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개인은 자기가 곤경에 처했을 때 타인의 희생을 바라는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자들만이 상호 협력 정신과 동지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또한 이기주의라는 오래된 암이 조직을 먹어치우고 있어 그 부패가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의 생사가 본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잘못이며,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은 자신의 제반 이해를 돌보기 위해 이중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376

1) 리리산(李立三) : 1896년 출생. 1922년 노동자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 5·4운동(1919) 때 상하이총공회 (上海總工會: 노동조합총동맹) 위원장으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후 최후까지 도시노동자에 의한 공산혁명의 달성이라는 중국공산당 내의 이른바 ‘리리산노선‘의 지도자였다. 귀국 후 중국정부의 노동부부장(1949)도 역임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서기를 지냈고 극좌파였다.-님 웨일즈, 리영희 - P388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이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도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따라갈 것이다.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단하나의 길밖에 없다. 지도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추종하는 자는 자유롭지만 지도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추종하는 자는 책임 없이 행동할 수 있지만 지도하는자는 역사적 결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추종자가 아니다. 추종자였을 때가 더 행복하기는 했다. 주도권을 잡고 지도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이 임무는 내 경험에 의해 부여되고 내부에서의 강제에 의해 억지로라도 이행해야만하는 의무인 것이다. 이 지도를 수행하기까지 살아남지 못한수천 명의 앞서 죽은 사람들이 수많은 손가락을 가진 하나의 손이 되어 나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지식도 그들과 함께 죽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그 지식은 나와 함께 살아남아서 나 또한 죽을 때까지 창조적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P404

1) 남의사 : 장제스 독재 정부가 만든 전국적인 비밀경찰 조직. 공식 명칭은 역행사(行)이나 이곳의 제복이 하의 노란색, 상의 남색이었기때문에 ‘남의사‘로 불렸다.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출신자를 중심으로 1932년 3월에 건립되어 주로 항일 애국운동과 민주운동을 진압하였고, 공산당원들을 참살하였다. - 역자 - P417

내가 구금되어 있던 4월 26일에서 6월 15일 사이에 약 50명의 공산당원이 감옥에 들어왔다. 거기에서 거의 40명이 전향하고 배반하였다. 각자 자기 자신의 석방을 보장받으려면 다른 두 명의 동지를 팔라고 강요당했다. 감옥에서 나가는 자들은 모두가 배반자였으며, 자기에게 배당된 두 명의 동지가 체포될 때까지 경찰 두 명이 따라다녔다. 동지 두 명이 체포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자유의 몸이 되고 더 이상 경찰도 따라 다니지 않게 된다.
이러한 배반과 도덕성의 실추는 지난 2년 동안 줄곧 늘어나고 있었지만, 지금껏 그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전연 모르고있었던 것이다. 한 투쟁의 막바지에서 패배를 당하는 것처럼보이는 이 집단적 배반의 이유를 토의하기 위해 나는 감옥 안에서 비밀회의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당 노선의 잘못이 무엇이며 체포되면 법정에서 사용해야 할 전술이 무엇인가를 토의했다. 법정에서 혹은 박해를 받더라도 자기가 당원이라는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기로 전원이 결의했다. 또한 전향서를 쓰거나 혹은 다른 동지들을 배반하여 체포당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결의했다. 당 관계를 자백하느니 차라리 죽어야 한다. 운동 전체의 사기와 규율이 위태롭게 된 것이지 지도자 개개인의 운명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 P423

이 모든 배반을 직접 목격하고 나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며 몸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인간생활의 특징에는 아름답고 장렬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인간성에대한 믿음을 상실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에 대한 믿음도 흔들렸다. 오류니 부정이니 어리석음이니 비겁함이니 하는 것은 용서해줄 수가 있다. 하지만 변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말인가. 비슷한 상황이라면 조선사람도 이런 짓을 할까 하고자문해 보았다. 조선사람이라면 개인적인 증오 때문에 배반하는 일이야 있겠지만 나약함이나 비겁함 때문에 배반하지는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이라면? 러시아인은? 유럽인이라면? 이것은 중국인의 성격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것으로, 혁명조차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 어떤 인종을 다른 인종과 따로 떼어놓고 매도한다는 것은 내가 여태까지 품고있던 신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줄곧 배반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중국에서 일어나는 이런 배반에 필적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인종적 특징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치적 윤리의 붕괴로 인해 약체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러한 동지들은 더는 우리가 내걸고 싸우고 있는 강령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틀림없는 것이었다. - P424

전향을 거부한 것은 관념적이고 어리석고 미치광이 같은짓이었을까? 대중 앞에서 전향을 하여 재차 활동할 수 있는자유를 얻는 것이 단 하나의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간단한 일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확고히 결심하였다. 자기자신도, 당도, 또한 다른 어떤 사람도 절대로 배반하지 말자. 어리석은 태도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에게는 진실이었고 또한 그것이야말로 내 도덕성을 편히 쉬게 해주는 반석이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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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무조건 엄마 아빠 말을 따라야 해‘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순종적이고 소심한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이건 팩트다"라는 말은 가능하면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한다. "넌 틀렸어" 같은 권위주의적인 어휘들 또한 아이의 사고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장애물이 될 뿐이다.
메타인지는 스스로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게 하는 능력인데,
극단적 표현은 이러한 능력의 발달을 저해한다. 가급적 아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그건 잘 이해하는 것 같은데 또 다르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것이 좋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자신이 한 말을 되돌아보고 자기 생각도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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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은 문학은 항상 인생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그 자체보다는 제한되고 단순하지만 인생의 단편을 강력한 상상력으로 풍부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문학이라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서문>에서 그는 희극과 비극은 결코 섞여선 안 된다는 볼테르의 주장에 반박하여 정곡을 찌르는 말로 응수했다. 볼테르의 주장이 옳다면 그런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당연히 열등한 작품일 수밖에없었다. 존슨은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엄밀히 따지면 비극이나 희극이아니다. 그의 희곡 자체가 독특한 장르다. 그의 희곡은 선과 악, 기쁨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으며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이 세상의 순리도 보여준다. 술에 취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고, 슬픔에 잠긴 그는 자신의 친구를 땅에 묻었다"라고 적었다. - P436

조지 3세는 1760년에 22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1761년 조지 3세는 샬럿(Charlotte) 왕비를 위해 세인트제임스 궁전 인근의 버킹엄 하우스를 구입했다. 그녀의 사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버킹엄 하우스는 ‘왕비의 집‘으로 알려졌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뒤, 버킹엄 하우스는 버킹엄 궁전이 됐고 군주의 관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지 3세는 책을 많이 읽었고 학문을 권장하는 왕으로 알려지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씌어진 고전문학, 시, 지리학, 역사, 수학, 법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방대한 양의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서는 더 많은 책을 수집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했다. 그리고 왕비의 집에 추가로 방을 만들어서 수많은 책을 보관했다. 학자와 문필가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조지3세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 P449

 1744년 발표한 《리처드 새비지의 인생》에서 존슨은 저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개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사악함과 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타국을 침범하는 악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런 입장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변하지 않았다. 1759년 《디아이들러》에 실은 에세이에서 존슨은 영국 군대가 영토를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느 인디언 추장이 되어 그의 심경을 글로 옮겼다.
"저 침략자들은 분노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을 도륙하고, 항복하는 사람들을 재미삼아 죽이며 이 대륙을 돌아다녔구나. 살아남은자들 중에서 일부는 커다란 동굴에 들어가 주인을 위해 광물을 캐고, 다른 일부는 토지를 경작하는 일을 하게 되겠지. 외국 폭군들이 목숨걸고 캐낸 광물과 힘들여 얻어낸 수확물을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원주민들이 그들의 검과 광산에서 목숨을 잃을 때, 그들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본국으로 끌고 갔다. 먼 타국으로 끌려간 그 사람들은 노역과 고문으로 죽어갈 것이다." - P467

당대 지식인들 역시 식민지화에 대하여 새뮤얼 존슨과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애덤 스미스는 더 온화하고 차분한 어조로 《국부론》에서 존슨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어리석음과 부당함이 식민지 건설의 주된 원칙인 듯하다. 금광과 은광을 쫓는 어리석음과 초기 모험가들을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이한 악의 없는 원주민들의 땅에서 자원을 탐하는 부당함 말이다." - P468

 그리고 존슨은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척박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은 영국에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그러나 역사가 반복되듯이, 1982년엔 이 군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졌다. 이어서 전쟁의 실상에 대해서 낱낱이 열거했다. 그가 전쟁의 실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전문을 읽어보자.

전쟁에 대해 대부분의 인류가 냉랭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니 실로 놀랍다. 멀리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거나 책에서 전쟁에 대해 읽었지만실제로 전쟁의 악폐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재미있는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전포고, 군대, 전투 그리고 승리로 구성된 게임 말이다. 허나 실제로 누군가는 승리의 전장에서 죽어간다. 그들은 영예라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잉글랜드의 영광으로 가득한 정복의 기쁨에 취해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난다.
영웅소설은 현대 군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전쟁은 대포와 검보다 더 무시무시한 파괴의 수단들로 가득하다. 최근 벌어진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수천, 수만 명의 군인들 중에서 적의 검과 대포에 의해 죽어간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축축하고 부패한 막사와 배에서 시들어갔다. 그들은 창백하고 무기력하고 활기 없고 무력했다. 그들은 헐떡였고 신음했다. 오래 지속된 희망 없는 비참함으로 인해 완고해진 이들은 동정을 받지 못했다. 예고도, 추모도 없이 그들은 구덩이에 파묻히거나 바다로 던져졌다. 용기는 쓸모 없고 진취성은 실현 불가능한 불편한 야영지와 건강에 나쁜 주둔지에서 병력이 조용히 줄어들고 군대는 무기력하게 사라졌다. - P469

보즈웰은 "이것은 솔직하고 기분 좋은 고백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버크는 미국에 대한 연설로 웅변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73년 노스 행정부는 차 조례를 통과시켰다. 차 조례로 파산 국면에 빠진동인도회사는 독점적으로 면세 차를 미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인도에서 들여온 차가 미국에서 사실상 더 싸게 판매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타운센드법에 따라 1파운드당 3펜스의 세금이 차와 다른 5개 물품에 부과됐다. 5개 품목에 대한 세금은 이미 할인됐고, 조세 수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 차에 부과되는 세금만남아 있었다. 보즈웰은 그 원칙은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에선 차 조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보스턴 차 사건이 발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과 미국 식민지들의 정면충돌이 머지않았다는불길한 징후였다. - P478

요즘은 으레 미국 독립 혁명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의미의 혁명으로간주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이다. 신생국가에서의 삶은 혁명 전과 후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혁명 전에 권력을 쥔 자들이 혁명 이후에도 단단하게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에는 공식 헌법이 있었다. 버크는 미국 독립 혁명을 두고 이렇게 썼다.
"위대한 혁명이 일어났다. 기존 국가에서 이전 권력자들의 목을 자르고 새로운 자들이 권력을 잡는 형태의 혁명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은 힘의 관계, 균형 그리고 중심의 변화였다. 태양계에 새로운 행성이 등장한 일과 맞먹는 것이었다." - P480

 《국부론》의 제1장은 ‘분업‘이다. 애덤스미스는 핀 공장에서 핀 하나를 생산하는 과정이 18개의 단위 작업으로 이뤄져 있음을 발견했다. 핀 공장에서 본 내용을 바탕으로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노동자가 전체 작업을 수행하는 대신 한두 개의작업을 수행하고, 다른 노동자가 이어서 나머지 작업을 수행하면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진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한 사람은 철선을 늘이고 다음 사람은 바르게 펴고, 셋째 사람은 자르고, 넷째 사람은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째 사람은 핀 머리를 붙이기 위하여 끝을 간다. 핀 머리를 만드는 데도 두셋의 공정이 필요하며, 그것을 붙이는 것이 특별한 작업이라면 핀을 휘게 만드는 것도 또 다른 작업이며, 핀을 종이에 포장하는 것까지도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그들은 판매를 위해 핀을 종이에 포장했다. 이리하여 핀 제조라는 중요한 일은 약 열여덟 종류의 작업으로 나뉘고, 어떤 공장에서는 이 작업들을 여러 직공들이 나눠서 하게 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작은 공장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겨우 열 명이 일하고 있었고, 그중 몇 사람은 두세 가지의 다른 작업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약 12파운드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다. 1파운드의 핀은 중침으로 4,000개 이상이 되므로, 10명의 직공은 하루 4만8,000개 이상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숙련공이라도 혼자서 하루에 20개 이상의 핀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부론>은 19세기 공장 시스템을 예견했다. 이것은 독창적이었다. - P491

로마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 기번은 그 도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쓰기 시작한 시점에 미국 식민지들은 영국에서 독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들과 그들의 몰락은 아주 시사적인 주제였다. ‘위대한 제국의 ‘쇠망‘이란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되짚는다는 생각은 분명 영국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었다. 기번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널리 흩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가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을 다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그가 살던 영국이 직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먼 지역과 외국을 그들의 의향과 흥미에 반하여 복종시키는 것만큼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반하는 것은 없다. 방대한 제국이 유지되려면 정책과 억압이란 정제된 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중앙에 절대권력이 집중되어야 하고, 행동은 날래고, 자원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서 가장 먼 지역과의 의사소통이 신속하고 쉬워야 하고, 반란의 씨앗을 제거할 방어 시설과 중앙의 뜻을따르는 자를 보호하고 거스르는 자를 벌하는 행정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불만과 절망을 유발하지 않고 공포를 조장할 잘 훈련된 군대가 필요하다.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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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남자나 여자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아요. 오히려 더 용감하고 더 결단력 있게 만들지요. 만일 사랑 때문에 당신의 용기가 줄어든다면 나는 당신을 경멸할 것이고 그러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내 연인이 죽은 이래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없어졌어요. 삶이라는 것의 가치가 줄어들고 용기가 더욱 가치있게 된 거예요. 지금은 혁명에 대한 나의 임무가 이전보다도 커졌어요. 내 임무뿐만 아니라 그이의 임무까지도 수행해야 되기 때문이죠. 만일 당신마저 죽는다면 나를 믿고 자기 자신이 혁명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고는 생각지마세요. 나는 장래의 내 짐이 두 배로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없고,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혁명은 하나의 추상물이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적 요소가 혁명에 유기적인 단결인 동지간의 충성과 더욱 커다란 책임을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튼튼하지만 떨어져있으면 당신도 나도 단지 개체에 불과할뿐 완전한 하나의 단위를이룰 수는 없습니다." - P320

만주에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노선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서로 협력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일제에 대한 투쟁만을 하고 중국인 지배계급이나 지주에 대한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정내렸다. 만주에는 대부분이 중국인 지주를 위하여 일하고 있으면서 중국인 봉건계급에게 시달리고 있는 조선인 농부가 100만 명이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제에 대한 투쟁은 물론이요, 그 당시 여타의 모든 지역에서 택하고 있던 일반적인 당 방침에 따라 중국농민과 합세하여 중국인 지배계급에 대한 농민투쟁을 지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우리는새로이 ‘조선인 ·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1925년 이후 다수의 지식인과 도시노동자를 조합 속에 엮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는 이 지방의 중국공산당은 농민조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당원 가운데 농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조선공산당은 농민과 농업노동자를 묶은 조합은 있었지만 도시무산자의 조합은 없었다. 이제 조선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농민조직창설을 돕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내에 농민부가 설치되었고 여러 명의 조선인이 거기서 일하게 되었다 - P329

비록 내가 아직도 극동에서의 지도적인 혁명과제가 중국문제라 생각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한 믿음이 무한히 되살아나고 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리 조국의 앞날에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의 공산당은1928년의 일제검거로 깨어져 버렸고 아직도 각 파벌이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곳 만주에서는 그런 단계는이미 막을 내렸고, 대회는 통일된 지도부의 대표들을 구성하였다. 또한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청년연맹은 만주위원회의 조선공산청년부의 지도하에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대회를 지배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지, 민족주의자들이아니었다. 이는 고양되는 혁명의식의 지표였던 것이다.  - P330

하지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충실한 세월을보낸 지금, 나는 계급적 단결과 국제적 협력 모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억압받고 있는 제 민족과 제 계급을 지도하기 때문에, 소련을 나는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중국혁명은 그 삶과 운명이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하였다. 조선혁명은 어리고 불안정한 어린아이로서 애정이 갔다. 나는 조선혁명의 발걸음이 그전에 러시아와 중국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온 나이먹은 농부들은 내말을 꿈을 꾸듯이 듣고 있었지만, 젊은 농부들은 지혜와 결의를 가지고 열성적으로 방법과 수단을 물어왔다.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리고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에 영원한 기지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과 또한 지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항일투쟁을위해서도 가난한 중국농민과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였다. - P334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가요?"
ㅠ"조선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음과 패배의 노래입니다. ‘아리랑‘ 이지요."
나는 이 노래의 의미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갈색 벌판을 바라보고 광둥과 하이루펑을 생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대단히 감동하여 이제까지 들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하였다.
"당신 부인도 이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대대로 이 노래를 알고 있지요. 만일 부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 당신은 부인에게 새옷을 사주고 친절히 대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이 노래를 절대 잊지 않겠어요."
그는 다정하게 약속하고는 맥주를 주문하여 함께 마셨다.
해외에 파견되는 일본인 관리는 말단 직원까지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전위인 것이다. 조선 국내의 경찰은 이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놈들은 이만큼 정중하지가 못하다. 조선에서는 이미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2류 행정관리들이 파견되는 것이리라. - P367

법정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나서 나는 조선의 중심지인 신의주에 있는 큰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감옥에는 1,000명이상이 수용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원이었다. 왜놈을 죽였다거나 죽이는데 협조했다는 것이 입증되면 사형이었고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유기징역이었다. 1910년 이래 이 감옥에서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운 가장 걸출한 조선의 투사들이.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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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의 장면들은 우리에게 메타인지 방식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너 그것도 몰라?" 하고 누군가 핀잔을 줄 때에도 헤르미온느는 주눅들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알아? 머글 집안에서 자랐는데!"라고 받아친다. "나는 다른 건 잘 알지만 이건 잘 모른다"고 솔직히 시인하면서 "그러니 네가 나에게 좀 설명해줘"라고 요청하는 것이 메타인지 학습이다. 먼저 판단을 내린 뒤 (모니터링)더 배우고 싶다고 컨트롤을 하는 것이다. 메타인지가 작동하려면 헤르미온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편하고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P150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하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어서다. 겸손의 말이 ‘스포트라이트를 나누어 비춰주는‘ 일종의 배려 양식이라고 소개한 연구도 있다. 겸손의 말 속에는 ‘이번엔 내가 운이 좋았지만 다음 번엔 너도 운이 좋을 거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고배를 마신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겸손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하기도 한다. "이게 다 운이 좋아서"라고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지금껏 실수와 실패를 통해 쌓아온 과거의 노력은 몽땅 잊어버리고 사후과잉확신편향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가면을 쓰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실을 ‘착오‘라고 믿게 되고 ‘나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폄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임포스터이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P168

연구자들은 두 가지 겸손에 대해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에게 자신이 겸손해졌을 때를 떠올려보게 한 후 ‘겸손한 마음‘ 하면 연상되는 감정과 단어, 행동을 모두 적게 했다. 참가자들이 적어낸내용에는 긍정어와 부정어가 다 담겨 있었다. 긍정적 연상에는 축하, 감사, 자부심, 명성 등의 단어들이, 부정적 연상에는 자기 평가,
타인으로부터 숨기는 것, 수치심, 순종,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음을 숨기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진은 전자의 겸손을 ‘감사하는 겸손‘ 후자의 겸손을 ‘자기비하적 겸손‘이라고 이름 붙였다. 2009년도에 버락 오바마BarackObama 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그가 발표했던 소감문에는 두가지 겸손이 잘 드러나 있다.
"수상의 영예에 깊이 감사드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 상을 받아들겠습니다(감사하는 겸손). 슈바이처, 킹, 마셜, 만델라 같은 전 수상자들에 비하면 제가 이룬 업적은 너무나 미미합니다(자기비하적 겸손)"
감사하는 겸손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어떤 면을 칭찬했을 때 "고마워요"라고 답할 수 있으려면 남이 칭찬한 그 면을 자기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겸손은 메타인지와도 연결된다. 메타인지도 나 자신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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