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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아마도, 가장 어려운 개념이면서 어디에서나 있는. 가장 감성적이면서도 가장 계량적인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정리하고자 했고, 그만큼 정돈이 안되는 개념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사랑'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에로스'는 개념적으로는 핀트가 어긋 나 있을 지 모르나, 상통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려고한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하지만 가장 확실한 단어.
한병철의 책은 '피로사회'와 '심리정치', '투명사회'를 읽었었는데, 가장 최근에 출판된 '에로스의 종말'을 우연히도 접하게 되었다.
아마 이런 장르의 책을 읽는 즐거움은 작가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는 것도 있겠지만, 동의할 부분들에 대해서는 격한 동의를 그래도 이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날이 서지 않은 의문점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동시대를 사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즐거움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은 읽어본 권수들 중 가장 얇으며, 가장 나중에 출판된 만큼 전 작들의 개념들을 알면 훅훅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의외로 반응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투명사회'의 익명성이나, '피로사회'에서의 긍정성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온 작품이라 더 그럴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현대의 긍정사회에서는 타자와 나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부정성이 소거되어 나르시즘화 되었기때문에, 에로스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왜 종말을 고하게 되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현대사회', '자본주의'라는 틀에 갇혔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겠지만, 이미 젊은세대는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거나, 혹은 반대로 '연애만 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음에서 오는 타협점 일 것이다. 얼마전 칼럼 하나를 읽었는데, 현대 시대의 청년은 건국이래 최초로 '전 세대'보다 '가난할 것'이라고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물론 절대 단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불과 몇 십년전에는 아버지 혼자 벌어서 온 가족이 먹고 살던 시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 수없는 시대로, 또 어머니도 함께 벌어야 되는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청년들도 벌어야 되는 시대로 점차 변해왔다. 그 속에서 의식 역시 천천히 변해왔을 것이다. 에로스는 정말 종말을 고한 걸까, 아니 우리시대에 에로스는 정말 있었을까?
유행처럼 사용하던 단어,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금사빠'라는 단어가 있었다.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뜻한 단어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은 사랑도 인스턴트로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느끼는 호르몬도 2년은 간다는데 3개월만에 결혼했다는 사람도 허다하거니와 그 사람을 아는데 한달이면 전부 다 되는 세상인가보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재로한다. 연인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아포토스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멜랑콜리아/P.18>
더 이상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정말 당연히도 '너와 나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카톡에 답장이 늦거나, 내가 모르는 타인을 만나거나, 서로 소원해질 때 '사랑이 식었음'을 느낀다. 구식 발상일 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핸드폰이 없었다면, 통신수단이 없었다면 좀 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부정성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카톡을 보낸 지 삼초만에 오는 짧은 답장과 최소한 일주일은 걸리는 우편사이의 괴리감. 그 만큼이나 책에 나온 '타자가 사라진다'는 단어를 설명하기에 명료한 것은 없다. 이미 나의 삶은 모든 사이버공간에서 혹은 모든 곳에서 공유되고 타인과 가까워져 버렸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의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있었던 것의 박물관화는 과거를 파괴한다. 과거는 반복가능한 현재가 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부정적 특성을 상실한다.<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사실 저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있었던 것의 박물관 화'. 현대인은 과거를 흘러가게 두지 못한다. 최근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포함한 타인의 과거의 흔적을 찾는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회에서 나의 연인의 과거는 더 이상 연인에게 들어야하는 달큰한 말이 아니다. 혹시 과거에 몹쓸짓을 하진 않았는지. 과거의 연인은 누구였는지 알아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데이트 세번하고 손잡고 한번 더 만나면 포옹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이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데이트에 나가는 이유는 그 사람과 뭘했는지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수단정도 일 지도 모르겠다. 한정되어있는 친한 친구들에게만 나의 연애를 조심스럽게 말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번호만 안다면 거래처의 사장님도, 한번 스쳐지나간 핸드폰 가게 사원도 나의 연애를 내 카톡 프로필 사진만으로 알 수 있는 시대. 현대의 사랑은 '소비'를 동반한다. 책과의 대화가 잘 끝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현대의 사랑은 과거의 사랑과 다르다. 사실 과거의 사랑의 개념은 멸종했고, 새로운 종의 사랑이 진화의 결과로 나타났는지도. 그 진화의 끝이 또 다른 종말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겠지만.
과잉과시성은 문턱과 경계의 해체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투명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외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느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환상/P.80>
글쎄, 생각보다 책은 짧고 어쩌면 싱겁다고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 <국사> 교과과정을 생각해보면, 물론 지금은 다르게 배울 수도있겠지만 나라를 시대별로 나누고, 국가별로 나눠서 그 나라의 정치를 배우고 그 후에 경제에 대해 배운 뒤 사회문화현상에 대해서 배웠었다. 한병철의 책도 순서대로 심리정치, 투명사회, 피로사회를 읽고 난 뒤라서 어쩌면 이 책이 싱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이 사람이 <문화>에 대한 책을 내 주기를 희망해 본다.
철학가의 이름 석자가 무거운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철학자들의 이론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입혀내고, 이번 세대가 아닌 후에 남을 세대들을 위해 남겨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비단 이것은 철학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록자들에게 해당 될 것이다. 당대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기때문에 욕먹고, 뭘 그런 신변잡기적인 것들에 대해서 서술하느냐는 이야기를, 후대 사람들에게는 혹시 이 기록의 신빙성은 어떤지 아니면 잘 된기록인지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너무 잘 아는 현상들을. 이 시대 이 사람들의 시대상을 '과잉긍정의 시대'나, 너무 투명하여 깊이를 알 수 없어진 '투명사회'라고 정의한 작가의 의견이 신선하고 와닿는다.
아토포스 : '아토피아'라는 말의 형용사형. 분류할 수 없고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의미를 지닌 것.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표현은 아마도..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나와는 완벽히 다른 '너', 그리고 너에게있어서 완벽히 다른 '나' 이렇게 둘이서 만들어 낸 세계는 극적으로 독창성을 지닐 수 밖에 없고 유일무이한 두가지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영역은 그 둘의 영역과는 따로 또 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타자가 사라지지 않고 타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실 예전에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은 적은 있는데 아토포스에 대한 담론이 나온다는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한번 더 읽고 싶지 않은데 오늘 배운 이 단어가 궁금하다...ㅋㅋ
동일자 : 이 역시 철학책을 읽으면 너무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데, 아직도 어렵다. 어떤의미에서 나는 타인이기도하고 다른 사람의 어떤점은 나와 닮았다. 이것은 단순히 A=A를 의미하는 수학적인 의미의 '같음'이 아니다. 흔하게 쓰는 말. "A를 B와 동일시 하라"라는 말은, A와 B 모두가 A라는 말이 아니라 같은 점이 있다는 뜻이 듯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동일자의 지옥'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러한 속성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몇가지 모르는 단어들을 접하고나니, 철학개론서를 한번 보는 것이 간절해 졌다. 사실 사두고 던져놓은 책들이 많다. 향연이라던가, 향연이라던가, 향연이라던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