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하트의 재판이 5월 말에 시작되자 화이트는 자신의 위기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깨달았다. 헤일이 증언대에 서서, 화이트와 스미스 등 수사팀이 심문 중에 자신에게서 억지로 자백을 얻어내려고잔혹하게 굴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헤일은 수사팀이 사람들의 입을 여는 여러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뒤에서 권총의 공이치기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스미스가 맞은편에서 확 달려들어제 한쪽 어깨를 붙잡고 얼굴에 커다란 권충을 들이댔습니다.
헤일은 스미스가 뇌가 곤죽이 될 때까지 패주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화이트가 자신에게 했다는 말도 증언했다. "당신을 전기의자에 앉혀야겠군." 이 말이 끝난 뒤 요원들이 그를 특수한 의자에 밀어서 앉히고, 몸에 전선을 연결하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우고, 얼굴에는 포수의 마스크 같은 도구를 씌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계속 제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면서, 전기충격 이야기를 하더니 정말로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헤일이 말했다.
버크하트와 램지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순전히 그 때문에 자백했다는 것이었다. 헤일은 증언대에서 손짓을 크게 하면서, 전기충격으로 몸이 펄쩍 뛰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또한 요원 한 명이 허공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이렇게소리쳤다고 말했다. "사람살이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아?" - P291

판사와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재판 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질문이 하나 있었다. 백인 남성 열두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미국 인디언을 죽인 백인 남성에게 벌을줄 것인가? 한 기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척지의 목부들이 순혈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는 (...)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오세이지 부족의 한 유력인사는 이보다 노골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배심원단이 이번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가문제다. 그들은 백인이 오세이지족 인디언을 죽인 사건이 살인인지, 아니면 단순히 동물학대 행위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 P304

모두들 숨을 죽인 가운데 몰리는 계속 지켜보았다. 이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겨우 여드레 동안 증언을 들은 뒤, 양측 모두 휴식을 취했다. 검사 한 명이 최종논고에서 다음과 같이말했다. "이제 여러분이 법과 질서와 품위를 지켜 왕의 왕관을 벗겨낼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용기 있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서, 저들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평결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배심원들에게 양측에 대한 동정이나 편견을 반드시 잊어버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어떤 지점에 도달했을 때 멸망했습니다. (...) 시민들이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재판관이 배심원들에게 경고했다. 10월 28일 저녁부터 배심원들은 협의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배심원들이 벌써 결정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졌고, 친숙한 얼굴들이 법정을 채웠다.
재판관이 배심장에게 평결이 내려졌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배심장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종이 한 장을 재판관에게 건넸다. 재판관은 잠시 그것을 본 뒤 서기에게 넘겼다. 법정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벽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중에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헤일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열망이 드러났고, 램지의 얼굴은 가면 같았다. 서기는 고요한 방청석 앞에 서서 배심원들이 존 램지와 윌리엄 K. 헤일의 일급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렸다는 종이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헤일과 램지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재판관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배심원들이 오세이지족 인디언의 살해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렸습니다. 헤일 씨, 램지 씨. 따라서 선고를 내리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법에 따라 배심원들은 유죄를 인정했고, 일급살인의 경우 사형이 선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배심원들은 종신형으로 형량을 제한했습니다. 배심원들은 미국 인디언을 죽인두 남자를 기꺼이 처벌할 생각이었지만, 교수형까지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판관은 헤일과 램지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와서 서세요." 헤일은 재빨리 일어섰고, 램지는 머뭇거렸다. 재판관은 두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징역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헤일 씨?"
헤일은 텅 빈 눈으로 똑바로 앞만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램지 씨는 있습니까?"
램지는 고개만 저었다. - P311

후버에게 오세이지 살인사건 수사는 현대적인 수사국을 선전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가 바란 대로, 이 사건은 전문적이고 과학적이며 전국을 무대로 하는 수사기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많은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보안관들은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클라호마주의 검사들이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이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정부가 법무부 소속 요원들을 오세이지족의 땅으로 보냈을 때에야 비로소 법이 위엄을 얻었다. 후버는 수사국이 처음에 저지른 실수들이 드러나지 않게 신중을 기했다. 블래키 톰슨이 수사국의 감시를 받다가 탈옥해서 경찰관을 죽인 일, 처음에 방향을 잘못 잡고 헤맨 적이 너무 많아서 계속 살인사건이 발생한 사실 등을 밝히지 않았다. 그 대신 후버는 깨끗한 창조설화를 만들어냈다. 이 신화 속에서 수사국은 그의 지휘를 받아 무법적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마지막으로 남은 거친 변경지대를 제압했다. 새로운 홍보방법들을 이용하면 관료로서 자신의 힘을 더욱 키우고 개인숭배를 주입할 수 있음을 깨달은 후버는 화이트에게 언론에 공개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아시다시피, 법적인 측면과 인간적으로 관심이 가는 측면은 서로 다릅니다. 언론의 대표자들은 인간적으로 관심이 가는 측면에 관심을 보일 터이니, 그런 부분을 강조해주기 바랍니다." - P314

후버는 헤일 일당을 잡은 화이트의 수사팀을 은밀히 칭찬하며 봉급을 조금 인상해주었다("그들의 능력과 근면함을 조금이라도 인정해주기 위한 소소한 보상). 하지만 이 사건을 홍보에 이용할 때는 수사를맡은 요원들의 이름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후버의 신화 중 일부가 된 대학 출신 신참 요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후버는 부하들이 자신을 가릴 정도로 커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오세이지 부족위원회는 비밀요원들까지 포함해서 화이트의 수사팀 전원을 공개적으로 지목하며 찬사를 보낸 유일한 단체였다. 부족위원회는 결의안에서 수사팀 전원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혐의를 받는 자들을 수사해서 그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오세이지족은 또한 앞으로 또 다른 음모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의회를 설득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게 했다. 오세이지족의 피가 적어도 절반 이상 섞이지 않은 사람은 균등 수익권을 부족원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다고 규정한 법이었다. - P316

화이트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수사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교도소장이 된다면 봉급이 올라갈 뿐 아니라, 아내와 어린 아들들이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에 비해 규모가 훨씬크기는 해도, 어쨌든 아버지처럼 감옥을 관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1926년 11월 17일, 화이트가 아직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 중일때, 연방보안관들이 새로운 죄수 두 명을 차에 태워 말굽 모양의 진입로로 들어왔다. 죄수들은 자기들의 이 우울한 종착지를 둘러보았다. 리븐워스는 3만 4,000제곱미터 규모의 요새였다. 예전에 한 죄수는 옥수수밭 가운데에 서 있는 이 건물이 "넓고 넓은 무無의 바다를 떠다니는 거대한 영묘"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화이트는 족쇄를 차고 입구로 다가오는 두 죄수에게 걸어갔다. 둘 다 햇빛을 보지 못해서 얼굴이 창백했지만 화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헤일과 램지였다.
"이런, 안녕하시오, 톰." 헤일이 화이트에게 말했다. 
"안녕하시오, 빌." 화이트가 대답했다.
램지도 화이트에게 말했다. "안녕하슈."
두 사람은 화이트와 악수를 나눈 뒤,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각자 감방으로 향했다. - P317

한편 오세이지 카운티의 사람들은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헤일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몰리버크하트는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성당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백인과 크리크족의 피가 섞인 존 콥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친척들은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28년에 결혼했다.
몰리의 인생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오세이지족은 부패한 후견인 제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줄곧 투쟁한 끝에 1931년 4월 21일 법원으로부터 몰리가 더 이상 주정부의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법원은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판결한다. 오세이지 분할 토지 285번 소유주인 상기 몰리버크하트는 (…) 이로써 법적인 능력을 회복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에게 법적인 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명령은 철회된다. ‘‘몰리는 마흔네 살에야 비로소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온전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 P323

오세이지 살인사건 수사가 J. 에드거 후버에게 수사국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1930년대에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일련의 범죄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불을 지펴서 후버가 수사국을 오늘날과같은 강력한 기관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찰스 린드버그의 아이가 납치된 사건, 앨 스펜서 갱단의 조직원인 프랭크 ‘젤리‘ 내시를 이송하던 중에 충격이 벌어져 여러 경찰관이 목숨을 잃은 캔자스시티 학살극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화이트의 옛 동료인프랭크 스미스 요원도 내시의 호송대에 속해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언론인인 로버트 엉거는 스미스 요원과 또 다른 요원이 처음에는 총을 쏜 범인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주장하다가, 사건을 해결하라는 후배의 압력을 받은뒤 갑자기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리게 된 경위를 나중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사건의 여파로 의회는 일련의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 연방정부에 처음으로 포괄적인 형사법을 안겨주었으며, 수사국에도 관할구역을 광범위하게 인정해주었다. 요원들이 범인을 체포하는 것도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도 가능해졌다. 수사국의 이름 또한 곧 연방수사국 FBI으로 바뀌었다. "작은 수사국의 시대가 끝났다." 후버의 전기를 쓴 커트 젠트리는 이렇게 썼다. "특수요원들이 단순히 수사만 하던 시절 또한 끝났다.  화이트의 동생인 박사는 이 기간중에 수사국이 다룬 최대의 사건들 중 존 딜린저 같은 공공의 적을추적하는 임무에서부터 마 바커와 그녀의 아들 프레드가 목숨을 잃은 총격사건(마 바커는 네 아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었으며, 본인도 사악한범죄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들은 FBI와의 충격전에서 그녀가 목숨을 잃은 것을 무마하기 위해 후버가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옮긴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톰 화이트의 아들도 수사국에 입사해, 화이트 집안 3대가 치안관이 되었다. - P328

후버는 곧 수사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어도 그는 예전과 달리 허리가 굵어지고 불도그처럼 턱살이 늘어진 모습으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시선을 들어 보니 저 멀리 높고 조용한 발코니에 J. 에드거 후버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그의 안개 왕국을 등 뒤에 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지 <라이프>의 기자가 쓴 글이다. 후버의 권력남용 실태는 1972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밝혀졌다. 화이트는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보스의 과대망상증, 수사국의 정치화, 그가 공공의 적으로 점찍은 사람들에 대한 편집증 환자 같은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늘어나기만하던 후버의 공공의 적 명단에는 미국 인디언 활동가들도 포함되었다. - P330

해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할 무렵,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다. 마지는 그레이호스를 내게 구경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녀의차에 올랐다. 그녀는 흙먼지가 날리는 좁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제 그레이호스에 몇 채 남지 않은주택 중 한 채가 검은 떡갈나무 사이에 거의 숨겨져 있었다. "여기가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에요." 마지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작고 검소한 목조주택이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오두막에 더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후견인들과 도둑들 때문에 줄어들고 있던재산을 대공황으로 완전히 잃어버린 오세이지족이 많았다. 마지는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경제가 호황일 때 배럴당 3달러넘게 올랐던 석유 값이 1931년에는 65센트로 곤두박질쳤다. 따라서 오세이지족 인디언 한 사람에게 매년 지급되는 액수도 800달러이하로 떨어졌다. 그다음 해에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석유로일군 오세이지의 재산이 사라지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인디언들은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은 (…) 석유로 들어오는 수입이 급속히사라지고 있는데, 그들의 재산은 사실상 그것이 전부다." 설상가상으로 유전에 매장돼 있던 석유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다. 1929년, 아직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전에 한 전국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석유 매장량 지도가 계속 이렇게 바뀐다면, 앞으로 5년 뒤 오세이지족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 P354

그녀가 다시 차를 몰고 중앙대로에서 방향을 꺾어 작은 주택가로들어섰다. 옛날 저택들이 아직 몇 채 남아 있었지만, 폐가가 되어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덩굴에 완전히 갇혀버린 집들도 있었다. 마지가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속도를 늦췄다.
"뭘 찾아?"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
"그 집이 폭파된 곳."
"그건 저쪽 길 아니야?"
"아냐, 그건... 아, 여기다." 마지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폭파사건이 있은 뒤로 새로 지은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지가 FBI의 기록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폭파사건이 있던 날 밤, 그녀의 아버지와 고모와 몰리가 스미스의 집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의 귀가 심하게 아파와서 그들은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어요. 운명이죠." 마지가 말했다. 나는 한순간 멈칫한 뒤에야 이 말의 의미를제대로 이해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고 있었어요." 마지가 말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차 안에 앉아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써보았다. 마침내 마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자, 이제 다시 춤을 보러 갈까요?" - P360

루이스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이 원고를 다 읽은 뒤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석유가 매장된 땅에대한 균등 수익권 때문에 1918년에 살해되었다는 것.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오세이지족의 공포시대는 헤일이 애나 브라운을살해한 1921년 봄에 시작해서 헤일이 체포된 1926년 1월에 끝났다. 하지만 루이스의 살인사건은 석유의 수익금을 노린 살인사건이 그보다 적어도 3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1931년에 정말로 독살된 것이라면, 헤일이 체포된 뒤에도 살인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건들은 석유 수익금을 노리고 오세이지족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헤일뿐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헤일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잔혹하게 피해자들을 살해한 인물일 수는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살인사건들이 존재했다. 그 사건들은 공식적인 추정치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몰리 버크하트의 살해된 가족들이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중 일부는 아예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 P392

웹이 정면 포치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저물녘이라서 하늘가장자리가 이미 어두웠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시 풍경 너머의초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이 땅에는 피가 가득해요." 웹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했다.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바람 속에서 계속 바스락거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뒤, 하느님이 카인에게 했던 말을 웹이 되풀이했다.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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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오. 브이, 이, 그게 뭔데.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하고 싶다고 말하네. 웃겨. 아주 웃겨.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性愛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리아가 와인을 콸콸 마시며 지론을 펼칠 때 맹희는 "그거 삼만오천원짜리다"라고 타박하면서도 친구의 존재에 소중함을 느꼈고, 그 소중함 역시 사랑의 일종이라는 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혼자 등산을 가려다 모든게 귀찮아져서 김밥만 먹었던 날에 맹희는 이렇게 중얼거린적도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 좋지. 근데 그런 거 말고......"
뒤에 무엇이 이어져야 할지는 맹희도 몰랐다. 어쩌면 새들의 지저귐보다 시끄럽고 갓 구운 빵보다 뜨거우며 조카의 해맑은 웃음보다 슬픈 무엇. 스크린도어도 없던 시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1호선의 굉음. 열차를 일부러 떠나보내며 나누는입술. 한강을 건너는 택시와 차창 밖의 쏜살같은 불빛들. 까맣게 꺼진 휴대전화 액정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식어버린 찻잔, 여지없이 비가 쏟아지면 뛰다가 걷다가 고가도로 아래에서서 젖은 몸으로 스스로를 비웃기. 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37세의 삶에 신파를 그리워하다니 이것은 미성숙일까. 어쩌면 사랑은 새들보다 가깝고 빵보다 단단하며 조카보다 듬직한 무엇일지도. 퇴근하고 나니 비워져 있는 휴지통, 소화제를 먹을 때 옆에서 따라주는 더운물 한 컵. 늙은 부모의 터무니없는 세계관을 함께 끄덕이며 흘려듣다가 주차장에 내려와 시동을 걸기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뱉는 안도의 한숨. 물티슈와 수세미, 파스와 보행기. 암 보험과 노령연금과 장례 토털 케어 서비스카탈로그를 함께 뒤적거리기.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 둘다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개였는지 재였는지 이름과 얼굴은 지워졌어도 촉감과 온도와 음향, 아득한 형체로 남은 것들.  - P50

전철에서는 여전히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종종 잊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자동 재생 때문에 엉뚱한곡에 닿아 있었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았다. 인생은 지금이야. 아, 아,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아, 아, 아모르 파티. 알고리즘이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연자 선생님 멋있네. 나 이제 아모르 파티를 알겠네.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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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스물네 살이던 1905년에 텍사스 기마경찰대에 들어갔다. 19세기에 변경지대에서 인디언들과 싸우는 자원 민병대로 창설된이 기마경찰대는 나중에 국경 지역에서 멕시코인들과도 맞서 싸웠으며, 차츰 일종의 경찰력으로 발전했다. 인디언들과 멕시코인들은 총부터 먼저 쏘고 보는 잔인한 방식 때문에 기마경찰대를 오래전부터 증오했으나, 텍사스의 백인 주민들 사이에서 기마경찰대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린든 B. 존슨은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텍사스의 모든 소년들은 텍사스 기마경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른이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 P202

화이트는 이른바 인디언 사업이라는 것이 치밀한 범죄임을 깨달았다. 사회의 다양한 부문들이 여기에 공범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사기꾼 후견인과 재산관리인은 대개 사업가, 목장주, 변호사, 정치가 등 백인 지도층 중에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도둑질을 도와주고 은폐해준 치안관, 검사, 판사 등도 백인 지도층이기는 마찬가지였다(때로는 이들 자신이 후견인과 재산관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24년에 인디언 권리연맹이 이른바 "부당이득과 착취의 흥청망청 잔치‘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들은 오클라호마주의 부유한 인디언들이 어떻게 "과학적이고 가차 없는 방법으로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도둑질을 당하고 있는지 기록했다. 후견인이 "판사들이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충실한 친구들에게 보답으로 나눠주는 자리"라는 점도 밝혔다. 판사들은 "내게 표를 주면, 당신에게좋은 후견인 자리를 주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오세이지족 남성과 결혼한 어떤 백인 여성은 기자에게 어떻게 음모가 진행되는지 설명해주었다. "상인과 변호사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특정한 인디언을 먹잇감으로 점찍었다. 그들은 모든 공무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 그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이였으며, ‘당신이 이러이러한 것을 갖고, 나는 이것을 갖겠다‘며 냉혹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유전에서 나오는 돈에 대한 권리와 대형 농장을 갖고 있는 인디언들을 골라서 점찍었다." - P218

화이트는 어니스트와 몰리의 결혼(애나가 살해당하기 4년 전)도 처음부터 음모의 일환이었는지, 아니면 헤일이 나중에 조카를 압박해서 아내를 배신하게 만든 것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상조차 힘들 만큼 뻔뻔하고 사악한 음모였다. 어니스트는 몰리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몰리와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내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는 음모를 꾸며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쓴<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대의 괴물 같은 얼굴을 가려줄
어두운 동굴이 어디 있을까? 그런 것을 찾지 말라, 음모여.
미소와 상냥함 속에 그것을 숨기라. - P230

후버는 새로 시작된 수사를 수사국의 특별한 사례로 선전하고싶어 했다. 당시 그는 수사국의 구조개편을 계속 실시하던 중이었다. 번스를 비롯한 타락한 구식 형사들이 만들어놓은 더러운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후버는 비정할 정도로 효율을 중시하는 경영시스템을 옹호한 진보적인 사상가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런 시스템의 모델이 된 것은, 산업공학자인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의 이론이었다. 그는 기업을 반드시 ‘과학적으로‘ 경영해야 한다면서, 노동자 각자가 처리하는 업무를 세심하게 분석하고 정량화해야 한다고주장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정부에 적용함으로써, 타락한 보스들이 수사기관을 비롯한 정부기관에 자신의 후원자와 돈으로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득 채워넣는 낡은 전통에 종지부를 찍으려고했다. 새로 싹트고 있는 관료체제를 테크노크라트가 허버트 후버("위대한 엔지니어)의 방식으로 경영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후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인도적인 구호활동을 몹시 신속하게해내서 영웅이 된 인물이다.
역사가 리처드 지드 파워스는 J. 에드거 후버가 조직과 사회적 통제에 집착하는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면을 진보주의에서 찾아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책상물림인 후버가 이 방법을 통해 대담한 용사, 현대적인 과학시대를 위해 앞장선 십자군 같은 이미지를 쌓을수도 있었다. 그가 총을 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이런 이미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기자들은 "낡은 탐정의 시대가 끝났다"면서 후버가 "가짜 콧수염으로 변장하고, 빛을 가릴 수 있는 램프를 들고다니는 과거 수사국 형사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대신 체계적인 절차를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한 기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는 골프를 친다. 구식 형사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개혁을 향한 진보주의의 열정 밑에는 추악함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중산층 출신의 백인 개신교도인 진보주의자들은 이민자와 흑인에 대해 깊은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미덕과 권위를 워낙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절차를 경멸했다. 후버의 어두운 충동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진보주의의 일면이다. - P234

후버는 겹치는 부서들을 없애고 권위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등수사국의 급격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동안 화이트는 사건을 책임진 다른 특수요원들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뛰는 부하들에 대해 과거보다 더 큰 지휘권을 허락받았으나, 그와 동시에 부하 요원들의모든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업무능력 평가서를 끊임없이 작성하고, ‘지식‘ ‘판단력‘ ‘외모‘ ‘서류작업‘ ‘충성심‘
등 다양한 항목에 대해 요원들의 점수를 0에서 100까지 매겨야 했다. 모든 항목의 점수를 더해서 평균을 낸 수치가 그 요원의 전체점수가 되었다. 화이트가 후버에게 가끔 부하 요원에게 100점을 주기도 한다고 말하자, 후버는 서신을 통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수사국 관할하에 있는 요원이 완벽하다거나 100점이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 P234

후버는 법무부에 들어오기 전에 의회도서관의 사무원이었다. 그의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도서관장이 됐을 것이다." 어쨌든 이 경력 덕분에 후버는 듀이 십진법을 이용해서 다량의 데이터를 분류하는 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위항목을 숫자로 구분하는 비슷한 분류법을 채택해서, 수사국의 서류와 자료 목록을 정리하게 했다(정치가들을 협박하는 데 사용할수 있는 정보가 포함된 후버의 ‘인물 파일‘은 비서의 사무실에 별도로 보관되었다). 요원들은 이제 사건보고서를 표준양식에 따라 종이 한 장 분량으로 정리해서 올려야 했다. 그 덕분에 서류의 양(능률을 통계적으로 측정하는 또 하나의 척도)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검사가 사건의 수사 지속 여부를 평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 P237

후버 휘하에서 요원들은 대기업 직원들처럼 서로 호환이 가능한 톱니와 같았다. 보통 해당 지역 출신을 치안관으로 삼던 전통적인경찰력 운영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이런 변화 덕분에 요원들은 담당지역에서 부패에 물들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전국적인 경찰력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 직원들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측면을 잃어버린다는 점이 문제였다. 화이트는 오로지 수사국의 발전만을 생각하며"‘ 후버에게 쓴 편지에서, 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 대해 잘 아는 요원이 더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오세이지 수사에서 텍사스 출신 목부로 신분을 위장한 자신의 부하가 이렇게 일선에서 뛰는 데는 이상적인 인물이지만, "만약 그를 시카고나 뉴욕이나 보스턴에 배치한다면 거의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후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언제나 복종하는 부하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작성했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화이트 요원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한 지역 주민들의 특징에만 친숙한 요원은 다른 방면의 일자리를 찾아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뉴욕에 임시로 마련된 훈련소에서 요원들은 새로운 규정과 수사방법을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다(후버는 나중에 이 교육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버지니아주 콴티코에 온전한 아카데미를 세웠다). 요원들은 훈련을통해 지문감식이나 탄도학 등 후버가 ‘과학수사‘라고 찬사를 보낸방법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오세이지 사건의 첫 수사에서처럼 수사가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정식으로 증거를 수집하는 규칙도 배웠다. - P238

헤일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히 다지기 위해 더욱더 많은 호원활동을 시작했다. 렌 요원은 보고서에서 헤일이 "자신의 이름을높이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옷가지와 선물을 주고, 돈을 꿔주는등 모든 선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썼다. 헤일은 심지어 "어린 소년들에게 망아지도 선물하고 있었다.
텍사스 출신 목부로 위장한 비밀요원 한 명이 서서히 헤일과 친해졌다. 그는 과거 카우보이 시절을 헤일과 함께 회상했고, 헤일이 자기 목장의 가축들을 검사할 때도 동행했다. 이 요원은 헤일이 수사관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가 요원에게 "내가 워낙 능수능란해서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가 없어!"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화이트는 페어팩스의 거리에서 헤일을 보곤 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턱을 높이 치켜든 그의 모습은 화이트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가 평생 추적해 잡아들이던 범죄자들의 화신 같았다. 그는 "세상이 전부 자기 것인 줄 아는 것 같았다.
유망한 단서들이 매번 막다른 길에서 끝나면서 압박이 가중되자 화이트는 가끔 라이플을 꺼내 들고 시골로 사라졌다. 거기서 오리나 하늘을 나는 새가 눈에 띄면, 그는 녀석을 겨냥해서 총을 쏘았다. 나중에는 공중에 연기가 자욱하고, 피가 땅에 흠뻑 밸 정도였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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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그는 서랍 속에 접힌 채로 있다.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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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왜 그들이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후반의 여성이어야 하는지, 열한 명 중에 아프리칸은 한 명뿐인데 아시안은 일곱 명이나 되는지를 문제삼았다. 하지만 르몽드에서 ‘세계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여성-아시안으로 이동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듯, 오히려 그 점이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실제로 멤버들은 인종과 무관하게 모든 대륙에서 고르게 사랑받았고, 여성 팬들의 지지가 더 뜨거웠다. 진정성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그들이 가사를 어떻게 쓰는지, 소셜미디어에서 어떻게 소통하는지, 수익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며 하나둘 설득됐다. 그들은 아름다웠고, 유능했고, 심지어 옳았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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