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선생! 권선생! 집에 기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였다. 그는 마누라를 시켜 벌써 출근했다고 거짓말을 하게 했다. 누군지 모를 사내를 따돌리고 나서 그제야 생각해보니 화요일이 아닌가. 일요일도 아닌데 여태껏 출근하지 않고 빈둥거린 그 이유는 또 뭔가. 별안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의타심이었다. 자기도 깊이 관련된 일에 정작자기는 뛰어들 의사가 없으면서도 남들의 힘으로 그 일이 성취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기회주의의 자세였다. 그것은 역지없이 하나의 자각이면서 동시에 부끄러움의 확인이었다. 그는 후닥닥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길을 가득 메운 채 손에몽둥이와 각종 연장 따위를 들고 출장소 쪽으로 구호를 외치며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과 마주쳤을 때 그는 낮도둑처럼 얼른 샛길로 몸을 피했다. 부끄럽게 자신을 깨달은 뒤끝이니까 한 번쯤 발길이 그들 쪽으로 향할 법도 하건만 그의 눈은 완강하게 서울로 가는 버스만 찾고 있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 P152

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꿔져버립니다.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니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 떼처럼 달라붙습니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니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 먹는 그 자체는 결코아름다운 장면이 못 되었어요. 다만 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주워 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꽉 부딪쳐옵니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 나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디다. 내가 맑은 정신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 P156

"보고도 몰라? 소라 산림감시소 산감님이다."
"없네, 집에다 두고 왔네."
요놈 자식 좋게 말혀서 안 듣누만, 감시소로 가자!"
"너 이노옴!"
이번에는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그 소리가 또 메아리쳐서 되돌아왔다. 너 이노옴옴옴.
"어려려, 도적놈이 감히 누구더러 됩데 큰소리여!"
"자식놈 듣는 자리서 얻다 대고 함부로 놈짜를 팡팡 놓느냐!"
"허허허허......"
하도 어이가 없었던지 산감이 한참이나 너털웃음을 쏟아놓았다.
"그렇게 자식 어려운 줄 아는 놈이 자식까장 앞세우고 도적질댕기느냐?"
"어허, 그 도적 소리 고만두지 못허까. 우리 이럴 게 아니라애나 먼저 보내놓고 단둘이서 죄용히 얘기허세."
"무신 소리! 애도 같이 끌고 가야지."
"자네는 자식도 없능가? 애비가 못 당헐 꼴을 당하는 걸 아무죄도 없는 자식이 꼭 봐야만 자네 직성이 풀리겄능가?"
"아까부터 이놈이 누구보고 건방지게 자네, 자네여!"
산감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나를 보내고 안 보내는 문제에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를 삼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아버지가 나 있는 쪽을 어림으로 지목하면서 눈짓을 했다. 빨리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걸음아 날 살려라고 숲 사이를 빠져 나는 골짜기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P184

그러는 아버지를 두고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파는 분량의 겨우 3분의 1에나 미칠까말까 하는 수확이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아버지의 장대가 바로아버지 자신을 배반하고 능멸한 결과였다.
"너도 그렇다고 믿냐?"
한참 만에 아버지가 하늘을 상대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 애비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믿고있냐?"
아버지는 다름 아닌 나를 상대로 묻고 있었다. 엉겁결에 나는전에 자주 들은 풍월을 고대로 옮겨버렸다.
"안 그래요! 시국을 잘못 만나서 운수가 불길혀서 그래요!"
"허허, 고녀 자석!"
웃었다.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버지를 웃겼다. 장남인내가 마침내 내 힘으로 아버지를 웃게 만든 것이다.
"너 욜로 좀 들어오니라. 부자지간에 어디 한번 짱짜란히 둔눠서 하늘이나 구경허자. 요렇게 네모 틀 너머로 보니께 하늘이여간만 곱들 않구나."
나는 아버지의 분부를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은 조금도 틀린 데가 없었다. 정말로 하늘은 고왔다. 드높이 매달린 파란 하늘을 소담한 구름 덩이 하나가 한가하게 질러가고있었다. 아버지 말마따나 네모 틀 안에 가두고 바라보기 때문에더욱더 곱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 P199

"달기님, 달기님."
타원형의 둥우리 앞에 나를 세워놓고 외할머니는 닭들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려가며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비기 시작했다.
"달기님들이나 밤똥 누지 어디 사람이 밤똥 눈답디어?"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닭들이 꼬꼬거렸다.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외할머니가 열심히 치성을 드리는 동안 나는 마개를 막듯이 손바닥으로 똥구멍을 틀어막고는 다리를 쉴 새 없이 비비 꼬면서 겅중거렸다.
"가온뎃말 사는 쇤네 외손자 우리 김동만이가 요렇게 비나이다. 오늘 한 번만 더 누고 차후로 다시는 밤똥 누는 일이 없게 달기님이 살펴주사이다. 가온뎃말 김동만이 똥까장 달기님이 맡어서 다 싸주사이다."
이어서 외할머니는 외손자를 통하여 치성의 효험을 보여준닭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에 치성 드린이후로 나는 사흘 동안 내리 밤똥을 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효험이란 게 언제나 사나흘 정도를 넘기는 법이 드물었다. 며칠만 지나고 나면 도로 마찬가지가 되곤 했던 것이다 - P220

"저 동근입니다. 형님!"
아내를 한 걸음 앞질러 낯선 청년이 마당으로 쑥 들어서면서이렇게 외쳤다. 나는 그 순간 말문이 꽉 막혀 자기가 김동근임을 자처하는 그 낯선 청년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그사이에 나는 그가 전혀 낯선 얼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에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얼굴임을, 다시말해서 절반은 우리 당숙을 닮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 당숙모를닮은 듯한 생김생김임을 차차로 깨닫게 되었다.
"이게 얼마만이냐......"나는 뒤늦게 입을 열어 내 재종동생을 맞으면서 그 녀석이 무슨 일로 그처럼 서둘러 나를 찾아왔는지를 얼핏 깨달았다. 녀석은 이제 틀림없이 나한테 이렇게 물을 것이었다.
형님,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은 어떤 빛깔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하늘에 뭐가 뜨는지 아십니까?
(1978)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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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경험담도 공포를 일으키고 전염병을 부채질하는데,이는 사람들의 상상이 단순한 통계보다 파급력이 훨씬 더 크기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특정 사례가 얼마나 예시적이거나 특별한지를 더 상세하게 알려줄 기본 정보는 무시하면서도 생생하고 특별한 사례에는 집중하는, 어쩌면 당연한 성향이 있다. 이를기저율 오류 base-rate fallacy라고 하며 숨겨진 진실을 평가하지 않고 하나의 사례에서 곧바로 결론으로 도약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가리킨다. 경험담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잡아끌면서 이 문제를 악화할 수 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관찰은 불합리한 추론의 도약을 미묘하게 부추기기도 한다. 20~21세기에 걸쳐 암 발생률이 심각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며, 20세기 동안 대략 셋 중 하나는 어 - P90

떤 종류든 암이 발생했다. 더 최근 결과를 보면 이 비율은 심각하게 높아졌으며, 인구의 절반이 평생 한 번은 암에 걸린다. 이는매우 놀라운 결과로, 많은 사람이 희생양을 찾아 헤매며 유전자변형 식품부터 백신까지 온갖 것을 탓하기 쉽다. 과학 정보를 더많이 아는 사람조차 범인을 찾으려 들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을 뿐이다. 사실 지금보다 암 생존율이 높은 적이 없었고 진단법과 치료법이 향상되면서 생존율은 계속 높아지는 중이다.
암은 기본적으로 노화가 원인인 질병이며 암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단 하나, ‘나이‘다. 선조들을 괴롭힌 불결한 위생과 절망적인역병, 전염병이라는 장황한 위험을 대부분 회피한 인간은 이제장수한다. 암 발생률의 명백한 상승은 역설적이게도 사회 보건건강이 향상된 결과다. 그러나 암 발생률만 홀로 상승했다는 사실은 현실 상황과 대립하는 논리적 비약을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주의점이 하나 있다. 만약 경험담을 믿을 수없다면 어떻게 자료를 모아야 할까? 수많은 일화는 자료가 아니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일화, 즉 경험담은 정확하게만 보고한다면 시스템을 통해 나올 만한 결과에 대한 통찰을 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일화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없는것은 그 결과가 대표성이 있는지 혹은 보편성이 있는지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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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화장한 흔적 같은 것도 없으나 꽤 생길 만큼 생긴 축에 드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본래의 미를 제치고 깃발처럼 솟은 궁핍의 찌꺼기가 한창 나이의 얼굴에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이화명충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성숙 이전에 생장을 정지당해버린 초본식물과도 같은 인상이 들었다. 또한 궁핍의 계속이 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한쪽서부터 차근차근 먹어들어 음충스러운 노파로 급속히 변모시켜가는 일관작업의 과정을 도해圖解까지 곁들여 열람하고 있는 기분이어서, 저게 바로 타인의 형식을 빌려 나타난 자화상이 아닌가하고 박은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 P91

보아하니 권 씨의 구두 닦기 실력은 보통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다. 사용하는 도구들도 전문 직업인 못잖이 구색을 맞춰 일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 위엔 앞치마 대용으로 헌 내의를 펼쳐 단벌 외출복의 오손에 대비하고 있었다. 흙과 먼지를 죄 털어낸 다음 그는 손가락에 감긴 헝겊에 약을 묻혀 퉤퉤 침을 뱉어가며 칠했다. 비잉 둘러가며 구두 전체에 약을 한 벌 올리고 나서 가볍게 솔질을 가하여 웬만큼 윤이 나자 이번엔 우단조각으로 싹싹 문질러 결정적으로 광을 내었다. 내 보기엔 그런정도만으로도 훌륭한 것 같은데 권 씨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만한 일에도 무척 힘이 드는지권 씨는 땀을 흘렸다. 숨을 헉헉거렸다. 침을 퉤퉤 뱉었다. 실상 그것은 침이 아니었다. 구두를 구두 아닌 무엇으로, 구두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발에다 꿰차는 물건이 아니라, 얼굴 같은 데를 장식하는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엉뚱한 의지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신들린 마음에서 솟는 끈끈한 분비물이었다. 권 씨의 손이 방추紡錘처럼 기민하게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도금을 올린 금속제인 양구두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되자 권 씨의 시선이 내 발을 거쳐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 P135

램이 옳다면 디킨스가 그른 것이고, 디킨스가 옳다면램이 그르게 된다. 가급적이면 나는 랩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디킨스의 궁둥이를 걷어찰 만큼 나는 떳떳한 기분일 수가없었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당연히그래야만 옳은 것으로 알았다. 저 친구는 휴머니스트라고 남들이 나를 불러주는 건 결코 우정에 금이 가는 대접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정부가 베푸는 제반 시혜가 사회의 밑바닥에까지고루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다방에서또는 신문지상에서 이미 갈 데까지 다 가버린 막다른 인생을 만날 적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긁어모으느라고 지금쯤 빨갛게 돈독이 올라 있을 재벌들의 눈을 후벼 파는 말들로써 저들의딱한 사정을 상쇄해버리려 했다. 저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배운 우리의 의무이자 과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술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껌팔이 아이들을 물리치는 한방법으로 주머니 속에 비상용 껌 한두 개를 휴대하고 다니기도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볼펜이나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한목에 싸잡아 가짜 고학생이라고 간단히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우리 - P141

는 소주를 마시면서 양주를 마실 날을 꿈꾸고, 수십 통의 껌값을 팁으로 던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면서 택시 합승을, 합승을하면서는 자가용을 굴릴 날을 기약했다. 램의 가슴을 배반하는 디킨스의 머리는 매우 완강한 것이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우리의 입과 손발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괴리는 우리로서는 사실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도리어 나는 그날 밤새껏 램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잠을 온전히 설치고 말았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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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입에서는 말끝마다 긴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마 잘될 거라고, 그 사람들이 약속을 그렇게 헌 고무신처럼 벗어던지지는 않을테니 너무 상심 말라고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린 듯이 턱을 잔뜩 감싸 쥔채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직은 그렇게 될 것이 거의 틀림없을 정도의 확실한 소문이 아니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맨 처음 발설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이런 판국인데 일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다고 한가하게 앉아서 사람들이나 위로해주는 아버지의 여유작작한 모습은 옆에서 봐도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하면서 다른 어른들에게도 낮은 소리로 얘기할 것을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신경통을 앓는 수족으로 하루나 이틀 후의 일기쯤 앞당겨 예감하는 늙은이들처럼 몸의 어느 부분이, 예를 들어 심장이 울렁거리고 자꾸 오줌이 마려워지는 긴장을 견디며 비극을 치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신변에 접근해오는 위협을 반사적으로 알아차려 재빨리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떤 하등동물의 생리처럼 우리는 몸을 사리면서 조심스럽게 대기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으늑한 구석 자리에 엎드려 숨을 할딱이며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끈덕지게 기다렸다.  - P54

철거일의 아침이 천천히 밝았다. 집이 헐리는 날인데도 여느때와 같이 둥근 해가 뜨고 우물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게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모든 사람이 슬픔에 짓눌려 넋을 잃고 있는데도 여느 아침이나 다름없이 배가고프고 변소에 가고 싶어지는 게 도대체 창피스럽고 미안해서 죄인처럼 잠자코 견디어야 하는 답답한 하루였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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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을 밟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면 경주네 주막집 유리창이 환히 보였다. 까치발을 디디면 경주의 자그만 몸뚱이가길 쪽으로 난 그 유리창을 닫아버리려고 끄응끙 기를 쓰는 광경이 더욱 잘 보였다. 할멈의 앙상한 팔 하나가 벽과 창문 사이 좁은 틈바귀에 꽉 물려 추욱 늘어져 있었다. 경주는 그 팔이 차지한 공간마저 아주 지워버리려고 허리를 꾸부정히 하고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창문을 밀어붙이는 것이었고, 그동안에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할멈의 모습은 전연 안 보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미 해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막집 유리창 속에는 다른 또 하나의태양이 아직도 남아 삽시에 집채를 불사를 듯이 세찬 빛살을 사방에 함부로 번득이고 있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라고 째지는 소리를 지르며 경주는 더욱 힘주어 밀어붙였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처럼 앙상한 팔뚝을 악착같이 물고 흔드는악마의 주둥이 같은 시커먼 공간은 한 치도 더 좁아지지 않았 - P27

고, 높고 길고 날카롭게 울리는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도 여전했다. 그걸 듣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살구라도 씹은 듯이 벌레먹은 어금니가 시려서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귀를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아!"
저녁놀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녹아 까맣게 사라질 때까지 두 모녀의 실랑이는 그치지 않았다. 할멈의 울음은 긴 여운을 끌며 깜깜한 하늘로 끝없이 퍼져나갔다. 드디어는 경주도 제 분을 못 이겨 땅바닥에 퍼질러 앉으며 할멈과 비슷한 소리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점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처음은 경주네 어머니가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게 슬퍼서 큰 소리로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창문이 닫히고 경주네 어머니의 모습이유리창 저편에 가려진 뒤로는 덩굴의 한 부분 같은 팔뚝 하나가틈바귀에 남아서 아프다고 소리쳐 운다. 얼마 후면 놀빛에 번쩍이는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로 울고, 나중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서로 상처를 핥아줘가며 사람보다 훨씬 크고 긴 목청을 어둡도록 뽑는다. 이쯤 되면 그 소리는 조금도 서럽지 않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정한 가락과 장단에 맞추어 주기적으로 즐기는 기쁨의 노래같이도 생각되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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