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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배급회사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2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요정배급회사'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로는 사랑스럽다. 하지만 피터팬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믿음과 웃음으로 기운을 얻어 빛을 반짝이며 되살아나는 사랑스러운 요정을 호시 신이치의 책에서 만나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호시 신이치의 요정은 어떤 모습일지 더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나서 역시나 했다. 우선 모습이 틀리다. 다람쥐 크기에 촌스러운 회색털, 날개가 있어서 조금은 날 수 있는 외계생명체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그들의 목적도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호시 신이치에게 일반상식적인 관념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그의 매력이고, 그의 책을 읽는 이유니까.
플라시보 시리즈를 읽다보면,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드는 스토리들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 사소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들은 잡아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요정 배급회사'을 읽고나서도 그런 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 지폐는 N박사의 항료가 섞인 잉크로 찍어냈을까라던가, 우리를 조정하는 원대한 계획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것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지점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착한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게 된다. 끝도 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줄을 서서 무의미한 스탬프를 받는 공무원들, 손님들의 목마름을 모른척 한 대가로 갈증에 시달리는 웨이트리스, 자신이 만들어 냈던 소음을 이어폰으로 들어야 하는 폭주족과 참을 수 없는 음향을 만들어 낸 사람들, 담배연기로 가득 찬 작은 부스 속에서 벽을 두드리는 흡연자들의 모습을 읽다보면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별 생각없이 무신경하게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상대방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스트레스는 의외로 작고 사소한 일로 증폭되는 것이니까. 세심한 배려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행동한다면 지점이 생길 정도로 지옥이 포화상태가 되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원대한 계획 아래, 육아기에 의해 길러 진 성인이 된 아이들을 육아기의 목소리가 조정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다. 대학 축제때 신입생을 상대로 담배나 주류를 무상 제공했던 마케팅 방법이 언뜻 떠올랐다. 미미하게 하지만 철두철미하게 접근해서 강력한 효과를 내는 상업술이 섬뜩할 정도로 무섭기도 하고,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기발함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기분맞춤보험이었던 거 같다. 작지만 그냥 지나쳐버리기에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문제들을 보상해 주는 보험회사가 신선했다. 소소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들에 대한 한바탕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절한 상담원,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며 지급해주는 일정금액으로 스트레스는 금새 해소된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할 수 있고, 소비자는 행복해 질 수 있다. 이상적인 쇼트쇼트 공간에서 등장하는 멋진 사업 아이템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해설에는 호시 신이치의 에세이의 일부분이 소개되어 있다. 꽤 멋진 글이다. 기회가 되면 호시 신이치의 에세이집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문장이란 표정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문장을 읽으며 괜시리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장도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사고와 표정이 오롯히 담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표정을 찾아볼 생각이다. 이 문장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의 몸짓은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인지도 생각해보면서 책을 읽다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설렁설렁 읽어대기만 해서 놓쳤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마감일을 앞두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분량이 짧다고 쉬울 거라는 착각은 존재할 여지도 없을 듯 하다. 짧은만큼 아이디어가 무척이나 중요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찾는 과정이 쉽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설에서 소개하는 작가의 모습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초조함이 느껴진다.
재미있게 읽었다. 그동안 쇼트쇼트라서 주로 자투리 시간에 잠깐잠깐 읽었었다. 보통은 시끄럽고 산만한 공간이었다. 이번에는 우연찮게열대야로 뒤척이다 잠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 그 시간의 정적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도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짧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의 상상으로 채워야 할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동안 그 부분을 놓쳤었구나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