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씨의 <소설가가 되어서〉에서 한 말 중에 "반항하려고 해도 반항할만한 것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현재의 많은 젊은이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나의 젊은 시절, 그리고 무라카미 씨의 젊은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비교적 쉽게 ‘반항할’ 상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체제‘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반체제‘의 형태를 취하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체제’나 ‘반체제’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지요. 최근에는 ‘반체제‘ 운동에 관여해 보았자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래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체제’를 분명히 규정하고 그 반대의 ‘반체제’를 생각하는 방식은 ‘체제’ 속에 본질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의 접근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깊이가 없어요.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약해집니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의 본보기로 무라카미 씨가 해온 일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체제에 반대하는 반항이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개척해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 스타일, 생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거죠. 도식적으로 생각한 반항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져 쉽게 식습니다.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쳐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여기서 ‘작품’이란 예술 작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자체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p.40-41>
픽션의 힘은 강하고 넓은 길은 열려 있다.
최근 들어 소설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여기서도 말한 것처럼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이외의 미디어가 소설을 뛰어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의 총량이 소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전달 속도도 소설에 비해 엄청나게 빠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대부분의 미디어는 소설이라는 기능까지도 자기 기능의 일부로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래적인 인식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저는 소설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는 오히려 그 느린 대응성과 적은 정보량, 수공업적인 고생(혹은 어리석은 개인적 영위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한 소설은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경과해서 그런 대량의 직접적인 정보가 썰물이 빠지듯 빠져나갔을 때 비로소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거대한 망상을 품고 있을 뿐인 한 가난한 청년(혹은 소녀가 맨주먹으로 세계를 향해 성실하게 외치려 할 때, 그것을 그대로 물론 그 혹은 그녀에게 행운이 있을 경우이지만 받아들여줄 만한 매체는 소설밖에 없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문학이라는 기성의 미디어 인식에 의해 성립된 산업의 형태와 그것에 의존해 살아온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픽션은 결코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외치려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길이 넓어진 것이 아닐까요? (무라카미) <p.115>
1960년대의 폭력성과 현대의 폭력성의 차이
생각해보면 1960년대는 기묘한 시대였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면서 동시에 폭력이 존재했고 그 모두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극히 일반적인 것처럼 여겨졌지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랑과 평화’는 ‘그 밖의 것’에 대한 격렬한 반항과 투쟁을 뿌리 삼아 존재한 사물의올바른 모습이었어요. 마치 영화 〈이지 라이더>의 마지막 장면처럼요. 물론 그것은 최후의 순간이 오면 힘에 의해 쓰러질 숙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폭력이 환기하는 아드레날린의 냄새를 또렷이 맡았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그 때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1960년대의 폭력은 대부분 투쟁이나 저항을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는 둘째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알기 쉬운 미학 같은 것이있었습니다. 오에 씨가 당시에 썼던 이야기는 대부분 그런 종류의 폭력성이 담긴 이야기였으며, 그 아드레날린 냄새는 젊은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들였지요. 그러나 지금의 폭력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전이 끝난 후에 일어난 전쟁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폭력성은 국지전화, 분파화 되어 커다란 방향이란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드레날린의 냄새가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이야기 속에 도입할 필요가있을 것 같습니다. 말로 "이렇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써 말입니다. (무라카미).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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