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내고 하는 사업과 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 표면상의 얼굴과 뒷모습, 페르소나와 민낯이라는 이분법적인 인간관에 따라 ‘신용‘을 설명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타자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다.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서도, 또다른 얼굴에는 전적으로 신뢰가 결여되어 있어도, 특정한 얼굴은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우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신뢰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무관심이아니라 다양한 사정을 감안하여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배려이기도 하다.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지만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은 탄자니아 홍콩조합을 결성하여 궁지에 빠졌을 때 서로 돕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있다. 이 커뮤니티에 모이는 사람들은 연령이 다양하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량배같이 차려입었거나 티셔츠와 샌들 바람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고, 가족이 있는 사람, 독신인 사람, 이혼한 사람도 있다. 월 수입이 6만 달러가 넘는 부호도 있고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제각각‘이면서, 아니,
‘제각각‘이기에 그들은 연결될 수 있다. - P60

구리타는 홍콩, 중국 및 동남아시아 국가 등의 환태평양지역을 돌아다니는 탄자니아 교역인들 사례를 바탕으로,
기존 이민 연구에서는 현재 이동 중인 사람 mover이 아니라과거에 이동하여 현재는 정착한 거주자 resident가 더 주목받고 있으며, 거주자들의 커뮤니티 형성과 주류 사회와의 관계가 주요 논점이 되었고, 이동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커뮤니티 연구의 가능성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고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장기 체류자‘, ‘단기 체류자‘라는,
‘체류(혹은 정주)‘의 방식을 조명하는 호명이 아닌 ‘빈번한 이동자Frequent Travelers‘와 ‘느린 이동자Slow Travelers" 라는 구별을 제안한다. 그리고 환태평양 지역, 아랍에미리트, 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여러 대량 매입지와 판매지를 이동하는 그들의 인구 동태 및 커뮤니티가 복수의 교역 지점을 잇는 이동자移動者들을 매개로 형성되는 결절점임을밝히고 있다. 이 지적은 적확하다. 이 논고의 주요 대상은홍콩에 불안정하게 장기 체류 중인 사람들이지만, 이들역시 ‘정주자‘가 아니라 언제 어느 지역으로 이동해도 이상하지 않은 ‘느린 이동자‘에 지나지 않은 데다 이들 커뮤니티에는 ‘빈번한 이동자‘도 참여하며, 애당초 ‘안정적인 멤버십‘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티라는 발상이 이들의 동태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들의 조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 P63

탄자니아 홍콩조합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조합원 사망 시에 시신을 운구하는 비용의 기부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는 여행지나 돈을 벌러 간 곳에서 사망한 사람은 반드시 고향에서 매장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범이있다. 탄자니아에서도 시신을 운구하려면 트럭 수배 등에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도시로 돈을 벌러 나온 가난한 사람은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병에 걸리면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큰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포기하며 스스로 버스를 탈 체력이 있는 동안 고향에 돌아가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 시신운구에 드는 비용은 일반 가정이 부담하기 어려운 액수다. 타국에서의 죽음은 ‘당한 이가 누구건 동포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불행‘으로 인정받기가 비교적 용이한 사태인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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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스틴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가들과 이야기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분들은 좀…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아주 까다롭죠." 하비가 말을 받았다. "다들 영화의 한 장편한 장면이 책의 단어 하나하나와 일치하기를 원하거든요."
게다가 영화와 책은 완전히 다른 매체이고 완전히 다른 스토리텔링 기법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해요." 저스틴이 말했다. "사실상 번역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매체 간의 번역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부정확할 수밖에 없어요. 롤랑 바르트도 말했죠. 번역은 반역이라고."
"부정한 미녀." 하비가 말을 보탰다. "아름답지만 충실하지못하다는 말입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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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곳 맨 앞줄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환영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나 진짜 같고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특유의 진녹색 숄을 걸치고서 호리호리한 몸을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가늘고 연약한 어깨가 한층 우아해 보였다. 그녀는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윤기 흐르는 레게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아테나였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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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테나 리우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그날 밤, 우리는 아테나가 넷플릭스와의 계약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던 중이었다. - P7

사람들은 늘 질투를 아주 날카롭고 기분 나쁘고 불쾌한 감정으로 묘사한다. 쓸데없이 심술궂고 비열한 감정으로, 하지만 알고 보니 질투는, 특히 작가들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아테나가 출판 계약을 또 맺었다거나, 수상자 명단에 올랐다거나, 특별판이 출간되었다거나, 해외 판권 계약을맺었다는 성공적인 소식을 트위터로 접할 때면 심장박동수가 급격하게 치솟았다. 질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아테나와 비교하며 패배감을 느끼게 했고, 충분히 좋은 글을 충분히 빨리 써내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예감으로 전전긍긍하게 했다. 아테나가 넷플릭스와 거액에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며칠간 좌절에 시달리고, 서점 진열대에서 그녀의 책을 볼 때마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에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터였다.
내가 아는 작가들은 다들 누군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매우 고독한 작업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글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극심한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징후가 조금만 보여도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냥 쓰고 있는 글에 집중하라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작품이 끊임없이 눈앞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와중에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P18

칵테일 때문인지, 작가로서 내가가진 과도한 상상력 때문인지, 뱃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딸기처럼 빨갛게 칠한 아테나의 입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 얼굴을 뜯어내고 오렌지 껍질 까듯피부를 깨끗이 벗겨내고 그 안에 쏙 들어가 지퍼를 잠그고 싶다는 괴상망측한 충동이었다. - P19

문제는 내가 이 소설에 얼마나 많은 걸 쏟아부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초고를 아테나가 썼다는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한 작업의 결과물, 내가 써낸그 모든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서도 아테나 리우만 생각하게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누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거짓말을 감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이 출간되기 오래전, 그러니까 소설의 초안이 리뷰어와 책 전문 블로거들에게 공개되기 전에 나는 미리 기초를 다져놓았다. 아테나와의 관계를 절대 비밀로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은근히 감추거나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아테나가 사망할 당시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이용했다. 인터뷰 때마다 아테나의 이름을 언급했다. 아테나의 죽음에 대한 나의 슬픔은 원작의 초석이 되었다. 맞다. 세부적인 부분은 조금 과장했다. 분기에 한 번쯤 마시던 술은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우리 둘이 같이 찍은사진은 단 두 장. 아테나 옆에 선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절대 공개하고 싶지 않았지만, 흑백으로 변환한 후 감동적인 헌사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우리는 서로의 작품을 모두 읽고 종종 아이디어를 주고받았으며, 그녀는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이고, 내 초안에 대한 아테나의 의견은 내가 작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줬다는 것이 내가 대중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라. 우리 사이가 가까워 보일수록 이 소설이 그녀의 작품과 닮았다는 사실이 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이 프로젝트 곳곳에는 아테나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내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에 왜 그런지 설명했다. - P69

내가 아는 평범한 누군가가 갑자기 유명인이 되는 모습, 세련되고 가식적인 외모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잘 아는 인물로 바뀌어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음악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든가, 섭식장애를 앓는 금발 여자애였던 대학 신입생 때 친구가 스타 배우가 된다든가 말이다. 대중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어떻게 그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현실의 인물이 아닌 마케팅과 대중화의 요소가 되어 팬들에 의해 소비되고 칭송받는 인물이 되는 걸까? 팬들은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팬들은 그 또한 이해하며 상관없이 그를 찬양한다. - P96

이게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는 신호일까? 나는 궁금했다.
아마도 맞는 것 같았다. 내 책이 출판사에 얼마나 중요한지왜 아무도 즉시 말해주지 않았을까? 『플라타너스 너머』가 출간되기 전에는, 내가 홍보에 땀을 쏟으면 쏟을수록 출판사가 그만한 보상을 해주길 바라며 블로그 인터뷰와 팟캐스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작가의 노력은 책의 성공과 아무 관련이 없다. 베스트셀러는 선택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과정에서 주어지는 혜택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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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우리는 산다는 것과 경제가 격리되어 있는듯한, 거대한 허구의 세계 시스템에 우리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 같다. ‘현대스러움‘과 근원적인 경제의 논리가 인류사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미래 인류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이들, 공유• 연결• 특이점singularity • 기본 소득basic income에 관심을 두는 모든 이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호수성互酬性을 기반으로 한 사업 모델과 생활 보장 구조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일본은 인연이나 자유에 대한 강조, 타자에 대한 배려, 타자와 맺는 관계의 번거로움 등과 같은 다양한 국면에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 책에서 홍콩에서 살아가는 탄자니아인의 삶의 모습과 그들이 형성하는 경제 구조를 독해하여 우리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힌트를 제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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