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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P.174>
요즘처럼 간절하게 불어를 배우고 싶은 시기도 없을 것이다.
그로칼랭 이후로 에밀아자르의, 로맹가리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기 앞의 생>은 교복을 입던 시절 읽었던
책이다.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무엇을 느꼈었는지 캐묻고 싶을 정도로 먹먹해진다. 그때부터 기록해둔 것들을 이사하면서 홀랑 없애버리고 블로그로
이사를 왔었는데, 득도 실도 많아서 요즘 다시 종이로 돌아갈까 싶은 생각도 간절하다. 이건 사족이고..
책 제목이 너무 재밌지 않은가?
<자기 앞의 생>
生은 결코 나와 일치되지 않는다. 나의 뒤에 있거나, 나의 앞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생은 나의
것이지만 나를 보고 있기도 하고 나를 평가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일정하게 정해진 생이라는 긴 선위를 지나가고
있다. 때로 뒤를 돌아보긴 하지만 앞을 보고 그 선의 끝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깊은 감성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지도.
책 제목에서부터 이 글은 '앞에 펼쳐진' 생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책의 주인공은 모모이다. 그는
불행하다. 그 소년은 열 살이다. 어머니는 창녀이고, 자신을 한 보모에게 맡긴 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부모를 그리고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너무 정이 들어버린 보모가 슬퍼할까 봐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모모의 삶은 자꾸 앞으로, 앞으로 흘러간다.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P.123>
어느 순간 모모는 자신이 열 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열네 살. 생물학적 나이를 단 하루 만에 네 살이나 뛰어넘은 그는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큰 지혜를 가진 열네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사랑했던 보모의 죽음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내지는 못
했다.
작은 모모는 나름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태생이 주는 불행함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이었고, 그의 앞에서 그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는 간음을 하거나(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엉덩이로 빌어먹는 사람들의 자식이거나),
근친 집안의 경우에는 반드시 매독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이 점은 모모를 힘들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유태인이었던 흑인 로자 아줌마는
그런 생을 모모에게서 떼 내어주기로 결심을 했는지 모모의 나이도 아버지의 존재도 모든 것을 감췄지만 그녀는 모모가 불안했다.
나는 나의 내부에 넘칠 듯 쌓여가고 있던 그 무언가를 쉬페르에게 쏟아부었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주저 않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P.29>
모모가 시장에서 훔쳤던 강아지 쉐페르. 온전하게 사랑을 주던 강아지를 어떤 귀부인에게 팔아버린 그날 받은 돈을 모모는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마음을 아주 간절하게 이해했다. 너무 사랑하기에 보낼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이 아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생은 참 짓궂다.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모모는 어린 나이에 생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살아생전 과거로 돌아가고싶어했다.
창녀였던 시절을 추억하고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가짜 신분으로 살면서도 가장 행복했던 과거로 자꾸 돌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치매에
걸려서는 시시때때로 과거로 돌아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모모는 언젠간 자신의 말로에서 자신은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
에밀아자르의 책에서는 죽음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가 보다. 몇 권 읽어보지 않아 섣부른 보편화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한다. 몇 년 전부터 죽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하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대목이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두렵고 미뤄야 하는 것이지만 그 생명 연장은 때로는 정말 죽고 싶은 사람에게 잔인할 수도 있다. 병원은
더 이상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 나를 고문하는 곳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로자아줌마는 그녀가 원하는 죽음을 얻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카이렘?"
우리끼리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카이렘."
그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 내 머리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P.69>
모모의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재미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더빙을 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녹음실에서 계속
계속 되감기 되는 영화를 바라보며 모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P.133>
성장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자기 앞의 생에는 특별함이 있다. 청소년 드라마처럼 아자 힘내야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 라는
긍정적인 멘트를 전하기보다는 그저 책 속 인물 하나하나 한 명 한 명을 사랑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일을 수백 번 반복하는 것은 영화에서이다. 즉 누군가의 기억에서 반복되는 것이지 현실은 계속 자기 앞에
있는 것이다. 되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가끔 나를 위로할지 모르지만 그곳은 아주 잠깐 머무는 피난처일 뿐이다.
두서없는 독후감이
되어버렸지만, 아마도 그 두서없음 때문에 내 앞에 생에 대해서 그리고 생의 끝에 대해서. 모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생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비극인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