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사람 대신 책을 만나고 그 인연으로 또 그 힘든 청춘의 하루를 살았으리라 는
저자의 이야기가 오늘도 이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페이지를 펼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친구는 그러냐고 했지
그래도 그 친구는 집을 짓겠다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다 알고 있으면서
나는 그 친구가 얄미웠지만
네가 참 얄밉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었어
결국 너는 방이 필요했던 거야
어차피 같이 살 사람은 많을테니
너는 성을 쌓고 싶었던 게지
나는 그런 집에 살고 싶지 않을 뿐이고
나는 그런 성을 불태워버리고 싶어하고
불안한 동거는 할 수는 없잖아
예쁘게 정성스럽게 지은 집을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어느 때 불을 지를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너는 네 집을 지어라
네가 그런 성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솔직히 관심없어
어차피 그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도 네가 참 얄밉다는 생각이 드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긴 집을 짓고 밖에 나올 일이 별로 없겠네
담장은 자꾸 올라가도 너는 세상을 굽어보고 있을 테니까
담장 아래 깔린 게 혹시 나일지도 모르니
한 번쯤 굽어살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1998년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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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사다리
내려갈 수 있기 위한
영혼의 계단을 가진 자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다.

모든 존재자 중 최고의 부류는 
무엇이고 최저의 부류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식객이 최저의 부류다. 
하지만 최고의 부류에 속하는 자가 
가장 많은 식객을 먹여 살린다.

다시 말해 가장 긴 사다리를 가지고 
가장 깊이 내려갈수 있는 영혼 옆에 
어떻게 가장 많은 식객이 
모여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광대하게 자신의 내면 속을 
달리면서 길을 잃고 방황할 수 있는 
더없이 용량이 큰 영혼
기쁜 나머지 우연속으로 돌진하는 
가장 필연적인 영혼.
생성 속으로 가라앉는
존재하는 영혼, 의욕과 갈망 속으로 
가라앉기를 원하는
소유하는 영혼.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가 하면 또한 가장 넓은 원을 그리며 
자기 자신을 따라잡는 영혼
어리석음이 그를 향하여 가장
달콤하게 말을 걸어오는 
더없이 현명한 영혼.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영혼
그 안에서 만물이 올러가고 
거꾸로 흘러가고, 썰물이 되고 
밀물이 될진대, 아, 최고의 영혼이 어떻게 
최악의 식객들을 
기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3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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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누림
가짐
소유
영화
명예
풍요로움
성공
따위가
인생의 척도가 되지 않도록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삼감
멈춤
알아차림
나눔
베품
풍성함
충만함
축적
루틴
리추얼
성장이
삶의 기준이 되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나는 30대가 되었고 이제는 정말로 
그 꿈이라는 것을 이뤄 별 볼 일 없지만 
내 이름으로 된 책도 갖게 되었고
여전히 가난하지만 간신히 내 밥벌이는 
하며 이곳에 당도하였다. 돈이 좋다. 
돈이 좋고 꿈이 좋은데, 스무 살 때 봤던 
그 불빛과 이 불빛이 도저히 같은 
불빛일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나는
또다시 그때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다. 
영원히 이렇게 높은 곳에서 불빛을 
보고 싶은데, 아직은 더, 더 할 말이 많이 
남은 것 같고, 더 정확히 표현해야만 
하는 감정들이 남아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야 하는 거겠지? 더도말고 
덜도 말고 지금 사는 이 모습 그대로의 
삶을 앞으로 이어나가면 되는 거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걸까. 
서른둘의 나는 이제 무엇을 꿈꾸고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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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생 29살
무지개 다리를 건넌 시인은
살았으면 60살에 도착했을
2020년 무렵에도 아직도
29살인 채로 서성대고 있다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의
29년보다 더 살아남은 주제에
시 하나 써두지 못했던
나의 29살 무렵이 떠올라 서글퍼지는 아침

이 무시무시한 생애
주어진 유통기한 다하기 전에
이제 부터라도 열심히 써야겠다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떄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 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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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지속을
갈구하면서도
찰나의 지속을
꿈꾸는 시간들.

이기심만큼의 세상을
살다.

어쩌면 그렇다. 
아무것도 온전하게 
지속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시오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도저한 절망에 대한 기록은 
전세기에 일어난 일이었을까.

누군가는 좋아서 미치겠다는 말을 한다. 
그건 좋은 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이기심만큼 
이 세계의 이기심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이기심 앞에 
삶을 살아가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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