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아침 다섯시가 되자,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가 들려온다. 본부 건물에 있는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이나 두껍게 성에가 낀 유리창을 통해 단속적인 음향이 희미하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날씨가 춥다보니 간수도 오랫동안 두드리고 있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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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 P49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 A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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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종과 다문화로 구성된 미국 같은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용광로melting pot‘는 ‘샐러드 그릇 salad bowl‘으로 바뀌면서 찬장 한구석으로 처박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은 지 오래됐다. 샐러드 그릇이란 서로 문화적 통합성을 이루기보다는 각각의 인종 집단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에 대해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같은 동족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는 가르치라는 압력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의 젊은이들조차 그들이 미국 문화에 너무 빠르게 동화되면 서로 ‘바나나 banana‘ (원래는 미친(놈)이란 뜻의 속어지만, 여기에서는 겉은 중국인이지만, 속은 백인처럼 생각한다는 뜻에서)라며 놀려댄다. - P143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더 많은 우려를 표시한다. 즉,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새롭게 몰려오는 이민자들의 소득수준이 아일랜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착민들의 소득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에 미치기는커녕 공적부조public assistance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이민 정책이 엄격하지 않은 것에 다소 위안을 삼기는하지만, 최근의 데이터에는 큰 우려를 표시한다. 그들은 왜, 어떤 우려를 표시할까?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해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지만, 비숙련 노동자들이 주류사회에 포함되거나 상류 계급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 P143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자유무역은 교역상대국이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 그렇지 않든두 나라 모두에 이롭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나라의 국민들이 더 많은 제품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리카도가 곡물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 농민들이우리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프랑스 식랑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 시간에 다른 유용한 일을하는 편이 낫다." - P161

리카도가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를 출간하고, 하원의원으로선출돼 의회에 나가 자유무역을 외쳤을 무렵, 노동자들은 임금의 절반가량을 곡물로 만든 빵을 구입하는 데 지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값싼곡물의 수입을 막는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나 그들의 고용주에게나 모두 손해였다. 더구나 보호무역론자들 protectionists 은 다른 나라에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판매함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리카도는 "지주 계급의 이익은 항상 사회의 다른 계급의 이해와 대립한다"고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지주들의 미움을 샀다.
그의 치밀한 논리와 설득력 있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의회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통과된 곡물법은 리카도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난 1846년이 되어서야 폐기됐다. 하지만 리카도는 후대 경제학자들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들은 보호 무역 정책은거의 항상 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특정 계급이나 집단에게만 이득이 될 뿐이라는 리카도의 견해에 동의했다. - P162

교역을 허용함으로써 각국가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한정된 자원을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서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옮겨가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각 나라가 한정된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각 나라의 국민들은 적은 희생으로 더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산업구조조정이 일어날 경우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에게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산성이 낮은 산업을 보호할 경우 더 큰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은 소비자들이다. 따라서 정부는 산업 구조 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실직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지급함으로써 직접 보상을 하거나. 아니면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것이 더 나을 것이다.  - P166

일반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의 유머 감각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 글은 한번 쯤 읽어볼만 하다. 1840년대 프랑스 정부가수입 관세를 올려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리자 프랑스 태생의 정치경제학자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édéric Bastiat 는 다음과같은 풍자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사회과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풍자 글이다.

양초, 양초 심지, 랜턴, 촛대, 가로등, 촛불 고개, 그리고 소화기 제조업자들과 석유, 수지(獸脂, 동물 기름), 수지(樹脂, 송진), 알코올 생산업자들, 그리고 기타 조명 제조와 관련이 있는 업자들로부터 고명하시고 존경하옵는 하원의원님들께 의원님들
우리는 지금까지 빛 light 을 생산하기 위해 우리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한 외국의 경쟁자와 피 말리는 싸움을 하느라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믿기지 않는 엄청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 빛 시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 이 경쟁자는 다름 아닌태양 sun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경쟁자로부터 국내 및 제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 가지 법안을 통과시켜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각 가정이나 건물의 모든 창문, 지붕창, 채광창, 집 안팎의 덧문, 커튼, 여닫이 창, 채광을 위한 둥근 창bull‘s eyes, 현창 그리고 블라인드 등, 간단히 말해 빛이 새어 들어올 만한 모든 문과 창문, 구멍, 틈새, 그리고 균열을 닫거나 막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집안이나 건물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을 가능한 차단할 수 있다면, 인공광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프랑스 산업은 더욱 번성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인공광을 생산하기 위해 수지 (獸脂)를 소비할수록, 소와 양에대한 수요도 덩달아 늘어날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해운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P168

왜 리카도는 무덤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애덤 스미스를 억지로 깨워기분을 언짢게 하려고 했을까? 스미스는 농업 생산성은 장기적으로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것이고, 반면 산업 생산성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것을 현대 경제학 용어로 옮기면, 그는 농업에 대해서는 수익 불변 constant return 의 법칙을, 그리고 산업에 대해서는 수확 체증increasing returns의 법칙을 적용한다. 그리고 이 결과 사회의 모든 부분이 번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리카도는 이와 반대로 산업에대해 수익 불변의 법칙을, 농업에 대해 수확 체감decreasing returns 의 법칙을 적용했다. 물론 리카도는 주기적인 기술 개발이 경제가 정체되는것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제를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윤율 저하경향은 "생필품 생산과 관련이 있는 기계의 향상에의해, 뿐만 아니라 농업분야에서 노동력의 수요를 줄이고, 따라서 노동자의 주요 생필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어느 정도 시간 차이를 두고 계속해서 저지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항상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마냥 정신줄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 P179

맬서스는 곡물법 문제에 있어서 리카도의 두 가지 주장인 지대 분석과 그의 농업 생산에서의 수확 체감 현상은 상당부분 수용했지만, 다음 네 가지 근거를 토대로 그의 분석을 비판했다.
첫째, 곡물법이 곡물 가격을 상승시켜 국내 곡물 생산량을 사실상 증가시킨다.
둘째, 곡물은 국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해외 수입에 의존하거나 외국 생산자들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
셋째, 노동자의 임금은 곡물 가격에 따라 지불되기 때문에 곡물 가격이 상승하면 사실상 노동자의 임금도 상승한다. 따라서 맬서스는 임금은 항상 곡물 가격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현대 경제학 용어로 바꿔 말하면, 리카도는 ‘명목nominal‘ 임금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실질real‘ 임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곡물 가격 상승으로 임금이 올랐다고 하더라도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카도에게 맬서스의 주장은 군중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봉급을 두 배로 인상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독재자처럼 들렸을 것이다. 군중들은 일제히 환호한다. 다음 날, 군중들은 흥분된 마음으로 식료품 등 생필품을 사기 위해 근처 상점으로 발길을 향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의 가격이 전날에 비해 2배로 오른 것이 아닌가!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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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다른 난민들과 함께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솔레다드에게는 평생 가장 길게 느껴진다. 루카에게 엘 노르테에 거의 다왔다는 말을 들은 뒤로 지평선에서 엘 노르테의 냄새가, 맥너겟과 막 출시된 나이키 운동화 냄새가 나는 듯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엘 노르테가 보이는 듯하고 어서 가고 싶어서 온몸이 씰룩거린다. 솔레다드는 척추를, 눈을, 폐를 북쪽으로 내민다. 다른 사람들이 차갑고 단단한 땅에 앉아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자는 동안 솔레다드는 달빛 속에서 선로를 서성인다. 이렇게 엘 노르테에 가까이 오니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 새로운 공포가 그들을 덮쳐이뤄지기 직전인 꿈을 훔쳐 갈까 무섭다. 솔레다드는 눈을 붙여보려고 한다. 골치가 지끈거리고 나서야 자신이 숨을 죽이고 있다는걸 깨닫는다. - P423

이번에는 리디아가 파올라의 처지에 공감해 몸이 마비된다. 리디아는 자신이 느끼는 깊은 슬픔에 깜짝 놀란다. 그녀에게 아직 다른 사람을 위해, 파올로의 살해된 조카를 위해 슬퍼할 감정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렇다. 지독한 공허감이 들 정도의 고통과 만난 적도 없는 소년을 향한 절망이 느껴진다. 납치된 모든 소년에게 느끼는 무수한 슬픔이 루카가 이어놓은 점들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이어진다. 그 고통은 너무 크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각각의잔인한 죽음이 스스로 100배, 1,000배 증폭된다. 이 은행에 있는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그런 슬픔을 알고 있다. 노갈레스에 사는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러 개의 플라사로 나뉘어서 하비에르 같은사람들의 통치를 받는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체 왜? - P465

리디아는 국경을 넘는 순간이 비장할줄 알았다. 한발짝만 내디디면 멕시코를 벗어나 미합중국에 들어가는 식으로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질 줄 알았다. 그 순간이 오면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물리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자신이 남기고 가는 것, 그러니까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비에르와 그의 심복들에 대한 두려움을돌아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을 줄 알았다. 18일 동안 2,600여 킬로미터를 견딘 끝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전, 학살이 일어나기 전의 삶, 아카풀코에서의 행복한 유년기도 돌아보고 싶다. 여섯 살 생일이 있던 여름에 매일 입었던 오렌지색 수영복, 십대 때라 케브라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일. 아직 아무런 부끄럼 없이 아빠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바라비에하 해변을 거닐던 일. 엄마의사랑스러운 수백 가지 불만. 대학, 세바스티안, 책방. 출산 후 처음으로 루카를 안았던 순간. 리디아는 작은 죽음을 맞이하듯 이런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순간이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세계로넘어가는 문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저 사막의 방울뱀처럼 고통의 허물을 벗고 그것을 멕시코 땅에 남겨둘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국경을 넘는 순간은 이미 지났고 리디아는 국경을 넘는 줄도 몰랐다. 돌아보지도 못했고 국경 너머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될 만한 어떤 간소한 의식도 치르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그저 전진할 뿐이다. - P519

두 모자 혹은 루카는 여전히 불을 켜고 잔다. 리디아는 대개 잠을 자지 않고 루카 옆에 일어나 앉아 있다. 예전에 세바스티안이 잤던 자리에 이제는 루카가 자고 있다. 리디아는 한 손으로 루카의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가 또 아빠 꿈을 꾸기 바란다. 곧 세바스티안이 아들의 꿈에서 나와 자신의 꿈에도 찾아오길 바란다. 마치 세바스티안이 이 방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분자이자 원자라서 루카의 뇌에서 그녀의 뇌로, 루카의 귀에서 그녀의 귀로 이동할 수 있다는 듯이. 리디아는 그날 밤늦게까지 책을 읽는다. 램프의 부드러운 둥근 불빛이 끌어당겨 세운 그녀의 무릎에, 따뜻한 담요에, 루카가 내뱉는 숨에 떨어진다. 새로운 집에서 리디아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다시 읽는다. 처음에는 스페인어로, 그다음에는 영어로, 아무도 그 책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 책은 리디아만의 것이다. - P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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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근대를 보는 아렌트의 관점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 없이 영웅적으로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 P39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Entnarrativisierung*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 자체가 적나라한 활동이다.
벌거벗은 노동은 벌거벗은 생명에 정확히 조응하는 활동인것이다. 벌거벗은 노동과 벌거벗은 생명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된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41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무제만은 탈진하여 완전히 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감각상태에 빠져 심지어 육체적인 추위와 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 질환을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제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제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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