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면 5·18민중항쟁 39주년이다. 5.18 국립묘지에서는 매년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된다. 광주시장을 비롯하여 고위 관료들이나 정치인이 대거 참석하는데, 어떤 때는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한다. 나 역시 매년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감히 기념식장에 앉아 5월 영령들을 바로 쳐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5월은 나에게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증언자이자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녹두서점은 학생이나 운동권과 연관되어 있던사람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 책도 그들 중심의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 밥도 못 먹었다는 청년, 양말이라도 갈아 신었으면 좋겠다던 어린 시민군,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에 밥이라도 해 주고 싶어 자신은 남아 있겠다던 아주머니, 버스터미널에서 구두를 닦다가 공수의 만행에 떨쳐 일어선 박래풍, 술집에서 술을 팔다가 항쟁에 발벗고 뛰어든 아가씨! 이 책은 바로 이들에 대한 헌사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괴감이 온몸을 감싼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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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통일운동을 했거나 진보운동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서면 오히려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며 현장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운동권의 일선에 있던 사람들도 ‘모든 죄를 운동권에 뒤집어씌울 것이란 이유로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현장을지킨 운동권은 야학이나 극단 광대, 신협이나 양서조합 같은 운동권 이선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조직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남 일대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이양현은 자신이 참여함으로써 막 싹트는 노동운동을 말아먹을 수도 있다며 노심초사했다. 어떤 사람은 당시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한 것처럼 과장하기도 하지만 실체 없는 이야기이다. 함평고구마사건 2주년을 준비하던 가톨릭농민회 조직도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 동화작가이자 농민운동가였던 윤기현도 개인 신분으로 참여한 것이지 전혀 농민 조직을 동원하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항쟁의 도화선 노릇을 했지만 막상 사태가 커지자 극히 일부만 남았다. 책임져야 할 학생 지도부와 운동권 일선이 사라진 공백을 다행히 운동권 이선에 있던 사람들과 밑바닥 사람들이 메워 주었다. 수백 명이 죽었는데 학생 지도부나 운동권 일선은 아무도 죽지않았다. 옥중에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을 전개한 박관현만 죽었을 뿐이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는데, 자수한 학생 지도부를포함해 운동권 사람들은 100명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 농민들이 주력 부대였던 것도 아니다. 중산층 시민들이 중심이었다고 할수도 없다.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공간을 목숨 걸고 지킨 사람들은 실로 기층민중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기층민중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렇게 장렬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5월 27일 새벽, 그 애절한 방송을 듣고서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가지 못했던 많은 광주시민은 그 일 때문에 모두 마음에 큰 병이 들고 말았다. 광주는 아직도 그 병이 완치되지 않아 신음하고 있는 도시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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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인조를 뒤이어 효종이 즉위하였다. 그에게는 국왕으로서 돌파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분명하였다. 소현세자의 급사이후 신료의 과반이 자신(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던 효종은 정통성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했다.
삼전도 항복과 명의 몰락이 몰고 온 국내외 위기와 정신적 공황을 타개함으로써 조선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문제도 당면 과제였다. 이 장에서는 두 번째 문제, 곧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에 직격탄을 맞은 삼전도 항복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의 실상을 고찰한다. 특히 이것이 사대부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국내용 정치 선전propaganda이었다는 데에 중점을 두어 살핀다. 숭명배청 의식으로 무장한 양반 신료들의 마음을 다시금 조선왕조의 깃발 아래 모을 수 있다면, 왕조의 안정은 물론이고 효종 자신의 왕권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복안대로 진행하기에는 당시의 국내외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이 북벌 논의로 뜨겁던 바로 그때, 청은 흑룡강일대의 나선羅禪(러시아)을 토벌한다며 조선에 총수병銃手兵 파견을 요구하였다. 청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즉각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청의 강압으로 출병한 나선정벌 (1654, 1658)은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남겼다. 북벌 담론이 휩쓸던 시대에 북벌을 실행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정벌의 대상인 오랑캐 청의 지휘를 받아 출정한 데 따른 정신적 충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를 무시한 채 한반도안에서만 들끓은 북벌 담론이 언제까지 영원할 수도 없었다.  - P163

그렇다면 효종이 바보였을까? 그럴 리는 없다. 8년간의 포로 생활에 더해 외줄 타기와도 같던 즉위 과정을 거치며 그는 이미눈치 10단의 경지에 오른 왕이었다. 따라서 효종의 저런 우스꽝스러운 북벌 계획이야말로, 실은 북벌 실행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벌‘을 이용한 냄새가 매우 강하게 풍긴다. 솔직히, 8년 동안이나 심양과 북경에 인질로 있으면서 청의 군대를따라 종군한 경험도 있는 효종이 과연 북벌이 정말 가능하다고 순진하게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청에 우호적이던 형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갑자기 요절한 사실을 알아했고, 그 후로도 왕위 계승 문제로 홍역을 치른 효종이야말로 국내정세의 흐름과 유림의 동향을 정확히 읽고 그 타개책으로 자신이 북벌론을 선도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북벌은 공황에 빠진 양반사대부들을 규합하기 위한 적극적 정치 공세였다. 효종의 목표는 저 멀리 산해관이 아니라 오히려 왕의 주위에 세세토록 진영을구축한 세습적 양반사대부였다.
실제로도 북벌 담론은 조선왕조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매우 중요하게 기능했다.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는 정치 선전에 가까웠지만, 북벌론은 한동안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곧 명질서가 무너지고 천자가 사라져버린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 속에서국왕과 지배양반층은 이해관계를 함께해 절치부심의 북벌 담론을생성하고 공유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를 다시금 분명히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전도 항복 이후 흐트러진 국내의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라는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있었다. 청을 상대로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기보다는 삼전도항복 이후 위기에 봉착한 국내 통치 질서와 기존의 양반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내용 정치 선전이었다. 이렇듯, 다분히 관념적인 북벌론은 그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인조 사후 약 20~30년동안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작동할 수 있었다. - P168

나선정벌이 조선의 파병 역사에서 갖는 독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랑캐를 치러 출정한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파병 명분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상국(명)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면 명분은 더욱 튼튼해진다. 반면에 오랑캐인 청의 요구를 받고 상국을 치러나가는 출정이라면 그 명분은 땅에 떨어지는 정도를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나선정벌에 나서며 조선의 조야가 느낀 자괴감과 그에 따른 패닉 상황은 이 두경우가 뒤섞인 심리였다. - P177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였다. 나선정벌 경험이 ‘트라우마‘가된 근본 이유는 청의 징병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숙종은 청의 존재를 지운 채, 처음부터 조선의 필요에 따라 조선 스스로 북쪽 오랑캐를 치러 나가 승리한, 그래서 결국 북벌에 성공했다는 내용으로 제문을 작성하였다. 비록 청을 정벌한 것은 아니지만, 청도 제압하기 힘들던 또 다른 ‘북쪽 오랑캐‘ 러시아를 조선의 힘으로 토벌했다는 심리적 전이를 국왕의 이름으로 공언한 셈이었다. 이제 나선정벌은 처음부터 조선이 조선의 필요로일으킨 북벌 원정으로 둔갑하였다. 숙종이 ‘북벌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나선정벌이야말로 북벌의 가시적 성과물로 포장되어 새로운 기억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 P182

역사 기억 바꾸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종종 등장하는 타개책이다. 역사 기억은 그 기억의 대상인 사건의 실상과 유리되는 경향이 강하다. 기억의 대상은 과거의 사건(경험)이지만 기억 자체는 현재의 행위이므로, 기억의 대상 사건과 그 사건을 기억하는 행위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의 기억 자체가 자연스레 변하는 점도 이런 차이를 만드는 주요변수이다. 특히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집단적 기억 collective memory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의도적 왜곡과 날조가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기억 전환 과정에는 국가 권력이 으레 개입하기 마련인지라, 집단적 기억의 형성과 전환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장에서 다룬 효종 대 북벌론이 국가정체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면, 나선정벌에 대한 기억 바꾸기는 국가 권력이 주도한 역사 날조라 할 수 있다. 모두 삼전도 항복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국가정체성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국내용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다. - P186

거사의 양대 명분은 광해군이 자행한 배명과 폐모 행위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 점은 거사 다음 날 인목대비 이름으로 반또한 폐위 및 책봉 교서, 이른바 ‘반정교서‘에 분명하였다. 그런데 맹약 체결과 삼전도 항복을 계기로 배명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폐모는 더욱 목청을 높여 강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인조의 행장을 비롯하여 항복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자료에서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 행위에 맞추고, 배명 행위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이런 변화를 알려주는 좋은 증거이다. 인조 정권의 이념적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반정의 양대 명분 중에서 하나를 잃고 다른 하나만으로 정상적으로 비행하기는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아직 붙어 있는 한쪽 날개를 더욱 소중히 여겨 강조하는 한편 이미 없어진 다른 쪽 날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선전하였다.
국가정체성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양반 지식인사이에 팽배한 반정 명분의 기억 조작은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료를 조작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 P204

정변(반정)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로 연결된 사건이므로, 반정교서는 그 전문을 [광해군일기] 말미에도 실었고, [인조실록』서두에도 전재하였다.

①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깨트려 위로는 황조皇朝에 죄지었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샀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임금(답게) 백성을 사랑하고 조종의 천위에 거하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한다. 
②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깨트려 위로는 종사宗社에 죄지었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샀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임금(답게) 백성을 사랑하고 조종의 천위에 거하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하고 잘 헤아려 (적당한 곳에) 살게 한다. 

①은 『광해군일기』 버전이다. 여기서는 광해군의 죄악으로위로는 황조, 곧 명에게 죄를 지었다고 명시하였다. 거사 다음 날 반포한 것으로, 최고의 1차 자료이다. 그런데 삼전도 항복과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 편찬한 ②의 『인조실록』 버전에서는 ‘황조‘라는 단어를 ‘종사‘로 바꿔버렸다. 광해군보다 인조가 더욱 심하게 명을 배신했으니, 그의 실록에 교서 내용을 그대로 적기가 어려웠던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의 2장에서 살폈듯이, 광해군은 감군어사가 들고 온 황제의 추가 징병 칙서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제후로서 황제에게 등을 돌린 셈이었다. 그런데 인조 자신은 아예 아버지의 원수 앞에 나아가 항복 의례까지 행하며 목숨을 부지하였다. 따라서 『인조실록』에 광해군을 폐위한 명분을 그대로 실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인조 즉위의 정당성을 밝혀주는 반정교서를 싣지않을 수도 없었다.
마침내 찾아낸 묘수는 "황조"를 "종사", 곧 조선의 종묘사직으로 바꿔치기하는 기록 조작이었다. 광해군이 득죄得罪한 대상을 명 황제의 조정에서 명에게 200년 이상 사대한 조선의 선왕들로 슬쩍 교체한 것이다. 이렇듯 정변(반정)의 명분에는 시간의 흐름과 상황 변화에 따라 전환과 조작이 적잖이 발생하였다. 그만큼 반정의 성격도 애초와는 다르게 기억되었고, 조작된 기억이 곧 기정사실화의 길을 걸었다. - P205

‘조선중화‘ 의식은 ‘근대‘의 파고가 밀어닥친 19세기에도 강고하였다. 이런 의식은 청은 곧 이적이라는 인식과 상통하는데, 개항 시기 의병 운동을 주도한 위정척사 계열에서 두드러졌다. 위정척사라는 말만 보아도, 정이 근대적 개념의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 교조화한 배타적 유교 문명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척결 대상인 사邪의 범주도 분명해진다. 유교적인 게 아니면 모두 ‘사‘라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1970년대 유신 시절만 해도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민족주의 운동으로 배웠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1980년대 중후반에는 교과서에서 그런 설명이 죄다 사라졌다. 조국과 민족보다 중세적 유교 가치를 중시한 위정척사파를 민족주의nationalism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음이 워낙 자명했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선구자로 알려진 박규수朴珪壽(1807~1877)조차도 명에 대한 의리론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청의 내정간섭이 극심하던 1884~1886년 사이에 고종의 대보단 친례가 유례없이 급증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흥미롭다.  위기에 처할 때면 청의 북경에 SOS를 치면서도, 그런 청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고종의 기본 심리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면으로는, 조선은 개항(1876)을 지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사실상 망할 때까지도 삼전도 항복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수 있다. - P219

여기서 이런 문제를 장황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말하려는 핵심은 이렇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 배외비싸 움직임은 다양하면서도 많았는데, 그런 실천의 기저에 내재한 의식의 근원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개항 이래 구국 운동에서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평을 받은 동학 천도교 종단조차 항일 구국 전쟁의 명분으로 대보단을 신성시하고 홍타이지에 대한 복수를 강조했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특히 웬만한 지식인이라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의미를 이미 적잖이 숙지한 20세기에 들어선 후에 등장한 저런 기도문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데까지 문제의식이 미칠 때, 비로소 삼전도 항복의 충격과 그 강력한 여파를 통시적 관점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앞서 거론한 천도교 사례에서 보듯, 19세기 말 위정척사의 뿌리가 17세기 중엽 척화론과도 직결되는 양상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개항 후의 국가 위기에서도 소수의 개화파보다는 위정척사가 다수를 점했고, 그래서 지식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 상황 전개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그만큼이 땅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는 얘기다. - P223

일전의 ‘건국절‘ 파동이나 최근의 "홍범도 홍상" 및 "건국전쟁" 논란 등은 모두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다. 학계에서 한때 뜨거웠던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논쟁도 비슷한 자장 안에서 발생하였다. 이승만을 국부, 곧 나라의 아버지로 위치하려는 요즘의 일부 움직임도, 한국의 근대화를 무조건 일본 덕으로 설명해버리는 뉴라이트 그룹도, 한국의 근대화를 오로지 자생적·자율적으로 보려는 민족주의 계열도, 학문으로서의 역사보다는 이념으로 역사를 다루는 데에 아주 익숙하다. 이념 논쟁이 심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이 무엇인지 아직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분단의 진짜 비극은 바로 여기에도 있다.
이제 이 ‘긴‘ 에필로그를 정리해보자.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 정의한다면, 또는 역사란 "현재완료 진행형"이라고 내방식대로 정의한다면, 병자호란이라는 조선의 경험을 현재로 끌어와 악화일로의 신냉전 상황과 유비하며 대화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그 화두가 국가정체성이라면 이를 나위도 없다. 17세기에 국가정체성 문제로 큰 곤욕을 치른 쓰라린 경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현재로 끌어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연동하여 고민해보자는 제안만으로도 이 에필로그에 어느 정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외교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있어야 하며, 실제로도 그럴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제 무대에서 외교의 한 대상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그래서 자식으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버릴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규정한다면, 그 나라에 외교란 존재할 수 없을 테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 외에는 달리 취할 행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림자" 안에 거하면서는 주체적 외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라 해도 어릴 때라면 모를까 성인이 된 후에는 자기 노선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동맹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자기외교가 있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제 무대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권국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 다룬 17세기 조선은 국가정체성이 너무 절대 이념화한 나머지 국제 환경의 변화에 융통성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사대한 지 200년이 넘도록 성인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으며, 몸은 성인인데도 정신적으로는 "아버지의 그림자" 밖으로 나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배 엘리트들의 그런 선택은 이후 조선왕조의 진화 방향성마저 좌우해버렸다. 그렇다면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이 외교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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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낮에는 고문에 시달렸고, 밤에는 옆 사람의 신음과 울음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치장은 점점 수감자가 늘어나 잠잘 때 열으로 누워서 아침까지 칼잠을 자야 했고, 밥은 꽁보리밥에 노란 물감이 묻어 있는 단무지 두세 조각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도저히 참을 수없는 고통은 사실 속옷과 생리대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생리대는 한 사람에게 하루에 하나씩 제공되었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모욕적인 언사가 따라왔다. 날마다 수사받으러 상무대로 들락날락하면서 여성들은 무지하게 맞고 돌아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엉덩이 전체가 시퍼렇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특히 항쟁 당시 방송했던 여성들은 고문으로 수시로 하혈했고, 하혈을 멈추기 위해 국군통합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신체적 고통보다 간첩 행위자로 조사받는 일이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 P268

피를 말리는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조사가 느슨해지는것 같았다. 6월 말에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이 잡혀 오거나 자수하여 수사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이른바 광주사태를 북한의 지령으로 일어난 폭동에서 김대중과 연관된 사건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 나는 그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박관현 학생회장 선거에 상당한 비용을 지원했고, 그 비용은 김대중이 정동년을 통해 지원한 것으로 날조되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시동생 김상집과 김현주 그리고 아내인 나와 내 동생 정현순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들을 볼모로 삼아 남편에 대한 고문을 강화했다. 나 역시 보강 조사를 받기 위해 상무대 영창에 자주 갔고, 가끔 맨발로 조사실에 들어가는 남편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다. 한번은 남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목격해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수사관도 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고 그럴수록 초조하기만 했다.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 방침이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 P269

가족들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자료를 전달하면서, 20사단의 광주 이동에 미국이 동의한 사실, 5.18 항쟁 당시 미국인들을 광주군사공항에 피신시킨 사실 그리고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고 발언한 신문 기사를 보여 주며 미국의 책임을 따지자 참사가 자리를 피해 버렸다고 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두고 나왔다는데, 이 편지는 실제로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해진 것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
우리는 미국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고 광주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1월말경 우리는 광주 미문화원장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미문화원장에게 강도 높게 미국의 책임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미문화원장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 180도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왔다"는 미국대사관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가장 연장자였던 윤이정 여사가 참고 참다가 그녀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홍시 빨아먹듯이 우리를 빨아먹기만 한다."
1981년 5월, 우리 가족들은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다시 한 번 광주미문화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형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쫓아냈다. 미국의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광주 미문화원은 분노한 운동권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고, 결국 위치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타 지역에 설치되었던 미문화원들도 이후 분노한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된다. - P288

"청와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전두환이 전격적으로 면담을 했지만,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광주로 내려가서 기다리는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고생만 합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별말씀이 없으셨고, 먼저 광주로 가시기 위해 지하성당을 나가셨다. 추기경은 우주선을 타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우주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서 가족들을 위로했다. 단식농성 중이라보기에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형이 풀어지기 전에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사형수들의 목숨이위험한 상황에서 구속자 수배자들의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계속 농성하겠습니다."
나는 뒤쪽으로 물러나 정형달 신부와 이 답답한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청와대 면담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사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전두환은 이런 사건에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되풀이하며 주장했다고 한다. 전두환의 주장에 대주교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도 모자라서 또 사형을 시키겠다고? 결국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거겠지.‘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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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1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남여고 쪽1에서 공수부대 차량 10여 대가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곧바로 차에서 내리더니 일부는 총에 착검을 하고 일부는 곤봉을든 상태로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앞에 총! 제자리 뛰어! 돌격 앞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우리들은 그들의 기세에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앞에 몇 사람이 있었는데 뒤로 밀리다 보니 어느새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 공수들은 "앞에 총!"을 외치고 느릿느릿 달려오더니 눈앞까지 와서는 "찔러총!"을 외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바로 내 뒤에서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의 욕설이 들렸다. 그들은 무조건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충검을 찌르고 곤봉을 훅훅 휘두르는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자리를 빨리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비집고 들어가 우왕좌왕하다가 동계천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청운학원 뒷골목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려고 돌아섰는1데, 도망쳐 온 일행 중 바로 내 뒷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와 눈이마주쳤다.
"나 찔렸어." 그러고는 순간 ‘푹‘하고 고꾸라졌다.
"그는 대검에 등을 찔려 숨을 내쉴 때마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P161

조사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 나는 대공수사팀인 3과로 옮겨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3과로 옮길 무렵 신군부는 소위 광주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의한 내란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울 보안대 본부에서 특수공작 총괄 임무를 맡고 내려온 홍성률 대령이 ‘광주를 빨갛게 색칠하면 영원히 화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신군부가 받아들여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가 철회되었다고 한다. - P233

그즈음 광주사태에 대한 윤곽이 대체로 드러났다. 결국 호남 지역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수사관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지역 출신 수사관들은 ‘이제 그만 고문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어쩔때는 우리에게 연민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업무는 업무여서황의섭은 내 고향인 장성을 여러 번 방문하여 우리 집안에 관한 조사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6.25 전쟁 때 여덟 식구가 학살당해, 오히려 반공 집안이라는 증언만 들었던 모양이다. 황의섭은 많은 조서를 작성했으나 그 내용은 중복될 수밖에 없었고, 포고령 위반 이외에 다른 내용을 추가할 수 없었다.
사실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으로 만들 계획이었다면,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사람 중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나를 빨갱이로 만든다면 도청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빨갛게 칠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광풍은 몰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자가 될 때까지도 적색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당시에 적색공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강해 ‘자신이 죽은 뒤에 가족까지 죽이는‘ 천형에 가까운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 P234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내가 교수님들에게 받은 돈을 감추지 못하고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이 속상했다. 확인 조사를 받으면서 교수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작금의 사태가 포고령 위반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거대한 역사의 파고에 휩쏠리고 있다는, 그리고 그 파고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야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런 죄송할 일이 얼마나 더 생길지 알수 없었다. 나는 김지하 선배의 시처럼 "저 밑 모를 어지러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41

별을 몇 개씩 달고 있는 장군들이 여러 명 재판석에 앉아 있었다. 헌병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는 법정에서 준엄한 선고가 이어졌다.
"정동년 사형!"
"김상윤 징역 20년!"
그리고 연이어 후배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징역 20년‘이라는 선고를 듣자 하늘을 나는 듯 기쁨에 휩싸였다. 나는 당연히 사형이 선고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청석을 돌아보니 여동생 현주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동년 선배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오빠가 사형을 면했다고 하여 대놓고 기쁨을 드러낼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선고가 끝나고 정동년 선배와 나 그리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같은 차를 타고 교도소로 돌아갔다. 차가 출발했는데 뒤에서 정동년 선배의 부인이 하염없이 울면서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 죽지 않습니다.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정동년 선배는 교도소로 돌아올 때까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댔다. 망연하지만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교도소에 돌아와 독방에 홀로 있으니 사형을 면했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내가 조사를 잘못 받아 정동년 선배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자신은 죽음을 면했다고 날아갈 듯 기뻐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이 떠오르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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