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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대학시절 나는 NGO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광우병 파동 때도 나는 시청에 있었다. 의정활동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석했었으며, 정책홍보활동 등 여러 가지 일들도 해 봤다. 하지만 정치에는 젬병이었다. 아니, 정치 포비아 수준이었다. 07학번인 나는 여태껏 세 번의 대통령을 뽑았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만 돌아보면, 이번엔 정말 치열하게 공약도 살펴보고 정치도 돌아보고 했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 또래만 살펴봐도 그렇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나온 학과의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렇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유시민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아쉬움이었다. 대학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얼마나 오만했던가.
흔히 '어떤 것'을 지키고자 하는 쪽을 보수, '어떤 것'을 버리고자 하는 쪽을 진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속해있는 여당의 정책과 정치철학이 잘 반영되려면 여대야소의 국면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겪었다. 여대야소의 국면이 얼마나 우매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아이러니한 단어도 생겼다. 삼권분립이 강조되는 권력의 분산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난 대선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였다. 지나온 일들을 모두 곱씹지 않아도, 투표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시민들의 의식변화에서 알 수 있듯, 정치의 전성시대가 오고 있다. 과거 정권들이 그리고 집권 당들이 정치포비아를 주장하며, 국민들이 멀어지길 원했던 정치가 이제는 생활 속으로, 그리고 점점 더 젊은 군중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개념들을 확실히 잡는데 도움이 됐다. 물론 내가 유시민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정치를 풀어낸 이 책은 분명 대학시절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국가는 무엇인가?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 중 하나 "국가란 무엇인가." 그러나, 2016년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나라', '국가'는 과연 무엇일까? 아주 오랫동안 혼재하여 생각해 왔지만, 결국은 명확한 것은 국가는 그리고 정부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자가 쫓겨난다고 해서 정부 또는 국가가 반드시 함께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 혼자 쫓겨났지만 정부는 건재한 경우도 있었고, 정부가 무너졌지만 국가는 건재한 경우도 있었다. 국가와 정부, 국가와 군주를 구분하지 않은 홉스의 이론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P.41>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세속의 신이라고 불렀던 자본주의. 중세시대 절대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현대엔 많은 수의 세속의 신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국가일 것이다. 국가는 언젠간 소멸할 것이다. 다만 소멸하기 전까지는 더 나은 쪽으로 혹은 저물어 가는 쪽으로 이념과 이념을 건너가며 존재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했던 시대정신이 나폴레옹에서 대한민국의 촛불시민으로 옮겨오기까지 적다면 적은 시간이, 많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가는 분명 권력을 위탁받은 소수의 권력자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간다. 다만 한 가지, 유시민이 지적하는 것처럼 국가는 영원하지 않고, 권력은 더욱 짧은 수명을 갖는다. 과거 외부의 적 때문에 생긴 고대국가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국가는 또 다른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보다 많은 이해관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움직이며 진화 혹은 후퇴해 갈 것이다.
- 진보와 보수, 그 복잡 미묘함.
이번 대선이 재미있었던 점은 우리나라의 정치이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워보며 나는 어디에 가까운가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후보를 지지했지만 의외로 이 후보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고. 이 후보는 어떤 점이 눈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뭔가 속이 시원했고... 다섯 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과 한 달간의 정치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난 대선은 아마도 먼 훗날 현대사에서 가장 확실한 표본으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구꼴통이니, 입진 보이니, 좌파 빨갱이니... 알아듣기도 힘든 단어들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프레임을 씌우는 정치판을 보고 있자면, 가끔 '그래서, 보수는 무엇이고 진보는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기득권을 보수 변화를 꿈꾸는 세력을 진보라고 생각했던 내게 2016년은 참 많은 카테고리들을 만들어 줬다. 샤이보수, 진짜보수, 가짜진보... 따듯한 보수...
앞에서 대표적인 국가론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로 분류했다. (...)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울타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넘나들 수 없을 만큼 높지도 않다 <P.204>
물론 하나의 학문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념들을 카테고리화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념이 확실한 사람들끼리만 정당을 만들고 정책 운영을 한다면 정치판은 각자의 이념 아래 똘똘 뭉쳐 합의는커녕 대화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모든 현안들은 이익이 상충되어있고, 극단과 극단을 넘나드는 사상도 동일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공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성향이 보수쪽인지 진보 쪽인지 보다는 어떤 부분이 더 중요한가, 혹은 덜 중요한가를 따지게 된다. 향후의 정치는 이렇게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이념의 싸움보다는 현안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유시민 작가의 성향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는 중립을 지키며 쓰지 않았다. 그러려고 쓴 책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인가 이니 말이다.
진보와 보수는 맞물려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하나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P.205>
그는 책에서 몇 십 년간을 진보성향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념은 계속 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결국은 기득권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로 매끄러운 논점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지키는 것도 이토록 힘든데,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책을 쓴 사람도 그것을 원하고 책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한 책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패러다임은 이제 낡았다.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 국가는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
책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가장 놀란 점은 진보성향을 가진 작가의 책에서 가장 보수적인? 철학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의외의 인물, 칸트이다. 평생을 자신의 생활 반경에서 시계와 같은 삶을 산 그가 '네 마음이 보편적인 입법자'라는 말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약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확실히 일리가 있다. 칸트의 도덕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현대 세상에서 단언컨대 극 소수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한 정언명령대로 완벽하게 지키고 살려면, 아마도 수도원에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사막에서 닿지 않는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처럼 정치인들은, 아니 정치인을 넘어서 현대인들은 마음속에 한 명 이상의 철학자를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철인정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은 옳았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 인구와 영토가 커진 현대에는 많은 수의 지혜 있는 자들이 있다. 이 사람들 중에 어떤 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가?
책은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아마 한동안은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릴 것이다. 빠르게 전달되는 속보들에 가슴 두근두근하면서, 내가 뽑은 대통령을 응원하기도 하고, 아쉽게 낙선한 사람들이 어떤 행보를 하는지 관심을 갖고, 총선을 기다릴 것이다. 그 순간순간마다 몇 번이고 책에 대한 감정은 바뀌겠지만, 한동안 읽지 않았던 사회과학서를 들어 볼 시간이 온 것만 같다.
모든 국민이 각자의 국가론을 가진 세상.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각자 서있는 세상이라면 복잡한 이념과 이해관계의 다툼에도 목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멋지지 않을까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 본다. 국가는 세속의 신이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