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가 건넨 정중한 문장이라 한국의그 어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말.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홀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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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에이미.
수업에 들어오며 로버트는 오늘도 밝은 얼굴로 인사했었다. 쨍한 자줏빛 스웨터에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게 뭔지 아는 남자의 옷차림이었다. 나는 로버트가 평소 옷을 잘 갖춰 입는 게 좋았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노동 앞에서 어떤 격식과 약속을 지키는 것 같아서였다. 그건 본인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몇 년간 그런 존중에 좀 목말라 있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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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빵도 맛있어. 몇 개 포장했으니까 이따 집에 가서 먹어.
기진이 집에서 미리 챙겨 나온 에코백을 툭툭 건드렸다. 선주가 한번 더 ‘이럴 때 딸이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선주는 자신이 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도 가끔은 딸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주위에 물어볼 곳도, 수단도, 자원도, 지식도 없으니까. 당장 상대와 말만 통해도 혼자 뭔가 해볼 텐데 영어도 국어도 선주에게는 모두 어려웠다. 게다가 점점 몇몇 단어가 머릿속에서 증발되고 있었다. 선주는 자신이 어떻게든 혼자 풀어보려 끙끙댄 문제를 기진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너무 가뿐하게 해결하는 걸보고 종종 어리둥절했다. 그럴 땐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정도 문제 하나 풀지 못한 스스로가 못마땅해졌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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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드라마 보면 난 늘 이상하고 궁금한 게 있었어요.
희주가 맥주잔을 든 채 잠시 회상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뭐요?
-파자마-파자마 잠옷?
-응. 드라마 속 주인공이 집에서 늘 그렇게 입고 있는 게.
그런 옷이 따로 있는 게 생경하고 이상했어요.
-어? 나도 그런 거 있는데.
-뭐요?
-간식.
-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내 또래 아이가 혼자 쓰는 방이랑 그안으로 엄마가 쟁반에 받쳐 갖다주던 간식. 나는 그게 늘 신기하고 낯설었었어요.
-맞아. 근데 걔는 꼭 엄마한테 나가라고 소리치고.
-맞아. 진짜 그랬어.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다. 과한 자기 연민이나엄살이 없는, 깨끗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리하여 어느봄, 회식 멤버가 다 떠난 새벽, 해장국집에서 단둘이 3차를 하고 긴 가로수 아래로 도시의 2급수가 흐르는 천변을 걷다. 두사람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서 고전적으로 입맞췄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적절함‘의 거리를 둘이 힘을 합쳐 구겨버렸다. 스무 살의 다급함이나 허둥거림 없이, 과도한 기대나 실망도 없이 서로의 느낌에 집중하면서. 그러고 한참 뒤 입술을 떼었을 때, 기태가 갑자기 벚나무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기태씨, 왜 그래요?
희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태는 문득 발길질을 멈췄다. 그러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얼굴로 희주를 빤히 바라보다 누가 들어도 너무 순진하고 무모해 낯뜨거워지는 말을 했다.
-자기 꽃비 맞으라고요. - P151

사다리 마지막 칸에 기적적으로 오른 자신과 달리 ‘요즘‘ 입사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한국의 정교한 계급 필터를 거친 이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자신이 쥐고 태어난 걸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계급성은 지우고 나이라는 약자성만 내세운 채 신문에서 읽은 말로 앞 세대에게 자주 적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뭘 굳이 읽지 않고도 언제든 쉽게 품을 수 있는 게 적의이기도 했다. 기태는 대학 졸업 후 어렵게 은행에 들어온 뒤 세상에는 돈 많은사람이 참 많다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태의 ‘고객‘뿐 아니라 동기나 후배도 여럿 있었다.
-당신들이 첫 세대가 아니라 ‘부모보다 못살거나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은 늘 있었어요. 지금도 있고.
후배들 앞에서 언제나 ‘좋은 선배‘이길 자처하는 박과장이과장되게 웃었다.
-에이, 비율이 다르잖아, 비율이 비용도 다르고.
-그러니까 ‘우리‘ 말고, ‘세대‘ 말고, 내 얘길 하자고, 내얘기를. - P159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기태는 ‘아! 앞으로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중받는 은따, 대우받는 꼰대가 되겠구나‘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날 기태를 괴롭힌 건 자신이 실언했단 사실이 아니었다. 기태가 진정 후회하는 건 그 순간 자신이 굳이 ‘진심‘을말했다는 거였다. 그날 기태는 이혼한 이래 처음으로 희주가그리웠다. SNS에 가입해 처음으로 희주의 계정을 찾아본 날도 그날이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 P160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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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정책은 점점 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중국 외교관들은 타국 정부의 행태를 비난할 때 으레 <중국 인민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라고 말했으며그런 식의 표현은 갈수록 잦아졌다. 해당 표현이 사용된 사례를 일일이 세어본 팡커청이라는 기자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세 번에 불과했던 <중국의감정이 상한 사례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 평균 1년에 다섯 번으로늘어났음을 알아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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