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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도시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자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이 실제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오로지 겉보기에는 다 아문것으로 보이던 상처가 한밤중에 돌연 다시 쓰라려오는 그 드문 순간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벌떡 일어나 일종의 방심상태로, 그 도진 상처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면서, 갑자기 다시 생생해진 그들의 고통을, 또 그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의 간절한 표정을 한 줄기 섬광속에서 다시 찾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재앙속으로, 즉 습관적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P.241>
신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은 나의 신발 안에도 신은 살고있다. 그래서 좋은 신은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는걸까..^^일단은 여기까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똥철학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생명체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고 죽고 하는데 하물며 신이 단
한 명이지는 않을 것만 같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굽혀지지 않는 신념이기에 다루기가 어렵지만... 신앙은 강요될 수 없으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더구나 중세 시대 흑사병이 판을 치던 북유럽에서는 더욱이 신의 '심판'으로서의 페스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몇 세기가 지난 뒤
알제리의 오랑에서. 다시 시작된 페스트.
이 이야기는 수백의 쥐떼가 죽어나가는 것으로 그리고 곧이어 동률의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현대판 페스트를 다시 겪는 오랑에서
벌어진 삼라만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카뮈가 무섭다. 사실 페스트는 몇 번을 집었다가 또 몇 번을 내려놓았다. 처음 추천받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겠지만, 그 때는 읽을 엄두가 안났고 작년 메르스 사건이 터지고서는 사실 메르스의 본질과 이 책의 본질이 연결되어있지 않겠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내려놓았다. 아마도 독서토론을 이 책으로 진행하게 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여전히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아있겠지.
카뮈의 글은 음산하다. 글의 전반적인 어조가 그렇다. 하지만, 그는 인간애를 감히 말하건데 동시대 작가들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렵다. 자신이 가진 애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망할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 삶에서 포기해 봤거나 혹은 다 이뤄봤거나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독자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 카뮈의 책이어서, 이방인을 읽어서 가지게 된 편견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태양'이라는 관념에 갇혀버린 것 같다. 이방인이라는 책에 갇혀 페스트를 읽었다고 생각되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을 정도이다. 까뮈는 왜 그렇게 태양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내리쬐는 볕을, 만약 까뮈에게 신이 있다면.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끄는 무언가로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그토록 그 태양을 두려워했다. 알제리의 태양을 만나보신 분이 있으신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알제리에 가보고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말 인간적이게도. 그는 어딘가에 비치거나 반사된 태양은 따사롭다 느끼거나, 계시로 삼았다. 아마 내가
다시 까뮈의 책을 집는다면 태양의 존재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그들은 이제 변두리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들은 멈췄다. 리유는 자동차앞에서 타루에게 들어가겠느냐고 물었고 타루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늘의 반사광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리유는 갑자기 정다운 웃음을 터트렸다. <P.174>
그리고 갇혀버린 관념은 하나가 더 있다. 시기상의 선후는 알 수없지만 책 안에서 유일하게 절대 악의 편에 서 있는 인물 코타르. 이
인물의 첫 등장에서부터 나는 이 사람은 이방인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뫼르소의 악행을 돕던 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가 친구라고
불렀던 인물 레몽. 그 사람과 코타르는, 닮아있었다. 그저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겠지만 혹시 이름을 바꿔 이 도시로 흘러들어온 코타르는 역시나
리유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나쁜 친구가 되지 않았을는지. 재밌는 부분이다.
>> 삶에서 가지게 되는 관념들은 한가지가 아님을.
진정한 선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책에서 리유는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던 기자가 결국 탈출하지 않고 도시에 남기로 하자 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도시
안에 감금되었던 한 남자. 최초에는 그곳에 남아있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살면서 마침내는 그 삶에 대한 일종의 책임의식과 약간의
영웅심리로 도시의 일원이, 페스트의 일원이 된 남자에게서 <모래의 여자>에서의 실종된 남자의 냄새가 났다. 왜 나는 그 사람이
'멋있다'라는 생각보다는 보다 쓸모 있다고 생각되는 현실에 안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안쓰러움이 더 드는 걸까. 나도 온전히 그들을 바라보지는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도 한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성직자와 리유의 이야기. 한 소년이
이유 없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갈 때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서이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또 대체로는 그 둘 사이의 구별은 쉽사리 된다. 그러나 악
그 자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서, 명백히 필요한 악이 있고 또 명백히 불필요한 악이 있다. 지옥에
빠진 돈 후안과 어린애의 죽음을 놓고 볼 때 탕아가 벼락을 맞아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애가 고통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어린애의 고통과 그 고통에 따르는 공포,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보다 이 땅 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파늘루의 말) <P. 291>
나는 파늘루의 말 역시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가 겪어야 했을 내적 갈등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동조한다. 만약 내가 신학을 공부했다면
역사상 가장 깊은 아이러니에 당면했을 것이다. 한 아이의 죽음. 그것도 그 누구보다 긴 고통 속의 죽음에서, 신부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속죄해야 할 원죄가 없는 짧은 생에게 맞닿은 아주 고통의 죽음. 어린아이의 죄 없는 죽음 앞에서 신부는 종교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음에 있어서, 선후관계가 없음을 그리고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과관계가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인간의 탄생의 인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그 안의 과정들은 사실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
페스트는 저마다의 이기심을 발동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다 불공평의 감정만
심화한 것이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P.309>
>> 페스트는 어디에나있고,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별로 괴롭지도 않은 기억이라 한 번씩 꺼내보긴 하지만 누구나 한 가지씩 힘든 경험을 하듯 나도 아주 힘든 20대 초반을 보낸 적이
있다.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은 병이 왕성한 몸을 잠식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한가지 했던 생각은 그저 결론이 빨리나기를 바랬던 것뿐이었다. 당시에
썼던 일기장들을 지금은 태워 없애버렸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없애지 말 것을 그랬다. 그때의 나는 사랑도 필요 없었고, 그저 이 순간이 끝이
어딘지 알 수없다면 눈 뜨고 있는 이 시간 동안의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 병원에서 보낸 일 년여의
시간 동안 가장 많이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마치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듯 행동했고 마침내 내 이기심을 이해한 사람들만이 같이 웃어줄
뿐이었다. 부끄럽게도 지금은 아주 건강해서 이런 이야기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그리고 만약에 인간이 행복하면서 동시에 침울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행복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누렇고 뿌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버리는 것이었다. (...)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나는 밤과 낮, 아니다. 그런 모든
것도 그 한나절의 평화를 없애버리기에 충분하지 못 했다. <P.58>
극한의 고통을 마주쳤을 때, 되려 냉정해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있으니 말이다. 페스트를 읽어내려가며 내 삶의
곳곳을 읽는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생각이 났고 나의 죽음에 빗대어보기도 하고. 까뮈는 그래서 더 소름끼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이 책을 이해하기엔 너무 적은 경험을 해 본 사람일 수도 있지만, 페스트 속 오랑의 죽음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가지 이유로 죽어가야 했다는 것만 다를 뿐, 어디에나 있는 죽음과 어디에나 있는 고통이다.
그들은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자칫 냉정함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절망감은 그들을 공포로부터 건져 주었고, 그들의 불행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누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본인은 그것을 깨달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리된 것이었다. 눈앞에 있지도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를 상대로 계속해온 기나긴 마음속 대화로부터 끌려 나오는 즉시 그는 다짜고짜로 가장 무거운 침묵만이 전 부인 흙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그는 앞뒤 돌아볼 시간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P.105>
>> 그래서, 두 번째 선과 괜찮은 악
그 속에서 나는 리뷰의 제목으로도 걸어놓은 '두 번째 선과 괜찮은 악.'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떠나기 보다 마을에
남아 같이 페스트를 헤쳐나가기로 다짐했던 랑베르나, 신을 믿지 않지만 성자가 되고자 했던 성인 타루. 그리고 역시 직업적 소명과 인간의
당위성으로 마을에 남은 리유. 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를 한다면(절대선이라는 것이 유행을 타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 아닌 타인, 나아닌 사회를
위해서 마을에 남았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다른 갈망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채. 그리고 중범죄를 저지르고 마을로 들어온 코타르. 그는 이
순간이 혼란스러운 페스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괴로운 이 상황에서 그는 꽤나 괜찮은 삶을 산 것이다. 두 가지 유형의 삶 속에 잘못은 전혀
없었다. 단지 살아갈 뿐.
매일 11시경이 되면 중심가에는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밀려드는데, 이 행렬에서
사람들은 커다란 불행의 도가니 속에서도 자라나는 삶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지던 그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여기서도 다시 보게 될 판이다.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