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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짜인 운명에 상응하는 것이었으며,
에스테반 가르시아도 그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집에 있었을 때 나는 각기 정확한 자리를 지닌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조각들이 다 제자리를 찾고 나면, 각 부분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거라 확신했다.
<에필로그_326>
독서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추천해 준 책은 오래 묵혀서든 빨리든 언젠가는 읽게 되더라.
이 책 역시 그런 책이다. 1,2부로 나눠져있고 칠레라는 생소한 곳에서 태어난 책이 손에 오기까지.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왔기에
입맛에 딱 맞는 책이었다.
책은 가문의 일대기이다. 한 남자의 기록이기도 하며 한 여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엔 가계도를 그려볼까 하다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책은 서사적 순서로 쓰여있지만 화자는 각 장마다 조금씩 다르다.
잔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주 사소한 개인의 가정사가 뒤섞인 이야기. 책에는 영혼과 마술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연대기 순서로 읽어 나가다 보면 한 인간의 업보가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 계속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 보게 되는 매력적인 책이다.
...그러면 천년만년 함께 살면서 그녀만을 영원히 사랑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두고두고 해주려 했던 애정표현과 깜짝 놀래며 주려고 했던 선물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려 했는지에 대해서 얘기했다. 즉 로사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별의별 소리를
다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어느 여자한테도 그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로사_73>
책은 가진 것이라고는 가문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에스테반 트루에바에게서 시작한다. 그는 아픈 어머니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돌보는
페룰라누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로사를 만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질식할뻔했다. 그는 로사를 신부로 맞기 위해 큰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광산으로 떠나지만, 광산에서 돈을 번 그가 그녀를 신부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대신 그녀는 독살당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벌게 된 돈이 필요 없어졌다.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토인 트레스마리아스로 내려간다. 주인 없이
버려져있던 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는 그 지역에 매달렸고, 부랑자의 마을이었던 그 일대가 순식간에 최고의 농지가 된 것을 보면
에스테반트루에바는 타고난 재력가이자 엘리트였으리라. 하지만, 소설을 쓰려면 멋진 엘리트는 매력이 없기 마련이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그 지역 일대에 사생아를 뿌리고, 증오를 거두어들이고, 죄악을 쌓아
올리면서 난봉꾼으로서의 명성을 높여갔다. 그의 영혼은 쇠심줄처럼 무감각해졌으며, 발전이라는 명복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잠재웠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트레스 마리아스_119>
모든 것이 여기 트레스마리아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트루에바의 사생아는 군부시절 장교가 되어 그녀의 외손녀 알바를
강간하고 한편으로는 사랑하게 되는 애증의 관계가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곳 트레스 마리아스에서 그의 딸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소작농의
아들과 신분차의 사랑이 생겨난 곳도 이곳이거니와 그가 우연히 도움을 준 창녀가 나중에 그에게 남은 단 한 명의 손녀를 구하게 되는 것도 이곳
트레스 마리아스에서 시작된다.
한편 로사의 동생인 클라라는 어린 나이에 로사의 부검 장면과 그 이상의 것을 목격하고는 입을 다문다. 그녀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기에, 입을 다물었고. 그 후 클라라가 말을 해야겠다 느꼈던 건 그녀의 운명을 목격한 그날이었다. 그녀는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언니의 청혼자 에스테반 트루에바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했고, 그와 실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그는 로사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극적이면서도 묘한 매력을 가진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노트들에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었다. 클라라는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혹독한 삶의 풍상을 겪지 않도록 보호받으며 살았다. 클라라의 세계에서는 물질적인 물체들의 멋대가리 없는 실체가 꿈의 요란스러운
진실과 뒤섞였으며, 그곳에서는 물리학이나 논리학의 법칙들이 늘 적용되지 않았다. <영험한 능력을 지닌
클라라_151>
그녀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인공이다. 맹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신묘한 힘을 지녔고, 훗날 미모까지도 언니 로사를 닮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늙지 않았으며, 그녀의 마지막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딸과 손녀의 마지막까지도 알았으며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의
죽음까지도 예견한 신비한 여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클라라라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녀는 평생
그녀 주변의 신기한 일에 대해 기록했으며, 알바에게 영혼으로 나타나 그녀가 죽기 바란 그 순간에 죽지 말고 이 일을 기록하여 남길 것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1권의 주인공이 클라라라면, 2권의 주인공은 당연 그녀의 손녀 알바일것이다. 클라라의 딸 블랑카가 트레스 마리아스의 한 사내아이에게 반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알바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뒤에 알게 되지만 그녀는 어쨌든 프랑스 백작의 성을 가진
여인으로 자란다. 모든 것은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재력으로, 정치력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이틀 후에 클라라가 단언했다. 이미 별들이 다 알아서 알바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에게 따로 인생 준비를 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알바_33>
아이는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기는 절대 도다를 수 없는 것을 모두 누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아이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 아이의 냄새를 맡고, 갓난 아이처럼 여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의 부드러운 살갗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알바_75>
그녀는 맹목적으로 착한 세상을 모르는 여인이다. 한편 영특했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블랑카의 운명을 나눠진 여인이기도 하다. 훗날 게릴라군의
우두머리인 급좌파 미겔과의 사랑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모두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한편의 대하 극장을 보는 듯한 이 소설의 기쁨은 인물의 특성을 따라가면서도 느낄 수 있지만 시대적 배경의 음울함으로도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세가 혼란한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맞아떨어져 묘한 느낌이 든다.
군부가 펜을 휘둘러 세계 역사도 바꿔
놓았다. 그
체제가 인정하지 않는 사건이나 사상, 역사적 인물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들은 북아메리카가 자기네들의 위대한 조국 위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지도까지
바꿔놓기도 했다. 아래쪽으로 뒤집어 놓는 편이더 근사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뻗은 영해 지역을 온통 감청색으로 칠했으며, 자기네들 마음대로 국경을 조작해서 먼 나라의 땅까지 지도상으로는
자기네 나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웃 나라들이 참다못해 유엔에 항의하고, 탱크와 전투기를 몰고 쳐들어가겠다며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공포의 시대_242>
책을 읽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은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은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무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같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삼대에 걸쳐 내려오다 보면 인물에 대한 복수심이나 경외심이 뒤엉켜 세대를 거듭하곤 한다. 주인에게 강간당해 세상에 나온 주인의
서자는 장자인 그녀의 외손녀를 겁탈하기도 하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은 연관된 세상이다. 알바는 사랑스러운 여인이나 미모는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일찍 죽은 여신 같은 로사의 머릿결을 닮았다. 책을 읽다 잠깐 멈춰 서는 작가가 과연 이런 장르의 책을 쓸 때 본인의
경험 없이 상상만으로 가능할까 싶어진다. 그래서 그런가, 너무 황망한 마법 같은 장치들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얘야, 교회는 우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좌익이었다."
호세 신부는 페드로 테르세로가 찾아올 때마다 반가워하며 미사 때 사용하는 와인을
홀짝홀짝 들이켜면서 수수께끼같은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후에 테라스에서 쉬고 있던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소년이 여우 한 마리에
대항해 암탉들이 힘을 뭉쳐서 이겼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연인들_270>
여우 한 마리에 대항해 암탉들이 이긴 세계. 하지만 암탉 역시도 지렁이에게는 강자라는 사실을. 책은 여실히 드러내준다. 책은 음울한 듯
하나, 마음이 저리고 미묘하다. 아마 리뷰를 작성하고 나면 한동안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찾아 떠돌 것 같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한단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일 뿐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죽음은 탄생과
같은 거야. 그냥 옮겨가는 것일 뿐이지"
클라라가 말했다. <알바_82>
1,2부로 나누어진 만큼 긴 리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기록하기 힘든 이유는 이 책은 큰 사건사고가 주가 아니라 말그대로
시대가 주인공인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은 따듯하게 결자해지 된다. 그래서 이 기록이 남을 수 있었노라고 말하며 맺는다. 모든 일들이
그렇다.
여담이지만 엉뚱하게도 작가의 섬세함을 느꼈던 부분은 트루에바가문의 여인들의 이름을 보고서이다. 클라라와 블랑카, 그리고 알바는
단어적의미로 볼때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는 뜻이란다. 별이거나, 혹은 빛나는 어떤것들. 클라라가 블랑카와 가문의 여인들의 이름을 정하는
방법을 두고 논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침내 모든 단어를 사용하고 나서 반짝거리는 의미의 단어가 사라지고나면 외국어로 이름을 지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