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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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 "~남". 현대사회에서 온라인은 또 다른 입법부이자 사법부이고, 행정부이다. 즉결심판. 조선시대에 혹시나 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세 번은 통찰하라는 법이 이미 시행됐는데,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심지어 표면에 드러난 몇 가지 문장으로만 모든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시대. 국물녀 사건 채선당녀 사건 이후로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로사회>를 접한 바로 다음 <투명사회>를 읽은 선택은 탁월했다. 사실 <피로사회>보다는 <투명사회>가 내 입맛에는 더 맞았고, 더 쉽게 읽었다. 새로운 통제사회의 도래. <투명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투명성에는 향기가 없다.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직접적인 반응과 욕구의 해소 역시 외설적이다. 프루스트에게 "즉각적 향락"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무언가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회상을 통해 나타난다. 아름다운 것은 지금 당장의 스펙터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빛, 혹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고요한 잔광, 시간이 남긴 인광이다. 사건과 자극의 빠른 교체는 아름다움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미는 머뭇거리며 더디게 찾아온다. 나중에 가서야 사물들은 아름다움의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인광을 발하는 시간의 층과 침전물들로 구성된다. 투명성은 인광을 발하지 못한다.<P.69-70>

아마 저자가 투명사회를 통해하고자 한 말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공개된 사회. 한없이 투명하기에 전부 비치지만 사실 비추기만 할 뿐 그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비춘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틀리다. "통과시킬 뿐" 투명에는 향기가 없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저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그런 정의를 내리고 나서 써 내려간 투명사회는 사실 책을 읽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 알아내기 충분했다.

 디지털파놉티콘. 현대사회는 랜선의 감시를 받고 있다. 온전하게 지어진 집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한낱 전기의 감시를 받는 사회. 문제는 그 전기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환장할 노릇이다. 우연히 기분이 좋지 않아 술 한잔하다가 가볍게 붙은 입씨름에 "술꼬장녀"가 될 수도 있는 사회이다. 투명한 사회. 투명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긍정성을 확 뒤집는 발언들이다.

 <피로사회>에 의하면 디지털 파놉티콘은 감시자가 만인일 수도 있지만  '나'일 수도 있다는 데서 더 치명적인 것이다.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아니라 가상도 없다. 진리도, 가상도 투명하지 않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와 이미지의 거대한 더미로 채운다 해도 공허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투명성도 눈을 밝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진다. 과다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P.85-86>


 모든 정보가 오픈되어잇는 사회.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정보사회이다. 클릭 몇 번이면 과거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알 수 있었던 정보들을 그저 읽기만 하면 되는 사회가 도래했다. 사실 나도 그 신문명의 즐거움을 수혜하고 있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보가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소비사회이므로. 하지만, '소모'되어가는 정보 속에서 '진리'는 있는가?

그 수많은 정보들 속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있고, 내가 작성해 나간 일기며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내 디지털'이웃'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 익사한다. 나르시시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P.77>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너무나 친밀하기 때문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너무 투명해서 그 속에서 익사당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당장 나도 그렇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언니에게 가끔 툭툭 반말을 건네는 나를 보면서 순간 움찔할 때가있다. '친밀감'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넘긴다. 가만 돌이켜보면 상대방은 동의한 적이 없다.

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책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니 까라며 최소한의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자꾸 약속을 잡고 움직인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코자 이런 말을 꺼냈지만 너무 친밀해진 현실 속에서 나는 점점 익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들이 오픈되어있는 투명성의 사회. 문득 들어보면 정말 공정한 사회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정보가 주어지고 누구든 알 수 있는 사회. 하지만 함정은 이곳에 있다. 투명사회의 투명 정치는 글에서 말하는 디지털심해에 갇혀 더 부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찌 보면 "상상계"에 불과한 온라인상에서 모든 '행동'과 '언론'이 진행되고, 정작 '현실세계'에서는 침묵하는 사회.

 연예인의 열애설이 터지고 결혼설이 터지고 문제가 발생하고. 과거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연예인의 욕을 했지만 요즘엔 혹시 정치판에 무슨 일이 터지지 않았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다들 알고 있다. '투명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을 옳지 못하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들은 모두 '온라인에서 자신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의 문제점을 이야기했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은 '상상계'이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온라인 역시 현실세계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긴 하지만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 버렸다. 공중이 사라져가고, 자기중심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경향만 더 강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어떤정치, 어떤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선거, 선거운동, 의회, 이념, 조합원 집회,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스마트정치, 선거용지를 좋아요 버튼으로 대체할 디지털 민주주의가 필요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의 정당이라면, 한때 정치의 지평을 이루었던 이념이 수많은 개별적 의견과 옵션으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대체 정당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모두 자기 자신만 대표한다면, 정치적 대표자들은 누구를 대표한단 말인가?<P.202-203>


<투명사회>는 비교적 읽기 쉽다. 그 말은 더 나의 생활과 와 닿아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 역시 디지털 세계에서 산다. 다다닥일 뿐이다. 그뿐. 나는 내가 기르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읽은 것들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저 '좋아요'혹은 단편적인 '댓글'로서 피드백을 받을 뿐이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며 내면에 가둬 둔 것들. 그리고 그 꽃을 기르면서 가지게 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그 내면의 성장. 이런 것들은 결코 온라인상으로는 공유 될 수없다.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는 나이도 운명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에서는 시간자체가 얼어붙어 잇다. 그것은 무시간적 매체다. 반면 아날로그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시달린다. "사진은 단지 (쉽게바스러지는) 종이하고만 운명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더 견고한 물질 위에 찍힌다 하더라도, 사멸의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사진은 작은 은가루의 싹에서 한순간 꽃피었다가 곧 늙어가기 시작한다. 빛과 습기에 공격당한 사진은 색이 바래고, 소진되고, 사라진다..."...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P.157>

그리고, 현대사회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모든 부정성이 사라진 "긍정 사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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