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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머리가 너무 아픈 책이었다.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원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어의 해체. 후안롤포가 원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면 엄청난 성공이 아닐까.
꼬말라에 왔다. 이곳은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내가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겠다는 뜻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 드리자, 당신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했다. "꼭 찾아가야 한다. 그 양반도 너를 보면 좋아할 게다."
<시작>
이 책은 온전한 것이 없다. 시간도 시점도 우리가 생각하는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멕시코 문학. 책에는 김철수나 김영희가 등장하지 않는다. 빼드로 빠라모와 후안 쁘레시아도, 돌로레스... 이름도 낯선 아니, 심지어 책이
끝날 때까지도 알지 못했던 남성을 나타내는 단어 '돈'과 여성을 나타내는 단어 '도냐'..그리고 주인을 뜻하는 '빠드론'.
모든 것이 낯선 이 책을 일월 초에 시작해서 삼월까지, 총 세 번이나 읽은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구조에서 발견한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각자 다른 장소와 각자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드라마에 가깝다. 드라마의 주축이 되는 줄거리는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를 찾아 떠난 후안 쁘레시아도와, 그의 아버지인 빼드로 빠라모의 일대기.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죽은 자들의 목소리이다. 첫
번째 읽을 땐 전적으로 감에 의지하여 이 인물이 누구인가 이 인물은 어느 집의 종이며 이 인물은 누구의 딸이고, 이 인물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읽었다. 책을 덮고 내가 완전히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은 인물 간의 관계와 시간의 순서, 그리고 이 사람이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를 읽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책 속 인물들의 한을 쫓아가는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정성스럽게도 각각의 한恨을
갖는다.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날은 거꾸로 어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지에는
마치 지축을 붙들어 고정시키는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흡사 어둠을 들춰내는 오래된 대지의 꿈틀거림
같은 소리였다.
- 후스띠나,
밤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 그렇지? <P.152>
책에는 일종의 연옥이 존재한다. 두 번 읽고 나서야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느 시점에 죽었을지 어렴풋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엉키는 일종의 연옥과 아버지의 과거 그리고 비상한 머리와 넘치는 매력을 가졌던 빼드로 빠라모가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여성 수사나의
잊히지 않는 과거 등, 많은 줄거리들이 얽혀있어서 마치 수학공식을 푸는 즐거움으로 끈기 있게 읽게 한다.
책은 150쪽이 조금 넘는다. 황망할 노릇이다. 책의 길이가 이렇게 짧은데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빼드로 빠라모 삼대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혁명을 통해 무너져가는 일대기와 지주들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 등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짧은 책 내에서 어떻게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낼 수 있는지. 놀라운 점은 서사적 기록도 아니고 인물을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표현해 낼 수 있는지 하는 점이다.
사실 세 번째 읽을 때까지만 해도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느 시점에서 죽었는지 확신이 없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아버지의 마을 꼬말라에
와서, 죽은 자들과 말을 섞는 시점까지도 살아있다가, 열병으로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 했었다. 차후 뒷부분의 각주를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후안롤포의 설정 역시 그 시점에 죽었다로 잡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첫 번째 읽었을 때처럼 그가 꼬말라에 와서 죽었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어쨌든 책의 시점은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음성이 대답했다.
- 저는 지금 어머니의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제가 안
보여요?
- 안 보이는구나.
마치 모든 세상을 감싸는 듯한 어머니의 음성이 대지에 스며들고
있었다.
- 네가 안
보여.<P.80>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 한으로 남은 사람과 어릴 때의 끔찍한 기억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자, 남매가 사랑에 빠진 죄악을 숨긴 채
살았던 사람과 모든 여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열정을 다해 평생 사랑했던 여자는 가질 수 없었던 남자.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었던 여자... 각각의 한들이 모여서 이 책이 만들어졌다.
책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이곳은 밤도 낮도, 시간도 나이도 모든 것들이 중요하지 않듯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도
중요하지 않지만 밤이 지나 낮이 오고 낮이 지나가야 다시 밤이 되듯, 각각의 연계성들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연결고리는 연결이 되어있지만
벽이 있다. 밤은 어두워야 밤이고 낮은 밝아야 낮이듯이, 현세는 각각의 한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빌며 사는 곳이며 죽어서 연옥을 거쳐
천국이든 지옥을 오가겠지만, 내세에서 이해 못 한 일들은 연옥에서도 풀 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죄악을 지면 안된다. 작가의
세계관이 참 재미있다.
이곳은 밤이면 유령들의 세계로 변해요. 혹시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유령들을
못 보셨어요? 유령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령은 많지만, 우리는 몇 사람에
불과해요. 그래도 서로 다투는 일은 없어요. 유령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해
주거든요...<P.73>
책은 매력적인 스토리를 많이 품고 있지만,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빼드로빠라모와 수사나의 사랑이다. 일방적인 사랑. 빼드로빠라모는 어릴
적 단 한번 물가에서 몸을 섞은 수사나를 사랑했다. 그녀를 갖기위에 온갖고초를 다 겪었지만 그녀는 빼드로빠라모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모든 삶을 해체한 여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주 어릴때 작은 몸으로 무덤을 도굴하는 끔찍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반쯤
미쳐있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남편과 살았다. 그녀는 언제든 바다로 나가기를 바랐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눈앞으로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튀어나오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머리가 복부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섰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머리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P.160>
그녀에게 삶은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나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지루한 시간의 순서대로 지나갈 뿐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죽음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도 삶은 신부에 의해서 기도문을 외워야지만 자신을 놓아줄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어릴 때부터 길러주던 후스띠나는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시끄러웠고 그 시끄러움에 대해 불평하는 한 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죽음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삶 어디에도 빼드로 빠라모는 없었다.
빼드로 빠라모는
그녀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신에 의해 그녀가 누구보다 끔찍하게 사랑받는 여자임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지울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키는 당사자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사나 산 후안의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뻬드로 빠라모가 영원히 풀지 못 할
숙제였다.<P.133>
책의 모든 순간을 관통하는 토지에 대한 개념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이제 갈 수도 없는 과거의 멕시코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주 낯선 풍경과 시장에서 로즈마리를 사 재단에 올리는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아마 한동안은 이 책의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몇 대에 걸친 전기를 읽는 것은 큰 인내를 가져야 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내가 몇 번이고 들었다 놓은 것도 이 문제이다. 가뜩이나
구조도 낯선데, 사람의 이름도 이게 이름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책이 재밌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어내며 느낀
점이다. 혹시 반복되는 독서에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참, 원래 작품해설은 읽지 않지만 워낙 어렵게 읽은 책이라 다른 사람의 느낌도 궁금해 읽다가 무릎을 쳤다.
.."롤포가 복잡한 구조를 통해 빼드로 빠라모를 창작흔 것은
분명하다"고 전재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법들을 적절히 조화시킨, 터무니 없는 어려움을 창조하기 위한 어설픈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테마가 명백한 혼돈을 요구하는 까닭"이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