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생태계에는 이처럼 소수의 개체들, 심지어는 정자를 품은 한마리의 암컷에 의해 시작되는 개체군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다양하지 못한 유전자군으로 시작된 개체군에서 일어나는 각종 유전적 성향을 ‘창시자 효과 founder effect‘라고 한다. 영화 「블루 라군」의 경우처럼 정말 저 먼 외딴 섬에 몇 마리의 새 또는 곤충이 바람에 실려 가 새로운 개체군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육지에서도 때로 서식지가 단절되어 졸지에 적은 수의 개체들이 새로운 개체군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생태학자들은 이처럼 조각 나 고립된 서식지를 ‘서식지섬habitat island‘이라 부르는데 정작 물 위에 떠 있는 섬이 지닌 속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지난 100여 년을 돌이켜 볼 때 물 위의 섬들은 그리 많이 생기지 않은 듯하나 서식지 섬들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우리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자연 생태계는 점점 더 잘게쪼개지며 많은 개체군들이 아예 절멸extinct하거나 절멸할 가능성이농후한 병 bottleneck 상태에 빠졌다. - P56
비록 나는 이 글에서 진화는 결코 진보적 변화가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지만 사실 진화 생물학계는 이 문제를 두고 두 진영으로 갈려있다. 다윈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양 진영을 왔다 갔다 한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던 로마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처럼 지금도 일부 진화 생물학자들은 지성이나감정 이입 등 우리 스스로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들은 진보적 진화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나의 스승인 하버드대학교의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생물의 진화를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엄연히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믿는 쪽이다. 하지만그의 제자인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굴드 진영에 가깝다. 그의 저서 『풀하우스 Full House 에서 굴드는 진화란 단순한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온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전 글을 읽은 독자라면 내가 얼마나 굴드를 불편해 하는지 잘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게 싫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진화 이론의 발달에 여러모로 공헌했다. 진화와 진보의 관계에 대한 그의 명쾌한 설명도 그중 하나이다. - P71
그런데 정말 척추동물의 눈은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가? 공교롭게도 척추도 없는 무척추동물 중에도 우리와 상당히 비슷한 구조의 눈을 가진 동물들이 있다. 바로 오징어, 문어, 낙지 등의 연체동물이다. 오징어의 눈과 우리 인간의 눈을 위아래로 잘라 단면을 비교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서로 전혀 다른 진화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구조와 기능을 갖게 된 이른바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의 좋은 예이다. 그런데 오징어의 눈과 우리 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세 한 가지 뚜렷하게 다른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시신경과 실핏줄이 망막의 뒷면에 붙어있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망막에 구멍을 뚫고 시신경과 실핏줄을 동공 안으로 끌어들여 망막의 내벽에 붙여 놓았다. 도대체 왜 멀쩡한 스크린에 구멍을 뚫고 깨끗한 상이 맺혀야 하는 스크린의 앞면에 그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일까? 과연 오징어와 인간 중 누가 그런 어리석은 구조를 가진 눈의 소유자일까? 답은 뜻밖에도 우리 인간이 그런 비합리적인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 P85
왜 인간의 눈은 이렇게도 불합리하게 만들어졌는가? 자연 선택은왜 좀 더 완벽한 설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가? 문제는 바로 인류가거쳐 온 진화의 역사에 있다. 뒤집힌 망막의 설계는 인간만의 문제가아니라 거의 모든 척추동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척추동물의 눈은 작은 조상 동물들의 투명한 피부 밑에 있던 빛에 민감한 세포들로부터 발달했다. 당연히 이 세포들에 혈관과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상태에서는 다분히 합리적인 설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억 년이 흐른 오늘에도 빛은 어쩔 수 없이 혈관과 신경들을 지나쳐야만 시각 세포에 도달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설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아니다. 진화에는 이처럼 역사적 제약historical constraint, 또는 계통학적 제약phylogenetic constraint 이 있다. - P87
생물 환경biotic environment에 대비하여 물리적 환경은 다른말로 비생물 환경abiotic environment이라고도 한다. 비생물환경과 생물환경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한다. 즉 공진화coevolution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물리적 환경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공진화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단연 현화식물과 그들에게 꽃가루받이pollination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벌, 나비, 박쥐, 새 등의 동물이 맺고 있는 관계이다. 꽃가루받이는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상리 공생 mutualism 형태의 공진화지만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인 포식predation과 기생parasitism의 상대들도 끊임없이밀고 당기며 함께 진화한다. 날로 속도가 느는 치타의 추격을 따돌리려 영양도 점점 빨라지고, 늘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여 공격하는 기생생물에 대항하여 기주 생물host 도 새로운 유전자 조합으로 면역력을 키운다. 이 관계는 마치 옛날 소련과 미국이 벌였던 군비 경쟁을 방불케 한다. 소련이 새롭고 더 강력한 미사일을 개발하면 미국은 그걸공중에서 격침시킬 수 있는 요격 미사일을 개발하곤 했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이와 흡사하게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군비 경쟁을 진화적군비 경쟁evolutionary arms race이라고 부른다. - P98
자연 생태계의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서 무수히 많은 다른 생물들과 공진화하며 어느 한 방향으로 일관성 있는 적응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피터 래섬Peter Mere Latham 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완전한 계획을 세우려는 것은 쇠퇴의 징조이다. 흥미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완벽한 연구실을 설계할 시간이 없다."자연의 강은 완벽의 정상을 향해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 그저 구불구불 흘러갈 뿐이다. - P99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단순히 항생제 남용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용과 오용 모두가 문제인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살 때 열이 너무 심하게 오르거나 콧물이나 재채기가 멈추질 않아 병원을 찾으면 우선 그런 증상을 유발하는 장본인이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를 가리기 위해 병원균 배양 시험부터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세균성으로 밝혀지면 항생제를 처방하지만 만일 바이러스가 원인으로 판정되면 집에서 편히 쉬며 물을 많이 마셔 몸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열심히 씻어 내라며 약도 주지 않고 돌려보낸다. 바이러스는 완벽한 의미의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항생제로는 구제할수 없다. - P113
생물의 형질에는 생존 survival을 돕는 게 있는가 하면, 생존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지만 번식 reproduction에는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들이 있다. •••••• 건강과 장수는 번식을 돕는 한도 내에서만 진화적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생물의 형질은 대부분 생존과 번식 중 어느 하나에만 관련하여 진화하는 게 보통이지만 어떤 형질은 그를 소유하고 있는 개체로 하여금 생존과 번식 모두에서 탁월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공작과 꿩의 수컷은 명백하게 생존에는 불리하더라도 번식에 유리하기때문에 그처럼 화려한 깃털을 갖도록 진화했지만, 수사슴의 뿔은 생존과 번식 모두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크고 강력한 뿔은 다른 수컷들과 경쟁하거나 심지어는 포식 동물의 공격을 받을 때 자신을 성공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특별히 가지도 무성하고 우람한 뿔을 가진 수컷이 암컷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짝짓기 과정에서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므로 번식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 P124
바로 이 배우자를 두고 경쟁하는 후자의 경우 그 대상이자 목표는거의 언제나 암컷이며 경쟁의 주체는 주로 수컷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다윈이다. 더구나 그 경쟁의 결과가 궁극적으로는 암컷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선택권의 소재는 결국 투자의크기로 결정된다. 이른바 ‘개미 투자자‘라고 불리는 소액 주주가 대주주를 제치고 선택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 소액주주들이 힘을 모아 주주 총회에서 대주주의 전횡을 막아 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유성 생식을 하는 모든 생물에서 정자, 즉 수컷의 배우자가 암컷의 배우자, 즉 난자보다 큰 경우는 절대로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발견된다면 최초의 발견으로 평가받을 일이 아니라 그 생물에서는 암수의 역할이 바뀌었거나 아예 암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암수의 정의에 따르면,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정자라는 운반체에 실어 암컷에게 전달하는 쪽이고 암컷은 그 유전자를 받아 자신의 유전자와 섞어 새로운 생명체로 키워 내는 초기 발생의 임무를 띠고있는 존재이다. 이 세상 모든 생물에서 전혀 예외 없이 정자는 난자에 비해 엄청나게 작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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