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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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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 "~남". 현대사회에서 온라인은 또 다른 입법부이자 사법부이고, 행정부이다. 즉결심판. 조선시대에 혹시나 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세 번은 통찰하라는 법이 이미 시행됐는데,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심지어 표면에 드러난 몇 가지 문장으로만 모든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시대. 국물녀 사건 채선당녀 사건 이후로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로사회>를 접한 바로 다음 <투명사회>를 읽은 선택은 탁월했다. 사실 <피로사회>보다는 <투명사회>가 내 입맛에는 더 맞았고, 더 쉽게 읽었다. 새로운 통제사회의 도래. <투명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투명성에는 향기가 없다.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직접적인 반응과 욕구의 해소 역시 외설적이다. 프루스트에게 "즉각적 향락"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무언가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회상을 통해 나타난다. 아름다운 것은 지금 당장의 스펙터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빛, 혹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고요한 잔광, 시간이 남긴 인광이다. 사건과 자극의 빠른 교체는 아름다움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미는 머뭇거리며 더디게 찾아온다. 나중에 가서야 사물들은 아름다움의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인광을 발하는 시간의 층과 침전물들로 구성된다. 투명성은 인광을 발하지 못한다.<P.69-70>

아마 저자가 투명사회를 통해하고자 한 말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공개된 사회. 한없이 투명하기에 전부 비치지만 사실 비추기만 할 뿐 그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비춘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틀리다. "통과시킬 뿐" 투명에는 향기가 없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저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그런 정의를 내리고 나서 써 내려간 투명사회는 사실 책을 읽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 알아내기 충분했다.

 디지털파놉티콘. 현대사회는 랜선의 감시를 받고 있다. 온전하게 지어진 집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한낱 전기의 감시를 받는 사회. 문제는 그 전기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환장할 노릇이다. 우연히 기분이 좋지 않아 술 한잔하다가 가볍게 붙은 입씨름에 "술꼬장녀"가 될 수도 있는 사회이다. 투명한 사회. 투명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긍정성을 확 뒤집는 발언들이다.

 <피로사회>에 의하면 디지털 파놉티콘은 감시자가 만인일 수도 있지만  '나'일 수도 있다는 데서 더 치명적인 것이다.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아니라 가상도 없다. 진리도, 가상도 투명하지 않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와 이미지의 거대한 더미로 채운다 해도 공허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투명성도 눈을 밝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진다. 과다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P.85-86>


 모든 정보가 오픈되어잇는 사회.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정보사회이다. 클릭 몇 번이면 과거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알 수 있었던 정보들을 그저 읽기만 하면 되는 사회가 도래했다. 사실 나도 그 신문명의 즐거움을 수혜하고 있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보가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소비사회이므로. 하지만, '소모'되어가는 정보 속에서 '진리'는 있는가?

그 수많은 정보들 속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있고, 내가 작성해 나간 일기며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내 디지털'이웃'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 익사한다. 나르시시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P.77>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너무나 친밀하기 때문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너무 투명해서 그 속에서 익사당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당장 나도 그렇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언니에게 가끔 툭툭 반말을 건네는 나를 보면서 순간 움찔할 때가있다. '친밀감'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넘긴다. 가만 돌이켜보면 상대방은 동의한 적이 없다.

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책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니 까라며 최소한의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자꾸 약속을 잡고 움직인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코자 이런 말을 꺼냈지만 너무 친밀해진 현실 속에서 나는 점점 익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들이 오픈되어있는 투명성의 사회. 문득 들어보면 정말 공정한 사회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정보가 주어지고 누구든 알 수 있는 사회. 하지만 함정은 이곳에 있다. 투명사회의 투명 정치는 글에서 말하는 디지털심해에 갇혀 더 부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찌 보면 "상상계"에 불과한 온라인상에서 모든 '행동'과 '언론'이 진행되고, 정작 '현실세계'에서는 침묵하는 사회.

 연예인의 열애설이 터지고 결혼설이 터지고 문제가 발생하고. 과거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연예인의 욕을 했지만 요즘엔 혹시 정치판에 무슨 일이 터지지 않았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다들 알고 있다. '투명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을 옳지 못하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들은 모두 '온라인에서 자신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의 문제점을 이야기했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은 '상상계'이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온라인 역시 현실세계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긴 하지만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 버렸다. 공중이 사라져가고, 자기중심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경향만 더 강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어떤정치, 어떤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선거, 선거운동, 의회, 이념, 조합원 집회,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스마트정치, 선거용지를 좋아요 버튼으로 대체할 디지털 민주주의가 필요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의 정당이라면, 한때 정치의 지평을 이루었던 이념이 수많은 개별적 의견과 옵션으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대체 정당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모두 자기 자신만 대표한다면, 정치적 대표자들은 누구를 대표한단 말인가?<P.202-203>


<투명사회>는 비교적 읽기 쉽다. 그 말은 더 나의 생활과 와 닿아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 역시 디지털 세계에서 산다. 다다닥일 뿐이다. 그뿐. 나는 내가 기르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읽은 것들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저 '좋아요'혹은 단편적인 '댓글'로서 피드백을 받을 뿐이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며 내면에 가둬 둔 것들. 그리고 그 꽃을 기르면서 가지게 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그 내면의 성장. 이런 것들은 결코 온라인상으로는 공유 될 수없다.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는 나이도 운명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에서는 시간자체가 얼어붙어 잇다. 그것은 무시간적 매체다. 반면 아날로그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시달린다. "사진은 단지 (쉽게바스러지는) 종이하고만 운명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더 견고한 물질 위에 찍힌다 하더라도, 사멸의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사진은 작은 은가루의 싹에서 한순간 꽃피었다가 곧 늙어가기 시작한다. 빛과 습기에 공격당한 사진은 색이 바래고, 소진되고, 사라진다..."...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P.157>

그리고, 현대사회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모든 부정성이 사라진 "긍정 사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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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드 THAAD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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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색을 밝히는 것이 일반인이든 유명인이든 남녀를 그리고 노소를 막론하고 꺼려지는 세상. 공무원이 되길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그저 TV에 얼굴을 비추는 젊은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정치적인 이야기는 훌륭한 주제가 못된다. 푹 담가져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행정학과를 나왔다. 배우는 대부분의 과목들은 생긴지 200년이 채 안되는 학문이거나 정치학, 외교학 등등 신변 잡귀적인 학문들을 배우면서 주변에는 빨갛고 파란 녀석들이 득실득실한 곳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알고 있는 것만 말하며 살기는 너무 어렵다.'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는 아는 것만 말하기 너무 어렵다. 한 번 이야기를 꺼내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야 하고 이미 빨갛다고 판명이 난 사람은 빨간 이야기만 잔뜩 늘어놔야 하는 아이러니. 주로 나와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빨간 것은 빨개서 파란 것은 파래서 좋고 결국에는 빨강도 파랑도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정치색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확고하게 굳어버린 무언가는 없는 표류하는 사람이다.

 누구를 지지한다라는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어떤 정책은 지지한다, 혹은 어떤 것은 아무리 네가 좋다고 선전을 해도 등을 보이겠다 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거나 공격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참을 수 없을 때는 광화문에 나가기도 하고, 대자보도 많이 썼었다. 하얀 집에 편지도 보내보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도 해보고. 그러던 중 작년 싸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왠지 니가 좋아할 만한 소설이라고. 꼭 읽어보라고, 하지만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기가 겁났다. 솔직히 작년, 나는 많은 것들에 실망하고 있었고 싸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겁났다. 학과의 특성상 잘못된 혹은 잘 모르면서 자신의 색을 정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흘러내리는 지 너무나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제 뉴스에서 싸드 문제에 대한 내용이 잠깐 나온 적이 있다. 한.미간의 공식 비공식 논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정치뉴스. 그 짧은 뉴스 한 줄이 시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하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이제는 이 책을 읽어봐도 책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책을 잡았다.


몰입도의 정점에 있는 책. 그러나 너무나도 위험한 책이다.

정치적인 색이 없거나 혹은 그냥 막연하게 티비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흘려듣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하는 무서운 상상이 책의 줄거리 보다 먼저든다. 사실은 나도 그런 사람들과 하등의 다른 점이 없는 정치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전쟁이 필요하다.

중국은 전쟁을 할 수없다.

미국은 평택으로 미군 기지를 옮겼다.

일본은 자위대의 합법화를 통해서 미군의 전쟁을 지지했다

중국은 남한에게 싸드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쟁의 서막이 될 것이라 말한다

미국은 70년이 넘는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싶다면 거부하라 말한다.

북한은 인민공화국의 최후의 보루로서 중국과 미국의 완력 싸움의 완충적인 양국의 비글적인 존재로서,

어린아이 같지만 사실 신랄한 파이 싸움 중이다.


남한은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겠는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평택기지 이전 등 논픽션에서도 김진명의 싸드 속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비슷한 완력 다툼에 대한 이야기다. 픽션은 때론 논픽션이기도 하고 논픽션은 픽션보다 더 픽션 같다. 힘의 줄다리기 중에서, 어떤 선택도 옳지 못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군 기지가 철수하겠다는 이야기를 흘린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나도 아무 생각 없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자주 국가인 한국에 더 이상의 미군의 주둔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단순한 의미에서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미군 기지가 사라지고 그곳에 공원이 들어서고 거대한 관공서들이 들어서면서 올바른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교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고 외교학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국은 자주 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워낙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고 분명 싸드라는 김진명의 소설 안에는 논픽션이 교묘하게 녹아있다.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지지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소설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과연 이 사람 안전한 걸까 괜찮은 걸까 하고 안부를 먼저 걱정하게 되는 현 사태도 문제점이지만 아무튼 이 책은 정치적 성향이 전혀 없거나 흥미가 없는 사람이 접하기엔 위험한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런 사람들이 읽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둘 점은, 픽션은 반드시 픽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픽션 속으로 끌고 나오려면 보다 철저하게 흔들리지 않는 본인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거야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일이에요. 경제 위기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거지, 죽는다 죽는다 소리치면서 파멸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 지난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았던 것처럼요. 어쨌거나 미국 정부의 당시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P.241>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소. 한국에서 중국으로 민중봉기가 수출된 거지. 지금 중국은 온 사방이 비민주 국가로 둘러싸여 있소. 그러나 북한이 붕괴하면 중국은 세계에서 민주화 봉기를 가장 잘 일으키는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는 거요."
라운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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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글라스 아티초크 픽션 1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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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은데 너는 왜 울어?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책들이 좋다. 아니에느로가 그랬고, 헤르타뮐러의 <저지대>가 그렇듯이. 격한 어조로 격한감정을 노래하면서 울리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편견이 깨졌다. 등골이 서늘한 책 한 권. 사랑하고 애정하는 것들은 어느정도의 흠이 있어도 그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그런데 도저히 흠을 따질 수 없는걸 보면, 정말 단단히 빠지긴 빠졌나보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얼마전 박범신의 <은교>를 읽고 소재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고, 나에겐 불편한 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리뷰하는 <닥터글라스>는 그것보다 한 술 더 뜬 감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심지어 유명한 작가 한명 쉬이 떠오르지 않는 스웨덴의 소설. 그런데 왜 불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과 모든것이 반대인 책. 글쓴이는 한없이 시끄럽고 한없이 울부짖는다. 심지어, 일기체이다. 절대적인 한명의 작가가 한명의 시선에서 써 내려간 책.

처음에 아티초크출판에서 이 책을 내놓겠다 했을 때 어쩌면 진부한 한 문장이 나를 완벽하게 사로 잡았었다. "인생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정점을 찍는다. "고맙게도 햇빛은 애써 우리를 찾아 내려온다. 나무 아래 무덤까지"

 

그는 의사이다. 자신의 지휘를 만족하고 권력을 어느정도 다룰줄 아는 사람이다. 이상하게도 그는 유부녀나 그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만 끌린다. 일종의 여리여리함이 있는 여자. 그런 여자들만이 그의 눈에든다.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여자는 목사의 아내.

늘 그렇듯 소재는 간단명료하게 정리된다. 물론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이상의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는 없지만, 결말을 알고 보는 심리극은 재미가 없으니 소용없는 노릇이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쭉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 날 닥터글라스의 일기의 끝에서 소름돋아하고있는 나를 발견하게된다. 사실 거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에 들어온 그녀는, 의사인 나에게 모든것을 이야기한다. 목사인 남편과의 부부생활은 사실 강제적이며 자신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있다고.

도덕은 회전목마 같다는 느낌이 전에 없이 강렬했다. 이전에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 회전 주기가 몇 세기, 아니 영겁이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지금은 몇 분, 몇 초에 불과한 듯 했다. 나는 어지러웠다. 이 광기의 와중에 보이는 유일한 길잡이라고는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조심하시오, 목사!"<P.68>

닥터글라스는 갈등한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목사를 자신이 독살하리라.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그 마음은 점점 눈덩이 처럼 불어나 목사를 죽여야겠다는 생각까지 가는 그 과정이 소름돋는다. 한 편의 연극으로 꼭 상영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배우가 맡아야 하려나..ㅎㅎ 아무튼 이 이야기의 정점은 닥터글라스가 목사를 죽여야할지 말지를 두고 내면속의 세 사람(현재의 닥터글라스, 목사를 죽이고자 하는 닥터글라스, 목사를 죽이고싶지않은 닥터글라스)이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8월 7일. 혹시나 이 책을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꼭 저 부분을 읽어보고 선택해 보기를 바란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수많은 충동들의 종합체이다. 하지만 우리는 허구를 필요로 하며, 의지라는 관념보다 더 필요한 허구는 없다. 그러면 자, 내게 이 일을 행할 의지가 있을까? <P.138>

이 이야기가 왜 치열한 논쟁거리였는지 알 것 같다. 인간이 살면서 논쟁삼기 좋은 것들. 죽음, 사랑, 종교, 외로움, 살인, 낙태....모든것들이 다 있다.

심지어 한 인물의 '일기'라는 의식 속에 전부 있다. 최근에 쓰여진 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세련되어있다. 주제역시 아주 자극적인데, 아마 번역본이어서 더 현대에 적합하게 번역이 된걸까?

사람들은 사랑받기 원한다. 그러지 못하면 칭찬이라도 받기 원한다. 그것도 아닐 경우 두려움의 대상이 되길 원한다. 그마저 아닐 경우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라도 되기 원한다.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반응을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공백앞에서 불안해 한다. 우리의 영혼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접촉을 원한다.<P.105>

한 권의 책을 읽고 이렇게나 진이 빠지는 경우는 또 처음이다. 사실 쓰고싶은 말이 없다.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 질 뿐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구절만 잔뜩 필사하고 잔뜩 옮겨적어 놓는다. 닥터글라스는 왜 그의 인생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고 이야기 했을까?

모든 대답은 8월 7일에 있다.

가끔 혼자 생각하지만, 매일 잊어버리는 사실 중 하나는 사실은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끔 나는 나의 자아1번과 손잡고 어떤 일을 하기도하고, 자아2를 어딘가에 가두기도 한다. 나는 온전히 나의 인생을 맞잡지 않는다. 내 안에 있던 수많은 나 중에는 나의 인생의 대다수를 직격탄으로 맡는 녀석도 있고, 어린시절 어떤 일로 인해 이미 죽어버린 자아도 있을 것이다. 가만 보면 정신분열증 같은 이야기이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다.

타인과의 투쟁보다 내 내면과의 투쟁이 더 힘든 것이 아닐까. 누구나 그렇듯이.

소설의 장르를 나누는 것에 대해 애매모호하다고 느꼈었는데, 이렇게도 명쾌하게 이런 소설이 심리소설이라는 장르구나 하는 것도 처음이다.

 

광증에 불타버린 한 남자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면서 순간순간에 범행에 동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그냥 글라스의 의식에 파묻혔다. 그래! 괜찮아! 저질러!!! 버려!!! 이러면서...=_=.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흥이고 하는 성격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그냥 모든 것들 다 필요없고,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덮고나니 딱 한가지 생각이 남는다. 나는 그래서 나의 그 약을 어디에 감추고 있는걸까.

닥터 글라스가 목사에게 건네고자 했던 그 약, 사실은 어느 순간에 내가 먹고자했었던 그 약. 나는 어디에 숨기고 있을까. 이 책이야말로 정말 밤에 읽어야 할 소설이다. 모든 마음의 문을 열어서. 닥터글라스가 되어보면 나도 모르게 그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자꾸만 문이 잠겨있는지 확인할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 산 자, 죽은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의 의견으로 형성된 엄청난 기압이 저 문밖에 쌓이다가 마침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나를 뭉개고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위험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P.186>

방금 첨탑 뒤에서 나온 달은 슬픈 표정이다. 이목구비가 형언하기 힘든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뭉그러지고 침식된 것 같아 보인다. 가엾어라, 너는 왜 거기에 앉아있지? 위조범으로 몰렸어? 햇빛을 위조했다고?
사실 그것은 굉장한 범죄다. 그 범죄가 저질러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P132>

종말이야 언제가 되었든 어차피 오는 것이니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점점 더 현실이 꿈이 되고있다. 어쩌면 원래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글라스라는 이름의 의사로 나오는 꿈에 그레고리우스라는 목사가 등장한 건지도 모른다. 이 꿈에서 깨면 나는 거리 청소원일지도, 아니면 교회의 주교일지도, 어린아이나 개일지도....혹시 모르지...<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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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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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가장 어려운 개념이면서 어디에서나 있는. 가장 감성적이면서도 가장 계량적인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정리하고자 했고, 그만큼 정돈이 안되는 개념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사랑'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에로스'는 개념적으로는 핀트가 어긋 나 있을 지 모르나, 상통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려고한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하지만 가장 확실한 단어.

한병철의 책은 '피로사회'와 '심리정치', '투명사회'를 읽었었는데, 가장 최근에 출판된 '에로스의 종말'을 우연히도 접하게 되었다.

아마 이런 장르의 책을 읽는 즐거움은 작가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는 것도 있겠지만, 동의할 부분들에 대해서는 격한 동의를 그래도 이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날이 서지 않은 의문점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동시대를 사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즐거움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은 읽어본 권수들 중 가장 얇으며, 가장 나중에 출판된 만큼 전 작들의 개념들을 알면 훅훅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의외로 반응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투명사회'의 익명성이나, '피로사회'에서의 긍정성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온 작품이라 더 그럴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현대의 긍정사회에서는 타자와 나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부정성이 소거되어 나르시즘화 되었기때문에, 에로스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왜 종말을 고하게 되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현대사회', '자본주의'라는 틀에 갇혔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겠지만, 이미 젊은세대는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거나, 혹은 반대로 '연애만 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음에서 오는 타협점 일 것이다. 얼마전 칼럼 하나를 읽었는데, 현대 시대의 청년은 건국이래 최초로 '전 세대'보다 '가난할 것'이라고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물론 절대 단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불과 몇 십년전에는 아버지 혼자 벌어서 온 가족이 먹고 살던 시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 수없는 시대로, 또 어머니도 함께 벌어야 되는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청년들도 벌어야 되는 시대로 점차 변해왔다. 그 속에서 의식 역시 천천히 변해왔을 것이다. 에로스는 정말 종말을 고한 걸까, 아니 우리시대에 에로스는 정말 있었을까? 

 유행처럼 사용하던 단어,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금사빠'라는 단어가 있었다.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뜻한 단어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은 사랑도 인스턴트로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느끼는 호르몬도 2년은 간다는데 3개월만에 결혼했다는 사람도 허다하거니와 그 사람을 아는데 한달이면 전부 다 되는 세상인가보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재로한다. 연인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아포토스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멜랑콜리아/P.18>

더 이상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정말 당연히도 '너와 나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카톡에 답장이 늦거나, 내가 모르는 타인을 만나거나, 서로 소원해질 때 '사랑이 식었음'을 느낀다. 구식 발상일 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핸드폰이 없었다면, 통신수단이 없었다면 좀 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부정성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카톡을 보낸 지 삼초만에 오는 짧은 답장과 최소한 일주일은 걸리는 우편사이의 괴리감. 그 만큼이나 책에 나온 '타자가 사라진다'는 단어를 설명하기에 명료한 것은 없다. 이미 나의 삶은 모든 사이버공간에서 혹은 모든 곳에서 공유되고 타인과 가까워져 버렸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의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있었던 것의 박물관화는 과거를 파괴한다. 과거는 반복가능한 현재가 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부정적 특성을 상실한다.<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사실 저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있었던 것의 박물관 화'. 현대인은 과거를 흘러가게 두지 못한다. 최근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포함한 타인의 과거의 흔적을 찾는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회에서 나의 연인의 과거는 더 이상 연인에게 들어야하는 달큰한 말이 아니다. 혹시 과거에 몹쓸짓을 하진 않았는지. 과거의 연인은 누구였는지 알아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데이트 세번하고 손잡고 한번 더 만나면 포옹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이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데이트에 나가는 이유는 그 사람과 뭘했는지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수단정도 일 지도 모르겠다. 한정되어있는 친한 친구들에게만 나의 연애를 조심스럽게 말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번호만 안다면 거래처의 사장님도, 한번 스쳐지나간 핸드폰 가게 사원도 나의 연애를 내 카톡 프로필 사진만으로 알 수 있는 시대. 현대의 사랑은 '소비'를 동반한다. 책과의 대화가 잘 끝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현대의 사랑은 과거의 사랑과 다르다. 사실 과거의 사랑의 개념은 멸종했고, 새로운 종의 사랑이 진화의 결과로 나타났는지도. 그 진화의 끝이 또 다른 종말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겠지만.


과잉과시성은 문턱과 경계의 해체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투명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외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느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환상/P.80>

 글쎄, 생각보다 책은 짧고 어쩌면 싱겁다고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 <국사> 교과과정을 생각해보면, 물론 지금은 다르게 배울 수도있겠지만 나라를 시대별로 나누고, 국가별로 나눠서 그 나라의 정치를 배우고 그 후에 경제에 대해 배운 뒤 사회문화현상에 대해서 배웠었다. 한병철의 책도 순서대로 심리정치, 투명사회, 피로사회를 읽고 난 뒤라서 어쩌면 이 책이 싱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이 사람이 <문화>에 대한 책을 내 주기를 희망해 본다.

철학가의 이름 석자가 무거운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철학자들의 이론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입혀내고, 이번 세대가 아닌 후에 남을 세대들을 위해 남겨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비단 이것은 철학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록자들에게 해당 될 것이다. 당대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기때문에 욕먹고, 뭘 그런 신변잡기적인 것들에 대해서 서술하느냐는 이야기를, 후대 사람들에게는 혹시 이 기록의 신빙성은 어떤지 아니면 잘 된기록인지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너무 잘 아는 현상들을. 이 시대 이 사람들의 시대상을 '과잉긍정의 시대'나, 너무 투명하여 깊이를 알 수 없어진 '투명사회'라고 정의한 작가의 의견이 신선하고 와닿는다.

 

아토포스 : '아토피아'라는 말의 형용사형. 분류할 수 없고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의미를 지닌 것.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표현은 아마도..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나와는 완벽히 다른 '너', 그리고 너에게있어서 완벽히 다른 '나' 이렇게 둘이서 만들어 낸 세계는 극적으로 독창성을 지닐 수 밖에 없고 유일무이한 두가지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영역은 그 둘의 영역과는 따로 또 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타자가 사라지지 않고 타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실 예전에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은 적은 있는데 아토포스에 대한 담론이 나온다는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한번 더 읽고 싶지 않은데 오늘 배운 이 단어가 궁금하다...ㅋㅋ


동일자 : 이 역시 철학책을 읽으면 너무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데, 아직도 어렵다. 어떤의미에서 나는 타인이기도하고 다른 사람의 어떤점은 나와 닮았다. 이것은 단순히 A=A를 의미하는 수학적인 의미의 '같음'이 아니다. 흔하게 쓰는 말. "A를 B와 동일시 하라"라는 말은, A와 B 모두가 A라는 말이 아니라 같은 점이 있다는 뜻이 듯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동일자의 지옥'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러한 속성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몇가지 모르는 단어들을 접하고나니, 철학개론서를 한번 보는 것이 간절해 졌다. 사실 사두고 던져놓은 책들이 많다. 향연이라던가, 향연이라던가, 향연이라던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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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다니엘 2016-01-0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책인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창배 2016-02-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러우면 어러운데로 한번은 접해 보면 응근슬적 진맛이 마와요.

이전숙 2016-02-27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쿠바여행중에 비내리는 날 정말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피로사회로 피로했었던 것이 잊혀지더군요 ㅋㅋㅋ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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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준책.

내가 자주 가는 작은 도서관에는 민음사 시리즈를 쭉 진열해 두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도서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은 하지 않는지 비교적 새 책을 새 느낌으로 빌려볼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책을 빌리러 가서는 얇고 만만해 보여서 집어왔던 책 <설국>.

그 눈 내린 일본의 시골마을이 눈에 잡히는 듯했다.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글.

사실 내용은 별거 없다. 막장이라면 막장일,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 마지막은 전형적인 일본 소설의 말로이다. 하지만 그런 별거 없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 풍경의 묘사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영화 같은. 그런 소설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시작> 

시작부터, 정말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눈의 고장. 내가 아주 어릴 적 나의 할머니는 광주에 사셨었는데 전깃불이 다 꺼진 초가집에 눈이 내리면 달빛이 스러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이 생각나면서 첫 문장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니. 작가도 작가지만 번역한 사람도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인이 아닐까 싶다.


<설국>은 시마무라의 사랑 이야기라고 압축해 볼 수 있다. 기혼자의 사랑 이야기. 여행을 떠난 설국에서 그가 사랑하게 된 게이샤 고마코와 또 다른 마음을 준 여인 유키오. 그 아름다운 대자연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사랑 이야기. 그런 이야기이다. 흰색과 대비되는 사랑 이야기가 계속 표현되는 풍경 속에서 정말 '아무 일도 아닌 듯' 펼쳐져 간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들이 검은데도 불구하고 어찌 된 셈인지 온통 영롱한 흰 눈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그러자 산들이 투명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늘과 산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P.40-41>

 시마무라가 고마코에게 느끼는 감정선을 따라 조화롭고 평화롭던 밤 풍경은 순간 조화를 깨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단순히 '어두운 밤', '눈 내린 밤'을 저렇게 표현해 낼 수 있다는데 감탄하며 일본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밤 풍경을 상상해 보게 된다. 사실 시마무라의 시답지 않은 사랑 이야기는 이미 저 풍경에 압도되어 '어디까지 진행했었더라'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잔잔하고 평온한 삶. 사실은 격정적인 삶일지라도 대 자연의 안에서, 그저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아무리 아등바등 살더라도 저쪽 먼 산에 걸린 구름만도 못한 삶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되는 표현들이 많았다. 그저 예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기에 책에서 사용된 표현은 뭔가 얄궂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ㄴ다. 옛 책에 그렇게 적혀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시마무라가 아침 이부자리에서 단풍객 우타이를 들은 그날, 첫눈이 내렸다. 올해도 벌써 바다와 산이 울렸을까.<P. 137>

눈이 나리는 날. 눈의 나라에 첫눈이 내리는 그날 시마무라가 혼자 여행을 다니며 고마코를 만나고 요코를 만나는 날. 눈이 내렸다. 그러면 시마무라는 다시 가야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계속 계속 해왔던 생각은 이 사람이 요코와 고마코를 사랑한 시마무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눈의 왕국에 대한 아름다움을 계속 써 줬으면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치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P.143>

시마무라가 고마코의 삶을, 아름다움을 인정하던 날의 은하수. 그리고 요코의 죽음의 화염이 있던 날의 그 은하수는 그 깊이를 어떻게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읽어내려가곤 하는 내가 정말 온 집중을 다해서 그 작은 그림자를 거꾸로 비추는 은하수를 상상하게 한 소설이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마지막>

 

사실, 집중하여 읽는다면 두 시간 안에 끝낼 수도 있는 분량이 짧은 글이다. 그래서 민음사 시리즈 중에서도 쭉 바라보며 만만하다 싶어 꺼내든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표현하며, 인물들의 생각하며. 잔잔한듯한 잔인한 평온함이 오래도록 질질 끌어내리게 하는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만 되뇌게 하는 책. 사실 이런 책은 번역이 엄청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혹시 다른 번역본이 있는지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짧은 일본어를 더 배워서 원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만든 책이었다. 오랜만에 힐링 되는 느낌.

 

 

 

http://blog.naver.com/skytjdah/22039831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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