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세트 - 전9권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김난주 외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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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펀딩 참여합니다. 설레고 기대됩니다. 좋음 책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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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요범이 남긴 4가지 교훈, 『요범사훈(了凡四訓)」. 이 책은 400년 넘게 운명을 고치는 비법이 담긴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읽혔다.
어떻게 해야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직업운이나 금전운, 혹은 결혼운이지만 실제로 바꿔야 할 것은 작은 행동에 불과하다. 이런 이치가 ‘사행습인운(思行習人運)‘이라는 말에 요약되어 있다.
"생각(思)이 바뀌면 행동(行)이 바뀌고, 행동(行)이 바뀌면습관(習)이 바뀌고, 습관(習)이 바뀌면 인생(人)이 바뀌고, 인생(人)이 바뀌면 운명(運)이 바뀐다."
그렇다면 원요범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바꾸라고 가르쳤을까. 『요범사훈』에는 3가지 비법이 나와 있다. ...첫 번째 비법은 행동 수칙을 작성하고 지키는 것이다. ...두 번째 비법은 인과 관계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결과 생각)...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법은 기분을 고양시키는 것이다(긍정적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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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인연에는 3가지가 있다. 시작하는 줄도 모른 채 어느새 깊숙이 들어와버린 인연이 있고, 시작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인연이 있다. 그리고 시작할 인연이 없었지만 작정하고 시작한 인연이 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을 에워싼 세상이 톱니바퀴처럼 잘 들어맞아서 인생이 자연스럽게 잘 풀리기를 바란다. 시절 인연과 사람 인연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덕스럽고 기다림은 긴데 귀한 삶은 너무도 짧다. 그렇기에 인연이 다가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을때에도 먼저 운동화 끈부터 묶는 이들이 있다. 자연스레 시작하든, 어쩔 수 없이 시작하는, 작정하고 시작하든, 내딛고 나면 같은 시작임을 그들은 안다.
작정(作定)이란 지어서(作) 정한다(定)는 뜻이다. 가보고 싶은 길이 있다면 허락을 구하지 말고 성공을 셈하지 말고 그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지어 정하기를, 운동화 끈을 묶는 일부터 출발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아무 이유가 없어도시작할 수 있는 존재니까.

사람은 약하다. 열흘 동안 매일 한 걸음씩 전진하더라도 하루 만에 열 걸음을 후퇴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은 나아질 수 있다. 한 번 연습하면 한 번 좋아지고 한 번 단련하면 한 번 강해진다. 비록 미약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어제보다 나아질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그것이 분명한 까닭에 우리는 삶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노력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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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씨의 <소설가가 되어서〉에서 한 말 중에 "반항하려고 해도 반항할만한 것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현재의 많은 젊은이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나의 젊은 시절, 그리고 무라카미 씨의 젊은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비교적 쉽게 ‘반항할’ 상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체제‘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반체제‘의 형태를 취하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체제’나 ‘반체제’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지요. 최근에는 ‘반체제‘ 운동에 관여해 보았자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래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체제’를 분명히 규정하고 그 반대의 ‘반체제’를 생각하는 방식은 ‘체제’ 속에 본질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의 접근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깊이가 없어요.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약해집니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의 본보기로 무라카미 씨가 해온 일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체제에 반대하는 반항이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개척해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 스타일, 생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거죠. 도식적으로 생각한 반항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져 쉽게 식습니다.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쳐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여기서 ‘작품’이란 예술 작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자체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p.40-41>

픽션의 힘은 강하고 넓은 길은 열려 있다.


최근 들어 소설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여기서도 말한 것처럼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이외의 미디어가 소설을 뛰어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의 총량이 소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전달 속도도 소설에 비해 엄청나게 빠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대부분의 미디어는 소설이라는 기능까지도 자기 기능의 일부로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래적인 인식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저는 소설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는 오히려 그 느린 대응성과 적은 정보량, 수공업적인 고생(혹은 어리석은 개인적 영위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한 소설은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경과해서 그런 대량의 직접적인 정보가 썰물이 빠지듯 빠져나갔을 때 비로소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거대한 망상을 품고 있을 뿐인 한 가난한 청년(혹은 소녀가 맨주먹으로 세계를 향해 성실하게 외치려 할 때, 그것을 그대로 물론 그 혹은 그녀에게 행운이 있을 경우이지만 받아들여줄 만한 매체는 소설밖에 없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문학이라는 기성의 미디어 인식에 의해 성립된 산업의 형태와 그것에 의존해 살아온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픽션은 결코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외치려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길이 넓어진 것이 아닐까요? (무라카미) <p.115>

1960년대의 폭력성과 현대의 폭력성의 차이

생각해보면 1960년대는 기묘한 시대였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면서 동시에 폭력이 존재했고 그 모두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극히 일반적인 것처럼 여겨졌지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랑과 평화’는 ‘그 밖의 것’에 대한 격렬한 반항과 투쟁을 뿌리 삼아 존재한 사물의올바른 모습이었어요. 마치 영화 〈이지 라이더>의 마지막 장면처럼요. 물론 그것은 최후의 순간이 오면 힘에 의해 쓰러질 숙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폭력이 환기하는 아드레날린의 냄새를 또렷이 맡았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그 때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1960년대의 폭력은 대부분 투쟁이나 저항을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는 둘째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알기 쉬운 미학 같은 것이있었습니다. 오에 씨가 당시에 썼던 이야기는 대부분 그런 종류의 폭력성이 담긴 이야기였으며, 그 아드레날린 냄새는 젊은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들였지요. 그러나 지금의 폭력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전이 끝난 후에 일어난 전쟁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폭력성은 국지전화, 분파화 되어 커다란 방향이란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드레날린의 냄새가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이야기 속에 도입할 필요가있을 것 같습니다. 말로 "이렇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써 말입니다. (무라카미).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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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0-151


나는 이 책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려야 할 투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 - 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 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다른게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 공정한 교환이라는 원칙, 소비한다는 만족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신의개념은 본래의 종교적 의미에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소외된 문화에만 적합한 의미로 바뀌었다. 근래 그것이 종교적으로 어떤 형태로 되살아났는가 하면,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경쟁적투쟁에 더 적합하게 만드는 심리적 책략으로 바뀌었다.
종교는 인간의 사업상의 활동에서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기암시 및 심리 요법과 제휴한다. 1920년대에 우리는 우리의 퍼스낼리티를 개선하기 위해 신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베스트셀러인 데일 카네기 Dale Carnegie의 《어떻게 친구를 얻고 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엄밀하게 세속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에 카네기의 책이 수행한 역할은 오늘날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N.Y.피일 목사의 <적극적 사고력>위 기능과 같다. 이 종교적 책에서는 성공에 대한 우리의 지배적 관심이 일신론적 종교의 정신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최고의 목표를 결코 의심하지 않으면서 신에 대한 신앙과 기도를 성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증진하는 수단으로 권고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고객에게 좀 더 어필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처럼, ‘신을 당신의 반려로 삼으라’는 말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있어서 신과 일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업에 있어서 신을 동업자로 만들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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