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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도둑들 ㅣ I need 시리즈 23
정헌경 지음, 임익종 그림 / 다림 / 2017년 11월
평점 :

도둑은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물건을 훔치는 동기도 다르지만 역사속 도둑은 집단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아요. 바이킹으로 알려진 노르만족, 해적질을 부추긴 영국, 문화재를 훔친 강대국들처럼 민족이나 국가가 도둑질에 나서기도 했고, 성인의 유골을 훔친 중세 유럽 사람들처럼 종교 때문에 도둑질을 하기도 했고, 멕시코 산적들처럼 사회를 바꾸고자 뜻을 모은 도둑들도 있었어요. 도둑이라는 단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코스프레가 있을수가 있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다보면 세력이 강한 집단의 기록이 우세하므로 후대 사람들이 반대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도둑의 의미를 역사속 사건속에서 그 정황을 살펴보는게 중요할거에요. 도둑의 편에선 도적질을 통해 그 집단이나 민족이 많은 이익을 얻었겠지만 상대편의 입장에선 그런 자기 합리화가 이해되지 않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일수도 있을거에요. 또한 도둑들이 그런 도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통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거에요. 아이와 함께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책장을 넘겨봅니다.

약탈자 바이킹의 숨겨진 모습, 종교를 내걸고 성유골을 훔친 사람들, 영웅이 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혁명에 뛰어든 의적, 판초 비야, 강대국의 횡포, 문화재 약탈 총 5편의 역사 속 도둑들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도록 해요.

바이킹이 살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중유럽에 비해 춥고 기름진 땅도 많지 았았어요. 험난한 자연환경을 이겨 내며 살아가며 바다 가까운 환경속에서 배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켜 유럽 최고의 배를 만들수 있게 되었지요. 좋은 배가 있으니 바다가 두렵지 않고 배를 타고 북유럽 밖으로, 점점 더 머나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바이킹 덕분에 여러 지역의 물건이나 화폐가 멀리까지 전달되고 교환되면서 유럽의 상업과 무역이 활기를 띠고 도시가 발달했어요. 바이킹이 이동중 도둑을 만나면 값나가는 물건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어 바이킹은 무기로 단단히 무장하고, 튼튼한 체력을 유지하면서 오늘날 강인한 이미지의 바이킹이 전해지게 되었을거에요. 8세기 무렵 북유럽의 날씨가 풀리면서 농작물이 많아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비좁은 곳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했고 수많은 바이킹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때 이동을 하게 되면서 세계사를 바꿔 놓게 됩니다.
바이킹이 약탈을 일삼던 때는 중세로 크리스트교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적대시되었는데 바이킹은 아직 크리스크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에게 악마처럼 나쁘게 비워졌을지도 몰라요.
유럽 곳곳에 자리 잡은 바이킹은이여러 민족과 한데 어우러져 사는 가운데 유럽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어요. 문화가 섞인 건 언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영어에는 바이킹의 언어에 기원을 둔 것도 있고, 프랑스어와 비슷한 것도 많은데 이것은 바이킹의 이동이 가져온 결과지요.
바이킹의 항해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어요. 레이프 에이릭손은 바이킹을 이끌고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고 '붉은 머리 에리크'로 불리운 그의 아버지는 지금의 덴마크 땅인 그린란드로 가서 마을을 이루었어요. 레이프 에이릭손이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 상륙했는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간 1492년보다 약 500년이나 앞선 일이에요.
바이킹의 저력은 북유럽 후손들에게 이어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전해 갔어요. 독특한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덴마크의 레고 장난감을 보면 창의성과 개성을 살려 주는 북유럽의 사휘 분위기를 알 수 있고, 노르웨이 출신인 북극을 탐험한 프리드쇼프 난센,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로얄 아문센을 보면 바이킹의 모험심을 떠올릴 수 있어요.

크리스트교가 처음 생겼을때 초기 신자들에게 하느님은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고 크리스트교의 교리도 추상적으로 느껴졌어요. 반면에 성인은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들에게 친근하게 여겨져 성인의 무덤을 찾아가 하소연하거나 소원을 말하면 하느님에게 전달된다고 믿었지요. 이런 성인 숭배가 크리스트교가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처럼 중세 유럽 사람들이 성인이 죽은 뒤 남은 유골인 성유골에도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으니 성유골 도둑질은 단순히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고 정당한 행동으로 여겨졌어요.
9세기 국가 권력과 손잡은 중세 크리스트교는 성인 무덤의 순례를 권장하는 국가 정책에 먼 곳에서라도 성유골을 들여와야 했어요. 이렇게 세속의 욕심에 눈멀었던 가톨릭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잃고, 권력 욕심과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었던 십자군 전쟁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가톨릭에 대한 비판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가톨릭 중심으로 유럽이 하나로 묶여 있던 시대는 끝나고 유럽 국가들은 제각각 발전해 가게 됩니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한 뒤 16세기부터 유럽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바닷길을 통한 무역과 항해에 뛰어들었어요. 이 시기엔 국가가 정비한 해군, 자신의 목숨과 배에 실은 물건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한 민간인, 다른 배를 약탈하는 해적이 바다에 뒤섞여 있었어요.
노예 무역상인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에 무참히 패배한 후 노예무역은 접고 본격적인 약탈에 나섰어요. 서인도제도로 가서 에스파냐 배를 공격하여 금은보화를 빼앗아 오면서 점점 유명해졌지요.
먼저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 나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유럽의 서쪽 끝에 있어 대서양으로 나아가기 좋은 위치였어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가난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누르고 영토를 넓힐 가능성도 없는 포르투갈은 수도 없이 항해하고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한 끝에 가장 먼저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었어요. 포르투갈이 앞서 나가자 다급해진 에스파냐는 콜럼버스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침략의 문을 열어젖혔고 라틴아메리카를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어요. 기세등등한 에스파냐에 비하면 작은 섬나라이고 국가 재정도 충분하지 않은 영국은 부족한 재정 문제를 해적을 이용해 해결했어요.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이 에스파냐 배를 약탈하면 크게 칭찬하고, 국가의 배를 빌려주고 돈을 조금 투자했다가 해적이 돌아오면 약탈해 온 재물을 나눠 가졌지요. 그러면서도 에스파냐가 해적질을 항의하면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고 발뺌하구요. 이 무렵 단연 돋보인 해적은 바로 드레이크에요. 영국과 에스파냐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영국을 공격하러 나섭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찰스 하워드를 제독, 드레이크를 부제독으로 임명하여 헨리 8세 때부터 힘을 길러온 해군을 지휘하게 합니다. 드레이크의 전투 경험으로 에스파냐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은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지요.
해적들이 에스파냐 배를 약탈한 건 나쁜 일이었을까요? 에스파냐 역시 라틴아메리카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재물을 빼앗았으니 도둑질을 한 셈이고 해적들은 그 도둑에게서 다시 재물을 빼앗은 거니 도둑질의 공범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해적 드레이크의 활약은 흥미롭고 영국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될지 모르나 그의 도둑질은 유럽이 세력을 뻗어 다른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는 기초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식민지 입장에선 의로운 도둑질이라 할 수 없을거에요.

우리나라 임꺽정처럼 멕시코에는 판초 비야라는 유명한 의적이 있어요. 스물 살이 넘도록 글을 깨치지 못하고 농촌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농민들이 당하는 부당한 현실에 일찍 눈떠 멕시코 혁명에 뛰어들어 북부의 혁명군을 이끌었어요.
멕시코 농민들은 대부분 대농장에서 일하면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도 돈을 얼마 받지 못해 먹을거리, 농기계 등을 사려면 대농장주에게 돈을 빌려야 했지만 턱없이 적은 수입으로 빚을 갚는 건 불가능해 대농장에 붙잡혀 죽을 때까지 일만 했어요. 아랑고는 여동생을 위협하여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려 하는 대농장주에게 총을 쏘고 산으로 도망쳐 산적이 되고 새로운 이름인 프란시스코 비야로 개명하고 판초 비야라는 애칭을 얻었어요. 부자들의 저택이나 대농장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빼앗은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니 부자들에게는 더없이 잔인하고 못된 사람들이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어요. 이렇게 산적은 부자를 혼내주고 빈민의 설움을 알아주었기에 의적으로 떠올랐지만 그저 자신도 살려고 몸부림쳤을 뿐, 잔인한 사람도 영웅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이 된 카란사는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 중 가장 보수적이었던 사람으로 농민의 희망이었던 사파나와 비야를 음모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했어요.
비야와 사파타의 안타까운 죽음은 1917년에 제정된 헌법으로 멕시코가 나갈 길을 제시해 주었고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농민의 요구가 반영된 개혁을 실천해 갔어요. 카란사에 이어 대통령이 된 아바로 오브레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벽화를 보면서 멕시코의 자부심과 혁명 정신을 느끼게 하였고 비야, 사파타와 함께한 투쟁의 기억,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 정신은 영원히 벽화로 남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가득찬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의 전시품은 대부분 약탈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문화재 약탈을 저지른 강대국들의 전리품인거죠. 해외로 유출되었지만 반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각 나라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문화재가 약탈의 대상으로 전략했던 과거가 참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패전국에서 무엇이든 전리품으로 빼앗아 오는 것을 당연시했던 시절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수준 높은 예술품을 잔뜩 챙겨오고, 이집트 원정을 앞두고 군인들과 함께 고고학자, 수학자, 화가 등 민간인을 데리고 이집트로 향해 로제타석 외 많은 유물을 찾아내고 실패한 이집트 원정이지만 유럽에 이집트 열풍과 이집트 연구에 크게 공헌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특수 부대까지 만들어 문화재 약탈을 지휘했어요. 나치즘 구현의 수단으로 문화재를 약탈했어요.
1941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쟁의 참화에서 문화재를 지켜야 한다는 모임이 열렸어요. 전쟁으로 많은 것이 사리지더라고 궁극적이며 지속적인 가치는 남으므로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더라도 인류의 정신적 자산과 문화유산은 보존되어 계속 전해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2011년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돌아오면서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 문제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어요. 제국주의 시대에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경우 민족 또는 국가의 영광을 빛내겠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문화재 약탈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예가 파르테논 신전에서 조각을 뜯어낸 영국의 토머스 브루스 엘긴 경처럼 개인의 욕심에서 시작된 문화재 약탈도 있어요.
유물은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어디에 있든 잘 관리된다면 그만이라는 구차한 변명에도 문화재를 빼앗아 간 나라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문화재 반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는 문화재는 인류가 걸어온 시간과 함께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는 문화재의 소중한 의미가 함께하는 바로 그 장소에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유럽 국가들이 세워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바이킹, 종교개혁을 불러온 성유골 도둑, 영국을 해상 제국으로 키운 해적 드레이크, 멕시코 혁명을 이끈 산적 판초 비야, 문화재를 약탈한 강대국들까지 세계 역사를 주도한 도둑들을 만나는 즐거운 역사 수업이었어요. 역사는 승리자의 이야기속 숨겨진 패배자의 이야기도 살펴봐야하고, 좋은 의도 뿐만아니라 도적질처럼 나쁜 의도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비록 도적질에 의해 이루어진 승리자들의 역사라 할지라도 패배지의 입장에서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고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