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왜 그래야 할까? 꼭 그래야 할까? 그렇게 되지 아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떨까?"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현실 세계에 우발적 사태가 일어나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의 현실 인식이 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가 현실을 멋대로 해석하거나 오해하고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에게는 이 말이 유치하고 순진하게 들릴 테지만 내 사고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으니 나는 순진한 채로 남아야겠다. 철학적 사고로 단련되지 않은 보통 사람이 볼 때, 만사가 꼭 그래야만 할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내가 익히 들어왔던 그대로?‘라는 질문은 중요할 수 있다. 늘 닫혀 있기만 했던 문을 여는 행위에 비견되리만큼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지지자와옹호자들이 판타지 문학을 여타 문학에 비해 훨씬 많이 폄하하거나 악마화하고 묵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은 이미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판타지 문학이 그수세기에 걸쳐 증명해 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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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은 "그런 건 없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허무주의다. 또한 "그건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건 공상적 이상주의다. 판타지 소설은 무엇을 개선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해피엔딩이라 해도 그 해피엔딩은 오직 이야기 속 등장인물에게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판타지 문학은 현실의 예측도 처방도 아닌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은 허구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성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체제 전복적인 표현이다.
전복이란 말은 삶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일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사에 그리해야 마땅한 방식이 지켜지도록 공권력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소설은 "모든 일이 늘 하던 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어떨까?"라고 묻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일이 흘러갈 경우 펼쳐질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며, 이로써 뭐든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기반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렇게 상상력과 원리주의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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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TGAN. 2013년 11월


《뉴 북엔스》에서 질문을 했다. 여성 작가가 쓴 위대한 미국 문학(The Great American Novel)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파키스탄의 소설가 모신 하미드가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았다.
.…위대한 미국 문학의 사망에 대한 나의 주장을 참고 들어주길 바란다.
그 표현 자체문제다. ‘위대한‘이나 ‘문학‘이라는 표현은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The‘는 불필요하게 배제적이다. 그리고 ‘미국‘은 안타깝게도 지역주의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대문자표기를 통해 뿌리 깊고 영구적인 불안정감을 드러내는데 아마도 식민시대의 잔재인 것 같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유미의 마스나비를 ‘동 지중해의 위대한 시’라고 부르면 정말 이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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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전쟁이라면 신이나 천상의 정의는 있어도 인간의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건 엄밀히 말해 단테의 희극(The DivineComedy)처럼 코미디의 장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선인들이 악인을이긴다. 그러면 행복한 결말이 된다. 악인이 선인을 이긴다. 그러면 불행한 결말이 된다. 동전 하나를 가지고 앞으로 뒤로 뒤집듯단순한 반전이다. 그런 작가는 공명정대하지 않다. 디스토피아라고 해서 비극이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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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욕설이 제법 다채롭고 때로는 대단히 특색 있기까지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물론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면 지루할 것이다. 일종의 예술로서 욕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과도함과 돌발적 기질이 눈부시게 현란한 정점을 찍었더랬다. 그에 비해 오늘날에는 겨우 두 개의 욕설만 쓰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아주 쉴 새 없이 사용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두 가지 욕설을 넣지 않고서는 말을 못 하고 심지어 글도 못 쓴다.
둘 중에 하나는 배설과 관계된 말이고 나머지 하나는 보다시피성(性)과 관련되어 있다. 둘 다 종교처럼 엄격한 한계에 따라 제재를 받는 영역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의 전제하에서만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똥(caca)이나 응아(doo-doo)라고 외치듯, 다큰 성인은 제기랄이라고 말한다.
있어선 안 될 곳에 배설물을 갖다 놓아라!!
제자리에 두지 않고 제재를 벗어나는 것이 욕의 기본 법칙임은나도 잘 이해하고 인정한다.
....
무의미한 욕은 없다. 의미가 없다면 욕으로서 역할을 못한다. 씹이 뜻하는 성이란 단순히 성행위인가, 혹은 수컷의 공격적 성인가, 그도 아니면 오롯이 공격성 그 자체인가?....단어 자체에 굉장한 억압과 학대, 경멸,?그리고 혐오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신은 죽었다. 적어도 욕설의 세계에서는. 하지만 증오와 배설물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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