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낮에는 고문에 시달렸고, 밤에는 옆 사람의 신음과 울음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치장은 점점 수감자가 늘어나 잠잘 때 열으로 누워서 아침까지 칼잠을 자야 했고, 밥은 꽁보리밥에 노란 물감이 묻어 있는 단무지 두세 조각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도저히 참을 수없는 고통은 사실 속옷과 생리대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생리대는 한 사람에게 하루에 하나씩 제공되었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모욕적인 언사가 따라왔다. 날마다 수사받으러 상무대로 들락날락하면서 여성들은 무지하게 맞고 돌아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엉덩이 전체가 시퍼렇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특히 항쟁 당시 방송했던 여성들은 고문으로 수시로 하혈했고, 하혈을 멈추기 위해 국군통합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신체적 고통보다 간첩 행위자로 조사받는 일이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 P268

피를 말리는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조사가 느슨해지는것 같았다. 6월 말에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이 잡혀 오거나 자수하여 수사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이른바 광주사태를 북한의 지령으로 일어난 폭동에서 김대중과 연관된 사건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 나는 그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박관현 학생회장 선거에 상당한 비용을 지원했고, 그 비용은 김대중이 정동년을 통해 지원한 것으로 날조되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시동생 김상집과 김현주 그리고 아내인 나와 내 동생 정현순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들을 볼모로 삼아 남편에 대한 고문을 강화했다. 나 역시 보강 조사를 받기 위해 상무대 영창에 자주 갔고, 가끔 맨발로 조사실에 들어가는 남편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다. 한번은 남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목격해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수사관도 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고 그럴수록 초조하기만 했다.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 방침이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 P269

가족들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자료를 전달하면서, 20사단의 광주 이동에 미국이 동의한 사실, 5.18 항쟁 당시 미국인들을 광주군사공항에 피신시킨 사실 그리고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고 발언한 신문 기사를 보여 주며 미국의 책임을 따지자 참사가 자리를 피해 버렸다고 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두고 나왔다는데, 이 편지는 실제로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해진 것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
우리는 미국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고 광주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1월말경 우리는 광주 미문화원장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미문화원장에게 강도 높게 미국의 책임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미문화원장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 180도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왔다"는 미국대사관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가장 연장자였던 윤이정 여사가 참고 참다가 그녀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홍시 빨아먹듯이 우리를 빨아먹기만 한다."
1981년 5월, 우리 가족들은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다시 한 번 광주미문화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형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쫓아냈다. 미국의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광주 미문화원은 분노한 운동권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고, 결국 위치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타 지역에 설치되었던 미문화원들도 이후 분노한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된다. - P288

"청와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전두환이 전격적으로 면담을 했지만,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광주로 내려가서 기다리는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고생만 합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별말씀이 없으셨고, 먼저 광주로 가시기 위해 지하성당을 나가셨다. 추기경은 우주선을 타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우주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서 가족들을 위로했다. 단식농성 중이라보기에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형이 풀어지기 전에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사형수들의 목숨이위험한 상황에서 구속자 수배자들의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계속 농성하겠습니다."
나는 뒤쪽으로 물러나 정형달 신부와 이 답답한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청와대 면담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사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전두환은 이런 사건에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되풀이하며 주장했다고 한다. 전두환의 주장에 대주교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도 모자라서 또 사형을 시키겠다고? 결국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거겠지.‘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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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1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남여고 쪽1에서 공수부대 차량 10여 대가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곧바로 차에서 내리더니 일부는 총에 착검을 하고 일부는 곤봉을든 상태로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앞에 총! 제자리 뛰어! 돌격 앞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우리들은 그들의 기세에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앞에 몇 사람이 있었는데 뒤로 밀리다 보니 어느새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 공수들은 "앞에 총!"을 외치고 느릿느릿 달려오더니 눈앞까지 와서는 "찔러총!"을 외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바로 내 뒤에서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의 욕설이 들렸다. 그들은 무조건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충검을 찌르고 곤봉을 훅훅 휘두르는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자리를 빨리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비집고 들어가 우왕좌왕하다가 동계천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청운학원 뒷골목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려고 돌아섰는1데, 도망쳐 온 일행 중 바로 내 뒷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와 눈이마주쳤다.
"나 찔렸어." 그러고는 순간 ‘푹‘하고 고꾸라졌다.
"그는 대검에 등을 찔려 숨을 내쉴 때마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P161

조사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 나는 대공수사팀인 3과로 옮겨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3과로 옮길 무렵 신군부는 소위 광주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의한 내란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울 보안대 본부에서 특수공작 총괄 임무를 맡고 내려온 홍성률 대령이 ‘광주를 빨갛게 색칠하면 영원히 화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신군부가 받아들여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가 철회되었다고 한다. - P233

그즈음 광주사태에 대한 윤곽이 대체로 드러났다. 결국 호남 지역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수사관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지역 출신 수사관들은 ‘이제 그만 고문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어쩔때는 우리에게 연민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업무는 업무여서황의섭은 내 고향인 장성을 여러 번 방문하여 우리 집안에 관한 조사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6.25 전쟁 때 여덟 식구가 학살당해, 오히려 반공 집안이라는 증언만 들었던 모양이다. 황의섭은 많은 조서를 작성했으나 그 내용은 중복될 수밖에 없었고, 포고령 위반 이외에 다른 내용을 추가할 수 없었다.
사실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으로 만들 계획이었다면,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사람 중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나를 빨갱이로 만든다면 도청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빨갛게 칠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광풍은 몰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자가 될 때까지도 적색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당시에 적색공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강해 ‘자신이 죽은 뒤에 가족까지 죽이는‘ 천형에 가까운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 P234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내가 교수님들에게 받은 돈을 감추지 못하고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이 속상했다. 확인 조사를 받으면서 교수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작금의 사태가 포고령 위반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거대한 역사의 파고에 휩쏠리고 있다는, 그리고 그 파고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야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런 죄송할 일이 얼마나 더 생길지 알수 없었다. 나는 김지하 선배의 시처럼 "저 밑 모를 어지러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41

별을 몇 개씩 달고 있는 장군들이 여러 명 재판석에 앉아 있었다. 헌병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는 법정에서 준엄한 선고가 이어졌다.
"정동년 사형!"
"김상윤 징역 20년!"
그리고 연이어 후배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징역 20년‘이라는 선고를 듣자 하늘을 나는 듯 기쁨에 휩싸였다. 나는 당연히 사형이 선고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청석을 돌아보니 여동생 현주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동년 선배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오빠가 사형을 면했다고 하여 대놓고 기쁨을 드러낼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선고가 끝나고 정동년 선배와 나 그리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같은 차를 타고 교도소로 돌아갔다. 차가 출발했는데 뒤에서 정동년 선배의 부인이 하염없이 울면서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 죽지 않습니다.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정동년 선배는 교도소로 돌아올 때까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댔다. 망연하지만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교도소에 돌아와 독방에 홀로 있으니 사형을 면했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내가 조사를 잘못 받아 정동년 선배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자신은 죽음을 면했다고 날아갈 듯 기뻐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이 떠오르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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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니까요. 여기 화순 아니에요."
남편은 전화를 끊고 어떤 여자가 자꾸 화순이냐고 묻는 전화를 두번이나 했다면서 투덜거렸다. 갑자기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남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셔터를 올렸다. 그러자 밖에서 여러 사람이 남편을 잡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나를 향해 큰소리로 내복을 가져오라고 외쳤다. ‘내복이 어디 있지? 벽장 속에 있을 거야." 당황했지만 방으로 뛰어들어 가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이높아 평상시에 의자를 딛고 올라가야만 했지만 그날은 가볍게 몸이올라갔다. 양말과 웃옷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편이 옷을 받자마자 그들은 남편을 지프차에 태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 하나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니! 막막하기만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차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왜 시계를 못 챙겨 주었지?‘ 시계가 없어서 남편의 시간이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손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머릿속도 텅비어 버린 것 같다. 그 순간 남편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알려라‘
유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민족민주화성회 때 읽은 유인물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각종 집회 유인물, 전국운동단체에서 발행한 문건들이 널려 있었다. 어쩌면 이것들이 남편을 옥죄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말 일이나 버렸구나. 유인물들을 치워야겠다.‘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문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문건들은 서점 안에도 많이 있었다. 다 모아서 책보자기에 묶은 뒤 우선 창고에 내놓았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 P54

"소식 들었습니다. 김상윤 형님의 후배입니다. 걱정되시겠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사식이라도 넣어 주십시오."
그러고는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갑자기 울컥해 눈물이 나올 것같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선생님 성함을 모릅니다."
"삼계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국어선생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어서가보십시오."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름을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버스를 탔다. - P67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넣어 만든 주먹밥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 두려워했지만 옆에 아는 얼굴들이 있어서인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는 것 같았다.
"아따 이렇게 먹어도 맛있소!"
"형수는 이럴 줄 알고 쌀을 많이 사놨소?"
"쌀을 많이 사 놓긴 했는데, 어제 오늘 밥을 어찌나 먹었는지 쌀이거의 떨어져가네요. 쌀 사러 가야겠습니다."
"내일 집에서 좀 가져올게요."
"어제 오늘 여기서 밥 먹은 사람이 다 가져오면 쌀 부자 되겠네."
"형은 잡혀갔지만 형수님은 부자 되니 좋겠소."
그 말에 모두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공포도 걱정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 P70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대규모로 저항하고있으나, 이 움직임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반드시 지도부가 있어야 한다. 우선 지도부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계엄군은 시민과 학생들을 완전히 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무자비한 진압은 시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더욱 자극하기 위한 도발 같다.
시민과 학생들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상황에 맞는 대책을 제시하고 적절히 잘 대응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동참해야 하고, 반드시 학생지도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현재 유언비어가 지나치게 난무하고 있고, 이 상태로 가면 분노한 시민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학생지도부가 전면에 나서야 하고, 평상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나와서 일반 시민을 대표하는 지도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전남대 총학생회는 일부 연행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피신했다. 게다가 운동권 일선에 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되었거나 피신한 상태에서 어떻게 지도부를 만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혼란의 책임을 결국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것이 뻔하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탁월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없다. 계엄군에 저항하는 시민들은 평소에 민주화운동을 해 본 사람들이 아니어서 계엄당국에 요구하는 내용도 중구난방이며, 오직 살상을 일삼는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주변에 있는 돌멩이나 던지고목이 쉬도록 외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이라도 중심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위 소식과 시위의 정당성 그리고 우리의 요구를 명확히 밝히는 소식지를 만들자, 부상자를 치료하고, 밥과 물을 제공하며, 최루탄 가스를 피하기 위해 치약이나 랩을 준비하자! - P73

캄캄한 하늘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옥상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우산 두 개를 펴서 맞대어 놓으니 제법 피난처 같았다. 여차하면 시동생과 학생들을 이곳으로 피신시킬 참이었다.
피난처를 거의 다 만들었을 즈음, "와" 하는 함성 소리가 주택가에서 울려 퍼졌다. 급히 옥상에서 내려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방금 9시 뉴스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 군인들의 희생이 많다. 민간인 부상자는 두 명 정도 났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폭력 앞에서살기 위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다니! 수없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사람을 보고도 부상자가 고작 두 명이라니! 주택가의 함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보도에 기가막힌 시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탄식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우리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는 시민들의 분노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았다. 시민들의 봉기가 계속된다면 우리도 피할 수는 없었다. 서점 문을 닫을수도 없었다. 이 일로 구속되거나 교사를 그만둬야 하더라도 어쩔 수없는 일이 아닌가? - P81

그때 골목 여기저기에서 머리에 대야를 이거나 옆구리에 바구니를낀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요구르트와 김밥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다. 시민들은 감격했다.
"어제는 한 끼도 못먹었어요."
"3일 만에 처음으로 밥을 먹어 보네."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은 밥 먹을 정신도 없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손에도 주먹밥을 쥐여 주셨다.
"어쨌든 일을 해도 밥을 먹으면서 해야 해."
동네 이웃끼리 모여서 학생들에게 밥이라도 먹이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만들었다며 어서 먹으라고 권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뒤에서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뒤쪽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 분이 외쳤다.
"군인들도 하나씩 주면 좋겠소. 조선 인심은 똥 놔두고는 밥 먹어도 사람 놔두고는 밥 못 먹소."
"저놈들이 뭔 죄요. 자기 집에 가면 다 귀한 자식들인다. 시킨 놈들이 나쁜 놈들이제."
아주머니가 그 말을 듣고 주먹밥이 든 통을 들고 군인들 앞으로 갔다. 갑자기 군인들의 시선이 그 아주머니 쪽으로 쏠렸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자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 곤봉으로 아주머니를 확 밀어냈다. 아주머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너는 부모도 없냐"며 야유를 보냈고, 분위기는 다시 험악해졌다.
시민 한 사람이 외쳤다.
"도지사 만나러 간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참읍시다. 저 어머니를 위해서 <어버이 은혜>를 합창합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여러 노래를 불렀다.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를걸기도 하면서 <봉선화>, <애국가> 등을 불렀다. 어머니들도 젊은이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아스팔트 위에서 듣는 노랫소리가 처연했다. 학생들이 시위하면서 불렀던 노래와는 많이 달랐다. 학생들은 훌라 송>이나 <우리 승리하리라>, <아침 이슬> 등을 불렀고,
시민들은 주로 <애국가>,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우야 잘자라> 같은 군가도 불렀다. - P94

나는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을 경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성명서 문안을 작성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오판하여 북한이 휴전선을 넘어온다면 광주시민들이 앞장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무나 발언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 같은 집회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계엄사 쪽에서 프락치를 보내 교란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사태를 막기 위해 우리는 여러 사람이 사회자와 함께 분수대 위로 올라가 대비하기로 했다. - P115

전체적으로 도청 안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사람들이 점점 도청에서 빠져나갔다. 계속 총을 들고 싸우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갈등은 사라졌지만, 무기 회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도청에서 모두 철수해 버린 것도 불안감을 고조시킨 요인이었다.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이다. 딱히 책임감 때문에 남아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저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감히 입 밖에 내지못했을 뿐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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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기억하라

내가 1976년 가을에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을 위해 구로공단에 취업했다가 나온 이후 서울에서는 전위냐 대중이냐를 두고 쟁론이 벌어졌고, 나는 소설가로서 대중운동 현장을 찾고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대하역사소설 ‘장길산‘을신문에 연재하면서 전통사회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 가출하여 남도를 편력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언젠가 호남지방을 다시 돌아보리라 작정하고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의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나는 새로운조국을 발견하게 된다. 개발독재 기간 농촌사회의 분해와 재편성을위한 새마을운동이 선전되고 있었지만 전라도는 여전히 피폐했다. 강진, 해남 등지는 조선시대의 유배지로서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유배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을 뿐 아니라 동학혁명의 발자취 또한 뚜렷했다. - P5

전남대의 경우 학생회가 부활하기 전에 이미 어용교수 문제로 교내가시끄러웠다. ‘어용교수 백서‘가 발표되고, 지목된 교수들의 버티기가계속되자 학생들은 서서히 집단행동으로 뜻을 관철하려 했다. 총학생회에서 어용교수들의 연구실을 사실상 폐쇄하는 정침식(釘針式 교수실에 못을 박아 출입을 못 하게 하는 의식)을 했고, 정치외교학과 주수원 교수의 중재로 모임을 가졌으나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교수들이 버티고 있는 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총학생회 부활 후 전남대 교내시위는 어용교수 퇴진이라는 구호 아래 시작되었다. 5월이 되자 학내시위가 무르익었다.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도청 앞에서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총학생회는 ‘반민주 반민족 행위자 매장비‘를 용봉탑 앞에 세우는 등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설 준비를 갖추었다. - P36

"상윤이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놈들이아냐 학생들이 횃불 시위를 하고, 게다가 5·16 화형식까지 한다니 몹시 걱정이 되네. 군부가 나올 수도 있는데 무슨 대비책이라도 있나?"
대비책이 있을 수 없었다.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민주화의 열기를 엎어버린다면 도대체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우려는 진작부터 있었어요. 어제 서울역 시위를 끝으로 대학생들이 모든 시위를 중단한 것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을주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우려가 있다고해서 학생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민주화라는 대세를 뒤엎을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명분을 잘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네."
두 선배는 내 말에 수긍하면서도 이를 강조했다. 신군부가 쿠데타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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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언어에는 똑같은 속담이 존재합니다.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도 느끼지 못한다는 속담이죠. 그런데 전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감히 단정합니다. 우리가 억누르려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감정들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마음에는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유배중이라면, 두고 온 집과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려고 애쓸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서 그 사람을 떠올릴 겁니다.
복음서와 세상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신을 이해하기 위해,
민족을 나아가게 한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지구 표면을 방황하는 영혼들의 순례를 이해하기 위해 떠난 유배중에 씌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우리 역시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을 수 없고 또 잊기를 원치도 않기 때문에 책들이 씌어지고 그림들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 P299

그녀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스크린에 ‘끝‘이라는 자막이 뜬다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생각을 한다면,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시작하라고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옛날 옛적에......"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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