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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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나는 NGO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광우병 파동 때도 나는 시청에 있었다. 의정활동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석했었으며, 정책홍보활동 등 여러 가지 일들도 해 봤다. 하지만 정치에는 젬병이었다. 아니, 정치 포비아 수준이었다. 07학번인 나는 여태껏 세 번의 대통령을 뽑았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만 돌아보면, 이번엔 정말 치열하게 공약도 살펴보고 정치도 돌아보고 했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 또래만 살펴봐도 그렇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나온 학과의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렇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유시민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아쉬움이었다. 대학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얼마나 오만했던가.

 흔히 '어떤 것'을 지키고자 하는 쪽을 보수, '어떤 것'을 버리고자 하는 쪽을 진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속해있는 여당의 정책과 정치철학이 잘 반영되려면 여대야소의 국면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겪었다. 여대야소의 국면이 얼마나 우매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아이러니한 단어도 생겼다. 삼권분립이 강조되는 권력의 분산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난 대선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였다. 지나온 일들을 모두 곱씹지 않아도, 투표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시민들의 의식변화에서 알 수 있듯, 정치의 전성시대가 오고 있다. 과거 정권들이 그리고 집권 당들이 정치포비아를 주장하며, 국민들이 멀어지길 원했던 정치가 이제는 생활 속으로, 그리고 점점 더 젊은 군중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개념들을 확실히 잡는데 도움이 됐다. 물론 내가 유시민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정치를 풀어낸 이 책은 분명 대학시절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국가는 무엇인가?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 중 하나 "국가란 무엇인가." 그러나, 2016년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나라', '국가'는 과연 무엇일까? 아주 오랫동안 혼재하여 생각해 왔지만, 결국은 명확한 것은 국가는 그리고 정부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자가 쫓겨난다고 해서 정부 또는 국가가 반드시 함께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 혼자 쫓겨났지만 정부는 건재한 경우도 있었고, 정부가 무너졌지만 국가는 건재한 경우도 있었다. 국가와 정부, 국가와 군주를 구분하지 않은 홉스의 이론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P.41>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세속의 신이라고 불렀던 자본주의. 중세시대 절대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현대엔 많은 수의 세속의 신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국가일 것이다. 국가는 언젠간 소멸할 것이다. 다만 소멸하기 전까지는 더 나은 쪽으로 혹은 저물어 가는 쪽으로 이념과 이념을 건너가며 존재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했던 시대정신이 나폴레옹에서 대한민국의 촛불시민으로 옮겨오기까지 적다면 적은 시간이, 많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가는 분명 권력을 위탁받은 소수의 권력자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간다. 다만 한 가지, 유시민이 지적하는 것처럼 국가는 영원하지 않고, 권력은 더욱 짧은 수명을 갖는다. 과거 외부의 적 때문에 생긴 고대국가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국가는 또 다른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보다 많은 이해관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움직이며 진화 혹은 후퇴해 갈 것이다.



- 진보와 보수, 그 복잡 미묘함.

이번 대선이 재미있었던 점은 우리나라의 정치이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워보며 나는 어디에 가까운가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후보를 지지했지만 의외로 이 후보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고. 이 후보는 어떤 점이 눈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뭔가 속이 시원했고... 다섯 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과 한 달간의 정치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난 대선은 아마도 먼 훗날 현대사에서 가장 확실한 표본으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구꼴통이니, 입진 보이니, 좌파 빨갱이니... 알아듣기도 힘든 단어들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프레임을 씌우는 정치판을 보고 있자면, 가끔 '그래서, 보수는 무엇이고 진보는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기득권을 보수 변화를 꿈꾸는 세력을 진보라고 생각했던 내게 2016년은 참 많은 카테고리들을 만들어 줬다. 샤이보수, 진짜보수, 가짜진보... 따듯한 보수...

앞에서 대표적인 국가론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로 분류했다. (...)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울타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넘나들 수 없을 만큼 높지도 않다 <P.204>

 물론 하나의 학문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념들을 카테고리화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념이 확실한 사람들끼리만 정당을 만들고 정책 운영을 한다면 정치판은 각자의 이념 아래 똘똘 뭉쳐 합의는커녕 대화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모든 현안들은 이익이 상충되어있고, 극단과 극단을 넘나드는 사상도 동일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공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성향이 보수쪽인지 진보 쪽인지 보다는 어떤 부분이 더 중요한가, 혹은 덜 중요한가를 따지게 된다. 향후의 정치는 이렇게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이념의 싸움보다는 현안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유시민 작가의 성향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는 중립을 지키며 쓰지 않았다. 그러려고 쓴 책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인가 이니 말이다.

진보와 보수는 맞물려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하나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P.205>

 그는 책에서 몇 십 년간을 진보성향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념은 계속 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결국은 기득권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로 매끄러운 논점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지키는 것도 이토록 힘든데,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책을 쓴 사람도 그것을 원하고 책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한 책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패러다임은 이제 낡았다.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 국가는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

 책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가장 놀란 점은 진보성향을 가진 작가의 책에서 가장 보수적인? 철학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의외의 인물, 칸트이다. 평생을 자신의 생활 반경에서 시계와 같은 삶을 산 그가 '네 마음이 보편적인 입법자'라는 말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약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확실히 일리가 있다. 칸트의 도덕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현대 세상에서 단언컨대 극 소수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한 정언명령대로 완벽하게 지키고 살려면, 아마도 수도원에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사막에서 닿지 않는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처럼 정치인들은, 아니 정치인을 넘어서 현대인들은 마음속에 한 명 이상의 철학자를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철인정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은 옳았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 인구와 영토가 커진 현대에는 많은 수의 지혜 있는 자들이 있다. 이 사람들 중에 어떤 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가?


 

책은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아마 한동안은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릴 것이다. 빠르게 전달되는 속보들에 가슴 두근두근하면서, 내가 뽑은 대통령을 응원하기도 하고, 아쉽게 낙선한 사람들이 어떤 행보를 하는지 관심을 갖고, 총선을 기다릴 것이다. 그 순간순간마다 몇 번이고 책에 대한 감정은 바뀌겠지만, 한동안 읽지 않았던 사회과학서를 들어 볼 시간이 온 것만 같다.

 모든 국민이 각자의 국가론을 가진 세상.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각자 서있는 세상이라면 복잡한 이념과 이해관계의 다툼에도 목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멋지지 않을까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 본다. 국가는 세속의 신이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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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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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소통은 너라고 말하는 것, 타자를 호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로서의 타자를 호출하는 것은 "근원적인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디지털 소통은 모든 거리를 파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p.101 / 타자의 언어>

이웃과의 소통, 애정을 수신했습니다. 랜선친구, 모니터 뒤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등등의 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니터(그것)를 사이에 두고있을 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리뷰 몇 자만으로 만족하거나, 직접 꽃을 길러보지 못한 채 '박제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공들여 이해했었던 동일자의 지옥은 어쩌면, 이곳 작은 핸드폰 안에서 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상태로 남아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단계를 보여준다. <P.10 / 같은 것의 테러>

>> 같은것들로 가득 찬 곳에서 다른 나?

"나는 나다"를 알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타자일 것이다. 나는 수 많은 타자들에 비춰봐야지만 알 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나에 반反하는 타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병철의 책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긍정적으로'받아들였던 단어들에 대해서 나열한다.

투명한 / 긍정적인 / 매끄러운 / 가속화 / 질서정연함

비가시적인 / 부정성 / 거친 / 천천히 되어가는 / 무질서함

그동안의 책에서 깨어진 단어에 대한 편견들을 가지고 이번 책을 대하면 '역시' 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투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사회. 긍정과잉으로 '안돼'를 외치지 못하는 자아의 피로함과, 역시나 반항없이 매끄럽고 돌아볼 수 없이 가속화 되어있으며 무논리로 맞설 수 없는 질서정연한 사회. 한병철은 이번엔 '타자'에 집중한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있는 거의 모든 책들을 완독했다고 생각했는데 지치지도 않고 또 내 놓은 책은 '타자의 추방'이다. 이쯤되면 제목만 보고도 아 이 사람이 뭘 이야기하려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온다. 저자의 집필의도와는 별도로 세상에 나온 이 책들과 나는 어떤 의도로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선입견이다. 이미 <에로스의 종말>에서 동일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한병철과 이만큼 소통이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같은 것을, 정해진 구역 내에서의 특별함을, 결코 튀지 않는 즐거움을 원한다. 이미 타자는 나와 같아져 버린 것이다. 다름 없는 사람. 그저 상업사회의 부품으로서의 타자는 나와 너의 관계 즉 만남을 형성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와 그것의 관계로서 소멸되어 버린다.

>> 타자는 책상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서를 접하다보면 '타자'는, 단순한 인간관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국한된 단어가 아니다. 타자는 나의 경계선 밖에서 나와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육체를 이야기할 수도있고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인지한 나의 에고일 수도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가끔 나는 나를 타자화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의미를 갖는 타자의 핵심은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속 세상의 '이웃'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좀 더 들어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런것들을 묻는것은 실례가 된다. 사생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타인이 궁금해지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타자'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저 넷 망속의 이웃 혹은 서로 이웃은 나의 매끄러움(저자는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은 저항하지 않는, 개성이 없는 '이상적인 소비자'라고 했다.)을 표현할 '그것'에 불과할지도.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화를 가속화하는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 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기도 없는 공간이다. <P.61 / 소외>

우리가 타인에 무관심해 진 것은 어느 순간부터일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개인주의와 섞어서 인식하고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까지이고, 개개인의 자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생활이다. 노터치. 그러나 우리는 사회속에서 타인과 살아가야 하며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교류를 원한다. 그래서 비교적 쉽고 매끄러운 방향으로 소통을 택한다. 즉 타인에 대한 지극한 무관심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느낌'만을 갖고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옆집문을 열지 못한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하기 위해 옆집 문을 열 사람은 없겠지.)

타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 소통은 정보들의 가속화된 교환으로 전락한다. 이런 소통은 어떠한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로지 연결만 낳을 뿐이다. 그것은 이웃이 없는, 어떠한 친근함의 가까움도 없는 소통이다.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P.115 / 경청하기>

>> 그렇다면, 타자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세계가 '그것'이 아닌 '그'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랜선 세계가 결정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쏟아낼 뿐 경청하지 못한다. 음성이 없는 텍스트의 집단에서 나는 그저 마음에 드는 글을 읽었고, 생각을 뱉을 뿐이다. 훌륭한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향이다. 나는 글을 글로써 재창작할 뿐이고 원작자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생각이 훌륭하거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것 역시 텍스트로 옮기기엔 뭔가 부족해진다. 혁신적으로 출발했던 인터넷망은 이렇게 모든 자의 글들을 수집할 뿐이다. 양방향이라고 생각했던 서로간의 댓글은 사실 각자의 일방향이었던 것이다.

오랜시간 블로그를 해 오면서, 나는 많은 분들을 안다. 그리고 그 중에선 나와 '그것'의 관계를 끝내고 '그'의 관계가 된 사람들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인터넷 상의 인연이 으쌰으쌰 현실세계의 이웃이 된 것이다. 아이디로 존재했던 그것이 타자가 되는 순간, 관계는 회복되는 것일까?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P.119 / 경청하기>

시스템속에서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타자가아닌 '그것'. 인간성의 회복은 '경청'함과 타자를 매끄럽지 않게 대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분명 상업정신의 악마성을, 나아가 그 무이성성을 몰랐다. 그의 판단은 관대했다. 그는 상업정신이 "긴"평화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그저 가상일 뿐이다. 상업정신은 오로지 계산하는 오성만을 부여받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상업정신에 의해, 돈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시스템 자체에도 이성은 없다.<P.31 /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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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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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머리가 너무 아픈 책이었다.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원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어의 해체. 후안롤포가 원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면 엄청난 성공이 아닐까.


꼬말라에 왔다. 이곳은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내가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겠다는 뜻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 드리자, 당신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했다. "꼭 찾아가야 한다. 그 양반도 너를 보면 좋아할 게다." <시작>

이 책은 온전한 것이 없다. 시간도 시점도 우리가 생각하는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멕시코 문학. 책에는 김철수나 김영희가 등장하지 않는다. 빼드로 빠라모와 후안 쁘레시아도, 돌로레스... 이름도 낯선 아니, 심지어 책이 끝날 때까지도 알지 못했던 남성을 나타내는 단어 '돈'과 여성을 나타내는 단어 '도냐'..그리고 주인을 뜻하는 '빠드론'.

모든 것이 낯선 이 책을 일월 초에 시작해서 삼월까지, 총 세 번이나 읽은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구조에서 발견한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각자 다른 장소와 각자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드라마에 가깝다. 드라마의 주축이 되는 줄거리는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를 찾아 떠난 후안 쁘레시아도와, 그의 아버지인 빼드로 빠라모의 일대기.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죽은 자들의 목소리이다. 첫 번째 읽을 땐 전적으로 감에 의지하여 이 인물이 누구인가 이 인물은 어느 집의 종이며 이 인물은 누구의 딸이고, 이 인물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읽었다. 책을 덮고 내가 완전히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은 인물 간의 관계와 시간의 순서, 그리고 이 사람이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를 읽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책 속 인물들의 한을 쫓아가는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정성스럽게도 각각의 한恨을 갖는다.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날은 거꾸로 어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지에는 마치 지축을 붙들어 고정시키는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흡사 어둠을 들춰내는 오래된 대지의 꿈틀거림 같은 소리였다.

- 후스띠나, 밤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 그렇지? <P.152>

책에는 일종의 연옥이 존재한다. 두 번 읽고 나서야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느 시점에 죽었을지 어렴풋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엉키는 일종의 연옥과 아버지의 과거 그리고 비상한 머리와 넘치는 매력을 가졌던 빼드로 빠라모가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여성 수사나의 잊히지 않는 과거 등, 많은 줄거리들이 얽혀있어서 마치 수학공식을 푸는 즐거움으로 끈기 있게 읽게 한다.

책은 150쪽이 조금 넘는다. 황망할 노릇이다. 책의 길이가 이렇게 짧은데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빼드로 빠라모 삼대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혁명을 통해 무너져가는 일대기와 지주들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 등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짧은 책 내에서 어떻게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낼 수 있는지. 놀라운 점은 서사적 기록도 아니고 인물을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표현해 낼 수 있는지 하는 점이다.

사실 세 번째 읽을 때까지만 해도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느 시점에서 죽었는지 확신이 없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아버지의 마을 꼬말라에 와서, 죽은 자들과 말을 섞는 시점까지도 살아있다가, 열병으로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 했었다. 차후 뒷부분의 각주를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후안롤포의 설정 역시 그 시점에 죽었다로 잡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첫 번째 읽었을 때처럼 그가 꼬말라에 와서 죽었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어쨌든 책의 시점은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음성이 대답했다.

- 저는 지금 어머니의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제가 안 보여요?

- 안 보이는구나.

마치 모든 세상을 감싸는 듯한 어머니의 음성이 대지에 스며들고 있었다.

- 네가 안 보여.<P.80>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 한으로 남은 사람과 어릴 때의 끔찍한 기억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자, 남매가 사랑에 빠진 죄악을 숨긴 채 살았던 사람과 모든 여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열정을 다해 평생 사랑했던 여자는 가질 수 없었던 남자.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었던 여자... 각각의 한들이 모여서 이 책이 만들어졌다.

책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이곳은 밤도 낮도, 시간도 나이도 모든 것들이 중요하지 않듯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도 중요하지 않지만 밤이 지나 낮이 오고 낮이 지나가야 다시 밤이 되듯, 각각의 연계성들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연결고리는 연결이 되어있지만 벽이 있다. 밤은 어두워야 밤이고 낮은 밝아야 낮이듯이, 현세는 각각의 한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빌며 사는 곳이며 죽어서 연옥을 거쳐 천국이든 지옥을 오가겠지만, 내세에서 이해 못 한 일들은 연옥에서도 풀 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죄악을 지면 안된다. 작가의 세계관이 참 재미있다.

이곳은 밤이면 유령들의 세계로 변해요. 혹시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유령들을 못 보셨어요? 유령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령은 많지만, 우리는 몇 사람에 불과해요. 그래도 서로 다투는 일은 없어요. 유령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해 주거든요...<P.73>

책은 매력적인 스토리를 많이 품고 있지만,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빼드로빠라모와 수사나의 사랑이다. 일방적인 사랑. 빼드로빠라모는 어릴 적 단 한번 물가에서 몸을 섞은 수사나를 사랑했다. 그녀를 갖기위에 온갖고초를 다 겪었지만 그녀는 빼드로빠라모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모든 삶을 해체한 여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주 어릴때 작은 몸으로 무덤을 도굴하는 끔찍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반쯤 미쳐있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남편과 살았다. 그녀는 언제든 바다로 나가기를 바랐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눈앞으로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튀어나오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머리가 복부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섰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머리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P.160>

그녀에게 삶은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나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지루한 시간의 순서대로 지나갈 뿐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죽음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도 삶은 신부에 의해서 기도문을 외워야지만 자신을 놓아줄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어릴 때부터 길러주던 후스띠나는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시끄러웠고 그 시끄러움에 대해 불평하는 한 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죽음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삶 어디에도 빼드로 빠라모는 없었다.

빼드로 빠라모는 그녀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신에 의해 그녀가 누구보다 끔찍하게 사랑받는 여자임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지울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키는 당사자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사나 산 후안의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뻬드로 빠라모가 영원히 풀지 못 할 숙제였다.<P.133>

책의 모든 순간을 관통하는 토지에 대한 개념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이제 갈 수도 없는 과거의 멕시코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주 낯선 풍경과 시장에서 로즈마리를 사 재단에 올리는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아마 한동안은 이 책의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몇 대에 걸친 전기를 읽는 것은 큰 인내를 가져야 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내가 몇 번이고 들었다 놓은 것도 이 문제이다. 가뜩이나 구조도 낯선데, 사람의 이름도 이게 이름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책이 재밌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어내며 느낀 점이다. 혹시 반복되는 독서에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참, 원래 작품해설은 읽지 않지만 워낙 어렵게 읽은 책이라 다른 사람의 느낌도 궁금해 읽다가 무릎을 쳤다.

.."롤포가 복잡한 구조를 통해 빼드로 빠라모를 창작흔 것은 분명하다"고 전재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법들을 적절히 조화시킨, 터무니 없는 어려움을 창조하기 위한 어설픈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테마가 명백한 혼돈을 요구하는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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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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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짜인 운명에 상응하는 것이었으며, 에스테반 가르시아도 그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집에 있었을 나는 각기 정확한 자리를 지닌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조각들이 다 제자리를 찾고 나면, 각 부분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거라 확신했다. <에필로그_326>

독서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추천해 준 책은 오래 묵혀서든 빨리든 언젠가는 읽게 되더라. 이 책 역시 그런 책이다. 1,2부로 나눠져있고 칠레라는 생소한 곳에서 태어난 책이 손에 오기까지.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왔기에 입맛에 딱 맞는 책이었다.

책은 가문의 일대기이다. 한 남자의 기록이기도 하며 한 여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엔 가계도를 그려볼까 하다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책은 서사적 순서로 쓰여있지만 화자는 각 장마다 조금씩 다르다.

잔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주 사소한 개인의 가정사가 뒤섞인 이야기. 책에는 영혼과 마술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연대기 순서로 읽어 나가다 보면 한 인간의 업보가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 계속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 보게 되는 매력적인 책이다.

...그러면 천년만년 함께 살면서 그녀만을 영원히 사랑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두고두고 해주려 했던 애정표현과 깜짝 놀래며 주려고 했던 선물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려 했는지에 대해서 얘기했다. 즉 로사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별의별 소리를 다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어느 여자한테도 그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로사_73>

책은 가진 것이라고는 가문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에스테반 트루에바에게서 시작한다. 그는 아픈 어머니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돌보는 페룰라누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로사를 만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질식할뻔했다. 그는 로사를 신부로 맞기 위해 큰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광산으로 떠나지만, 광산에서 돈을 번 그가 그녀를 신부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대신 그녀는 독살당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벌게 된 돈이 필요 없어졌다.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토인 트레스마리아스로 내려간다. 주인 없이 버려져있던 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는 그 지역에 매달렸고, 부랑자의 마을이었던 그 일대가 순식간에 최고의 농지가 된 것을 보면 에스테반트루에바는 타고난 재력가이자 엘리트였으리라. 하지만, 소설을 쓰려면 멋진 엘리트는 매력이 없기 마련이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그 지역 일대에 사생아를 뿌리고, 증오를 거두어들이고, 죄악을 쌓아 올리면서 난봉꾼으로서의 명성을 높여갔다. 그의 영혼은 쇠심줄처럼 무감각해졌으며, 발전이라는 명복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잠재웠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트레스 마리아스_119>

모든 것이 여기 트레스마리아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트루에바의 사생아는 군부시절 장교가 되어 그녀의 외손녀 알바를 강간하고 한편으로는 사랑하게 되는 애증의 관계가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곳 트레스 마리아스에서 그의 딸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소작농의 아들과 신분차의 사랑이 생겨난 곳도 이곳이거니와 그가 우연히 도움을 준 창녀가 나중에 그에게 남은 단 한 명의 손녀를 구하게 되는 것도 이곳 트레스 마리아스에서 시작된다.

한편 로사의 동생인 클라라는 어린 나이에 로사의 부검 장면과 그 이상의 것을 목격하고는 입을 다문다. 그녀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기에, 입을 다물었고. 그 후 클라라가 말을 해야겠다 느꼈던 건 그녀의 운명을 목격한 그날이었다. 그녀는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언니의 청혼자 에스테반 트루에바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했고, 그와 실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그는 로사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극적이면서도 묘한 매력을 가진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노트들에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었다. 클라라는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혹독한 삶의 풍상을 겪지 않도록 보호받으며 살았다. 클라라의 세계에서는 물질적인 물체들의 멋대가리 없는 실체가 꿈의 요란스러운 진실과 뒤섞였으며, 그곳에서는 물리학이나 논리학의 법칙들이 늘 적용되지 않았다. <영험한 능력을 지닌 클라라_151>

그녀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인공이다. 맹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신묘한 힘을 지녔고, 훗날 미모까지도 언니 로사를 닮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늙지 않았으며, 그녀의 마지막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딸과 손녀의 마지막까지도 알았으며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의 죽음까지도 예견한 신비한 여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클라라라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녀는 평생 그녀 주변의 신기한 일에 대해 기록했으며, 알바에게 영혼으로 나타나 그녀가 죽기 바란 그 순간에 죽지 말고 이 일을 기록하여 남길 것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1권의 주인공이 클라라라면, 2권의 주인공은 당연 그녀의 손녀 알바일것이다. 클라라의 딸 블랑카가 트레스 마리아스의 한 사내아이에게 반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알바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뒤에 알게 되지만 그녀는 어쨌든 프랑스 백작의 성을 가진 여인으로 자란다. 모든 것은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재력으로, 정치력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이틀 후에 클라라가 단언했다. 이미 별들이 다 알아서 알바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에게 따로 인생 준비를 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알바_33>

아이는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기는 절대 도다를 수 없는 것을 모두 누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아이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 아이의 냄새를 맡고, 갓난 아이처럼 여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의 부드러운 살갗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알바_75>

그녀는 맹목적으로 착한 세상을 모르는 여인이다. 한편 영특했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블랑카의 운명을 나눠진 여인이기도 하다. 훗날 게릴라군의 우두머리인 급좌파 미겔과의 사랑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모두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한편의 대하 극장을 보는 듯한 이 소설의 기쁨은 인물의 특성을 따라가면서도 느낄 수 있지만 시대적 배경의 음울함으로도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세가 혼란한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맞아떨어져 묘한 느낌이 든다.

군부가 펜을 휘둘러 세계 역사도 바꿔 놓았다. 그 체제가 인정하지 않는 사건이나 사상, 역사적 인물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들은 북아메리카가 자기네들의 위대한 조국 위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지도까지 바꿔놓기도 했다. 아래쪽으로 뒤집어 놓는 편이더 근사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뻗은 영해 지역을 온통 감청색으로 칠했으며, 자기네들 마음대로 국경을 조작해서 먼 나라의 땅까지 지도상으로는 자기네 나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웃 나라들이 참다못해 유엔에 항의하고, 탱크와 전투기를 몰고 쳐들어가겠다며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공포의 시대_242>

책을 읽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은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은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무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같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삼대에 걸쳐 내려오다 보면 인물에 대한 복수심이나 경외심이 뒤엉켜 세대를 거듭하곤 한다. 주인에게 강간당해 세상에 나온 주인의 서자는 장자인 그녀의 외손녀를 겁탈하기도 하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은 연관된 세상이다. 알바는 사랑스러운 여인이나 미모는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일찍 죽은 여신 같은 로사의 머릿결을 닮았다. 책을 읽다 잠깐 멈춰 서는 작가가 과연 이런 장르의 책을 쓸 때 본인의 경험 없이 상상만으로 가능할까 싶어진다. 그래서 그런가, 너무 황망한 마법 같은 장치들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얘야, 교회는 우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좌익이었다."

호세 신부는 페드로 테르세로가 찾아올 때마다 반가워하며 미사 때 사용하는 와인을 홀짝홀짝 들이켜면서 수수께끼같은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후에 테라스에서 쉬고 있던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소년이 여우 한 마리에 대항해 암탉들이 힘을 뭉쳐서 이겼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연인들_270>

여우 한 마리에 대항해 암탉들이 이긴 세계. 하지만 암탉 역시도 지렁이에게는 강자라는 사실을. 책은 여실히 드러내준다. 책은 음울한 듯 하나, 마음이 저리고 미묘하다. 아마 리뷰를 작성하고 나면 한동안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찾아 떠돌 것 같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한단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일 뿐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죽음은 탄생과 같은 거야. 그냥 옮겨가는 것일 뿐이지"

클라라가 말했다. <알바_82>

1,2부로 나누어진 만큼 긴 리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기록하기 힘든 이유는 이 책은 큰 사건사고가 주가 아니라 말그대로 시대가 주인공인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은 따듯하게 결자해지 된다. 그래서 이 기록이 남을 수 있었노라고 말하며 맺는다. 모든 일들이 그렇다.

여담이지만 엉뚱하게도 작가의 섬세함을 느꼈던 부분은 트루에바가문의 여인들의 이름을 보고서이다. 클라라와 블랑카, 그리고 알바는 단어적의미로 볼때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는 뜻이란다. 별이거나, 혹은 빛나는 어떤것들. 클라라가 블랑카와 가문의 여인들의 이름을 정하는 방법을 두고 논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침내 모든 단어를 사용하고 나서 반짝거리는 의미의 단어가 사라지고나면 외국어로 이름을 지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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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 홍상현 옮김 / 나름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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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 전집의 날개를 펼쳐서 보면 '세대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역사가 다름 아닌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모든 세대는 그 세대에 고유한 관심사를 매개로 과거와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여 새 역사를 써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새로 쓰기를 통해서 진정 당대의 역사로 정립된다. 이것은 문학사나 예술사의 경우에도 동일하다.'라는 말이 적혀져있다. 고전문학은 보통 민음사 번역본으로 즐기는 나는 일 년이면 꼬박 백여 번 만나보게 되는 말이다. 이는 문학사나 예술사 뿐만 아니라 철학사에도 적용될 것이다.

인문학 서적을 즐겨읽지 않지만, 그래도 간간이 읽는다. 하지만 리뷰를 어떻게 남겨야 할지 모르겠다. 문학은 스토리가 남지만 인문학은 지식이 남기 때문이다. 책 안의 지문을 똑같이 옮겨두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난감할 때가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문학은 텍스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마다의 생각이 다르다. 하나 인문학은 '이런 현상이 이렇게 반영되어 이렇게 표현될 거야'를 골자로 하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하는 방식으로 읽어내게 되는 것이다.

2017년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위시리스트를 뽑으며 철학 책 한 권을 떼는 것 역시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었다. 현재 진행형이며 혼자는 버거워 길잡이와 함께 천천히 진행을 하다가 유독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르크스에 대한 갈증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마르크스는 거부감이 든다. 그는 철학자이기보다는 혁명가였으며, 이름에서 풍겨오는 '공산주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열맞춰 걸어가는 북한을 생각나게 했다.

고등학교 때 한 단락 정도 나왔을까. 마르크스-공산주의-혁명-유물론 이것만 외우고 지나갔던 사람에게 마르크스의 A-Z를 모두 다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웬 수염 난 할아버지 캐릭터가 마르크스라니. 사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갑자기 마르크스에 대해 전부 알게 되거나, 모르던 이론에 눈을 뜬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되려 이 책은 일종의 자기개발서 같다.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누구와 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를 주는 책이다. (그래서 사실 살짝 실망을 했다.)

정말 마르크스 초심자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위인전 읽는 기분으로 읽어볼 사람들에게 권한다. 아! 공감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대학 때 있어 보이고 싶어서 자본론을 뽑아서 읽다가 식겁한 적이 있는데, 뒷부분 보면 자본론을 가지고 스터디를 시작한 사람들의 대본이 나온다. 그걸 보니 왠지 대학 때 내가 생각났다.


그래서, 다시 제대로 된 마르크스 입문서를 찾아볼 참이다.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 아닐까.


마르크스를 읽는 목적이 '우와, 마르크스 짱!'하며 마르크스에게 감동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21세기인 오늘, 굳이 19세기의 마르크스를 읽는 것의 의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투쟁했던 당시의 사회에서 변혁을 꿈꾼 마르크스의 진지한 삶의 방식을 피부로 느끼고, 그가 절실한 마음으로 탐구한 학문적 깊이를 제대로 배움으로서 21세기의 현실에서 변혁을 추구하는 기개를 이어받아 그는 볼 수 없었던 오늘날의 세계를 우리 스스로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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