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불빛을 손으로 막으며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금속 쐐기를 다시 내려가 리즈옆에 섰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검은 머리는 비를 막아주려는 듯 뺨을 덮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를,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 P3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고려의 선배들은 중원의 시세에 따라 수시로 황제국을 바꿨는데, 약 250년쯤 지난 17세기 전반 조선의 후배들은 왜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까?
조선의 위정자들이 국력의 강약이나 존망보다 더 상위에 둔가치는 인륜에 기초한 의리였다. 주자학의 융성과 함께 조선에서 뿌리를 아주 깊게 내린 지존의 가치, 곧 명과 조선을 군부·신자 관계로 보는 인식이 17세기에 매우 확고하였다.
조선인의 중화 인식은 핵심이 사대事大ㅎ였다. 문자 그대로 큰나라를 섬긴다는 뜻인데, 여기서 ‘대大‘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적잖이 달랐다. 한국사에 국한해 보아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대는 대개 강대국을 의미하였다. 고려 때 황제국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이념적 고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중심은 중원인데, 어떤 북방 종족이 중원을 점령했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들에게 천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해석이 얼마든지가능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의미가 사뭇 달라졌다. 흔히 중화의 요건으로는 공간(중원)·종족(한인)·문화(유교) 세 가지를 보는데, 고려에서는 종족 기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복왕조conquest dynasty의 시대였기에 한인이라는 종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고려의 상황만 복잡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화이관으로 무장한 주자학이 아직 나오지않았거나, 등장했더라도 아직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사정이 달랐다. 조빈의 주장에도 나오듯이, 조선 태조가 천조(명)를 치러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새 왕조를 세운 일은 존왕尊王의 실천이었다. 또한 지금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 몰린 상태임에도 척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명을 단순히 강대국으로만 간주한게 아니라 유교적 중화 문명을 담지한 천자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곧 군사력의 강약을 초월하여 문명론 차원에서 중화를 인식한 결과였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의리라는 국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당시 양반 지배층이 골몰한 고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식지 않던 척화론이 다시금 거세게 타오른 결정적 계기는홍타이지의 청제였다. 천명을 받은 천자인 황제가 둘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형편에 따라 절충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정묘년의 맹약은 이제 폐기 수순을 밟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청과 조선의 관계도 더는 형제 관계일 수 없었다. 군부인 명 황제에 등을 돌리고 청 황제를 새 군주로 섬기지 않는다면,
다른 말로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 곧 국가정체성을 시세에 따라 바꿀 수 없다면 전쟁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조선의 패배는 명약관화하였다.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정묘년(1627)에 맹약을 맺으며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후금과 형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아우였다. 이것은 조선 건국전부터 야인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이들의 후예를 형으로 삼은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맹약에서 명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군부를 공격하는 이적에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형님으로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조선의 조야가 들끓었다. 정변으로 집권한 지 4년 만에 인조 정권이 후금과 덥석 강화한 현실은 ‘반정‘의 정당성까지 뒤흔들었다. 반정의 핵심 명분은 광해군이자행한 폐모廢母 인목대비 폐위 논의)와 배명背明 행위였는데, 이제 그 양 날개 가운데 ‘배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더 심한 배명, 곧 패륜을 저지른 꼴이었다. 실제로도 그 후유증이 매우 컸다. "이름은 화친이지만 실은 항복입니다"라는 사간 윤황尹煌(1571~1639)의 직설은 그 좋은 예이다. 항복이라는 말에 발끈한 인조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윤황을 극구 두둔한 대간과 신료들의 외침은 후금과 맺은 맹약(화친)의 후폭풍이 엄청났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가 병자호란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척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요컨대 대조선 온건파인 누르하치가 죽고 강경파 홍타이지가 즉위한 사건, 곧 후금의 군주 교체가 정묘호란의 직접 동인이었다. 조선 침공이야말로 후금의 칸이 바뀌었음을 내외에 분명히 각인시키는 큰 ‘이벤트‘이자, 누르하치도 하지 못하던 일을 단번에 성취한 혁혁한 전과였다. 조선에 대한 군사 작전과 맹약 체결을 통해 홍타이지는 자신의 전략이 옳았음을 만천하에 증명할 수 있었다.
정묘호란의 배경과 동인 및 목적은 후금 내부의 사정이 변하면 언제라도 바뀔 수 있었다. 전쟁의 독립 변수는 언제나 후금(청)이었다. 조선이 먼저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고, 그럴 형편도 전혀 아니었다. 실제로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를 선언한 1636년을 기점으로 대조선 정책은 본질적으로크게 변하였다. 그간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꿔야 한다는 청의 거센 압박이 그 단적인 사례다. 이런 정세 변화는 그렇지 않아도조선의 조야에 가득하던 척화론에 다시금 기름을 부었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