이 묻는 질문 하나에 답변하지 못 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확고한 방향을 정해두지 않은' 기간은 결코 길어선 안된다. 애매모호한 그 시간을 '중립'이라고 표현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혹시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억압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분명 문화계에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제발..), 모 그룹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서 부회장이 퇴출된 것은 아니냐는 소리가 돈다.

우리는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당장 광화문 길거리에서 마음 맞는 사람이 세명 모여서 피켓을 들면 집시법 위반이다. 사전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뉴스 보도를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청년층. 세계는 손에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당장 오늘 아침 뉴욕타임즈를 손에 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찾아보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그 정보의 온도 차이가 현시점에서는 매섭다.

하늘긴꼬리닭 마을에 가끔 들리는 재봉틀 아저씨. 그 사람이 오는 날은 마을에 잔치가 열린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옷을 수선하고, 새로운 옷을 만들고. 각자 가진 능력 안에서 개성을 표출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바느질 소녀는 이 재봉틀 아저씨의 딸이다. 제법 부를 축적한 늙은 재봉사는 나와 뤄의 이야기를. 발자크의 소설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억압하려야 할 수없는 자유의지가 들어있는 것이다.

늙은 재봉사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온종일 재봉틀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소설의 영향임이 분명한,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환상이 마을 사람들의 새 옷에 뱃사람 디자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P.175>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변했다.' 라는 말에는 사실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책에서만 겪어본 일이다. 그러나, 가만 돌이켜보면 우리 집 집 전화는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사라졌다. 더 이상 펜팔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E-book을 읽기 위해 리더기를 사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가랑비에 옷은 분명히 젖는다.

환상을 찾아서. 한 번의 낙태 경험을 안고 여자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바느질 소녀가 갑자기 오늘은 혁명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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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P.174>

요즘처럼 간절하게 불어를 배우고 싶은 시기도 없을 것이다.

그로칼랭 이후로 에밀아자르의, 로맹가리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기 앞의 생>은 교복을 입던 시절 읽었던 책이다.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무엇을 느꼈었는지 캐묻고 싶을 정도로 먹먹해진다. 그때부터 기록해둔 것들을 이사하면서 홀랑 없애버리고 블로그로 이사를 왔었는데, 득도 실도 많아서 요즘 다시 종이로 돌아갈까 싶은 생각도 간절하다. 이건 사족이고..

책 제목이 너무 재밌지 않은가?

<자기 앞의 생>

生은 결코 나와 일치되지 않는다. 나의 뒤에 있거나, 나의 앞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생은 나의 것이지만 나를 보고 있기도 하고 나를 평가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일정하게 정해진 생이라는 긴 선위를 지나가고 있다. 때로 뒤를 돌아보긴 하지만 앞을 보고 그 선의 끝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깊은 감성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지도.

 

책 제목에서부터 이 글은 '앞에 펼쳐진' 생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책의 주인공은 모모이다. 그는 불행하다. 그 소년은 열 살이다. 어머니는 창녀이고, 자신을 한 보모에게 맡긴 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부모를 그리고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너무 정이 들어버린 보모가 슬퍼할까 봐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모모의 삶은 자꾸 앞으로, 앞으로 흘러간다.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P.123>

어느 순간 모모는 자신이 열 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열네 살. 생물학적 나이를 단 하루 만에 네 살이나 뛰어넘은 그는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큰 지혜를 가진 열네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사랑했던 보모의 죽음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내지는 못 했다.

작은 모모는 나름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태생이 주는 불행함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이었고, 그의 앞에서 그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는 간음을 하거나(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엉덩이로 빌어먹는 사람들의 자식이거나), 근친 집안의 경우에는 반드시 매독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이 점은 모모를 힘들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유태인이었던 흑인 로자 아줌마는 그런 생을 모모에게서 떼 내어주기로 결심을 했는지 모모의 나이도 아버지의 존재도 모든 것을 감췄지만 그녀는 모모가 불안했다.

나는 나의 내부에 넘칠 듯 쌓여가고 있던 그 무언가를 쉬페르에게 쏟아부었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주저 않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P.29>

모모가 시장에서 훔쳤던 강아지 쉐페르. 온전하게 사랑을 주던 강아지를 어떤 귀부인에게 팔아버린 그날 받은 돈을 모모는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마음을 아주 간절하게 이해했다. 너무 사랑하기에 보낼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이 아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생은 참 짓궂다.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모모는 어린 나이에 생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살아생전 과거로 돌아가고싶어했다. 창녀였던 시절을 추억하고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가짜 신분으로 살면서도 가장 행복했던 과거로 자꾸 돌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치매에 걸려서는 시시때때로 과거로 돌아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모모는 언젠간 자신의 말로에서 자신은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

에밀아자르의 책에서는 죽음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가 보다. 몇 권 읽어보지 않아 섣부른 보편화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한다. 몇 년 전부터 죽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하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대목이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두렵고 미뤄야 하는 것이지만 그 생명 연장은 때로는 정말 죽고 싶은 사람에게 잔인할 수도 있다. 병원은 더 이상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 나를 고문하는 곳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로자아줌마는 그녀가 원하는 죽음을 얻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카이렘?"

우리끼리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카이렘."

그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 내 머리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P.69>

모모의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재미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더빙을 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녹음실에서 계속 계속 되감기 되는 영화를 바라보며 모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P.133>

성장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자기 앞의 생에는 특별함이 있다. 청소년 드라마처럼 아자 힘내야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 라는 긍정적인 멘트를 전하기보다는 그저 책 속 인물 하나하나 한 명 한 명을 사랑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일을 수백 번 반복하는 것은 영화에서이다. 즉 누군가의 기억에서 반복되는 것이지 현실은 계속 자기 앞에 있는 것이다. 되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가끔 나를 위로할지 모르지만 그곳은 아주 잠깐 머무는 피난처일 뿐이다.
두서없는 독후감이 되어버렸지만, 아마도 그 두서없음 때문에 내 앞에 생에 대해서 그리고 생의 끝에 대해서. 모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생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비극인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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