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6-117

너를 좋아하기까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는지. 너를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지. 널 알아보려고 내가 그동안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읽어 온 것만 같다고 섣불리 믿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참고 자료가 모자란지 모른다고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듯, 너는 아직 누구도 쓰지 않은 얼굴이니까. 너의 아름다움은 사실 어느 이야기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일 테니까.
우리는 각자 고유하고 무수히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같은 얼굴을 발견하기란 오히려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얼굴이든 그래서 조금 생소할 것이다. 그 얼굴들이 가진 생소한 아름다움을 늦지 않게 알아채는 연습을 지치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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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너무 눈에 띄기 싫어하는 동시에 너무 눈에 띄고 싶어서 경직된 초등학생이었다. 자리에 조용히앉아 교실의 아이들을 여러 방식으로 분류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곤했다. 그 방식 중 하나는 어른이 골라준 옷을 입고 오는 부류와 자기가 고른 옷을 입고 오는 부류를 나누는 것이었다. 옷이 얼마나 많은지와도 상관없었고 얼마나 좋은 옷인지와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애와 모르는 애가 있었다. 그걸 모르는 애는 남에 대해서도 뭘 모를 게 분명했다. 나는 적어도 자기 옷을 직접 골라 입고 등교하는 애랑 놀고 싶었다. 그 옷이 우스꽝스럽대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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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6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세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 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관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닐까.
생 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p.312

몽마르트는 소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경제지리학적 현상의 발상지일지도 모른다. 이 언덕의 땅값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둥지가 되기에는 너무 높아졌다. 테르트르 광장의 풍경도 그 사실을 보여 주었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광장을 주변 레스토랑과 맥줏집에서 깔아둔 야외 탁자가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협회에 속한 화가들은 가장자리 나무 그늘 아래 화구를 폈고 뜨내기 화가들은 광장 주변을 배회하다가 고객을 잡으면 길가에 서서 초상화를 그렸다. 예술의 도시라고들 하는 파리, 그런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테르트르 광장도 자본주의적 경쟁의 압력에서 풀려난 곳은 아니었으며 낭만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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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p.213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p.185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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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3

종교란 하늘나라에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우리가 버리게 될 때,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종교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발명품은 오늘날 까지 지속되는 두 가지 필요성 -그러나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몸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직업상의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에 대처해야 할필요성이다. 하느님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몸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직업상의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에 대한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하느님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여러 가지 급박한 이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해결책을 촉구하고 요구한다. 마태복음 제14장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가 과학적으로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넌지시 암시해 줄 경우에도 사라져버리지 않을 어떤 해결책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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