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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쿳시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소설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책을 펼치고 몇 페이지를 읽어나갔을 때 '과연'했었다. 우선 책의 구성부터가 남달랐다.
중간 중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책장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선 페이지 처음 부분은 독일의 한 출판사로부터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으로 집필 의뢰를 받은
세뇨르 C의 쉰 다섯 개 주제의 글이 실려있다.
그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두번째 파트는 세뇨르 C가 화자로 등장해서 주로 안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마지막이자 세번째 파트에서는 안냐가 주도권을 잡는 부분이다. 안냐가 바라보는 세뇨르 C에 대해 알 수 있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의 1/8 정도는 차례차례 순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 될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나서, 작가가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생각과 느낌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작가의 타이피스트로 잠시 고용된 안냐의 솔직한 언어와 마주했다.
처음에는 구성의 특이한 신비함에 매료되어서 페이지를 넘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조급함을 느낄 정도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이 책을 세 번 읽게 되었다. 물론 파트를 나누어서 였지만.
'강력한 의견들'을 정독했고, 세뇨르 C의 독백을 두번째로 읽었고, 안냐의 독백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하지만 두 부분으로 읽었어도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력한 의견들'과 독백 파트로 나누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읽어 볼 생각이다. 세 파트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그저 빨리 읽으려는 욕심으로 조각내서 읽어버렸다는 게 아쉬워졌으니까 말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처음 읽은 존 쿳시 소설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그 유명세에 편승해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내내 고민했다. 책을 여기서 그만 덮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결국에는 밥투정하는 세살짜리 아이마냥 꾸역꾸역 읽어내기는 했지만
존 쿳시와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생각하면 책 내용이나 인상적인 구절은 별다르게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 드디어 읽어냈다는 만족감에 흐믓해하던 바보같은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그 후로 한참동안 존 쿳시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 몇 년만에 읽게 되었다. 존 쿳시의 작품을.
바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라는 독특한 제목만큼 특이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이다.
그리고 존 쿳시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몇 년 사이에 읽기가 어렵지 않아졌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쩐지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조만간에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이번에 읽게 될 그 책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만큼 이 책이 마음에 들었고, 존 쿳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깨부셔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강력한 의견들' 원고를 통한 세뇨르 C와 안냐의 대화와 교감의 파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의견들' 파트를 읽어나가다보면 문득문득 골목길로 돌아가는 존 쿳시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뇨르 C가 존 쿳시인가라는 확신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말끔히 사라지곤 한다.
뭐랄까...지하철 안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쳤지만, 동일이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아리송해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세뇨르 C에게 그것과 비슷한 시선을 던지게 된다.
앞으로 존 쿳시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처음 읽은 소설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라는 편협한 이유로 거리를 두었던 많은 책들도 차근차근 읽어봐야 겠다.
그때는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내가 만든 우리에 가두는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독서에서 이미 그러했다는 걸 이런 소설을 읽으면 매번 깨닫게 된다. 각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