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이 되자, 그녀는 죽음을 포기하고 다시 먹이를 구하러 나섰다. 그녀는 더이상 트럭 운전사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녀는 자신을 임신시켜놓고 떠난 사내의 무책임과 자신의 고통을연관지어 생각할 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신의 내부에서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 P404

그렇다면 왜 그녀는 벽돌을 굽는 일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을까? 그녀는 그 단조로운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걸까? 그 작업 안에 어떤 종교적 희원이 담겨 있었다면 그 바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그 열정의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 P406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413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춘희는 뭔가 더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뗄 사이도 없이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광대한 성간에는 희미한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꼬마 아가씨, 안녕.
코끼리, 너도 안녕.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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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한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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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뿌리박혀 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 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순진하고 무지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사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그것은권선징악의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부는 재능과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디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든.
- P68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 P71

"내가 과연 선택 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를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돈을 벌어 마음껏 써보려고 일하는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의 일탈이며, 일종의 부패로 여겨졌다.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로록 절제하는 이런 규제된 접근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을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애초의 종교적 동기가 사라진 뒤에도,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축적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에 충실해서 보면 이 드라마의 주요포인트는 능력과 은총 사이의 고조된 긴장에 있다. 평생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본인이(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
- P74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능력주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지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베버는 이렇게 본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자는 때때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 표현하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한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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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은 눈이 점점 멀어져 이때쯤엔 겨우 서너 발짝 앞에 떨어져 있는 물체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그의 눈앞엔 오래 전 그가 고향마을에서 보았던 구름이 걸린 앞산의 풍경과 햇빛에 반짝이던 강물, 언젠가 그가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를하러 갔다가 굴 속에서 발견한 승냥이의 새끼, 또한 오래 전 헤어진 가족의 얼굴과 고향 친지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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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은 1년 반 뒤 자신의 대선 전략을 평가 반성하면서 자신의 패배에 기여했던 능력주의적 오만을 드러내보였다. "저는 미국GDP의 삼분의 이를 생산하는 지역의 삼분의 이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녀는 2018년 뭄바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낙관적이고,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고장들에서 이겼답니다." 트럼프에 대해선 "혹인의 권리를 못마땅해 하고", "여성들이일터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고장들에서 이겼다고 했다. 그녀는세계화 승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트럼프는 ‘루저들의 지지를 얻었다."1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한때 특권층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능력주의의 시대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은 "그래도 나는 미국의 부자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라며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 P55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시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대부분 맞아 들어간다.
- P5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더더욱)그렇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바람직하다. 이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주어진 결과, lot)‘라고 말할 때 그것은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 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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