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오. 브이, 이, 그게 뭔데.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하고 싶다고 말하네. 웃겨. 아주 웃겨.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性愛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리아가 와인을 콸콸 마시며 지론을 펼칠 때 맹희는 "그거 삼만오천원짜리다"라고 타박하면서도 친구의 존재에 소중함을 느꼈고, 그 소중함 역시 사랑의 일종이라는 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혼자 등산을 가려다 모든게 귀찮아져서 김밥만 먹었던 날에 맹희는 이렇게 중얼거린적도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 좋지. 근데 그런 거 말고......"
뒤에 무엇이 이어져야 할지는 맹희도 몰랐다. 어쩌면 새들의 지저귐보다 시끄럽고 갓 구운 빵보다 뜨거우며 조카의 해맑은 웃음보다 슬픈 무엇. 스크린도어도 없던 시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1호선의 굉음. 열차를 일부러 떠나보내며 나누는입술. 한강을 건너는 택시와 차창 밖의 쏜살같은 불빛들. 까맣게 꺼진 휴대전화 액정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식어버린 찻잔, 여지없이 비가 쏟아지면 뛰다가 걷다가 고가도로 아래에서서 젖은 몸으로 스스로를 비웃기. 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37세의 삶에 신파를 그리워하다니 이것은 미성숙일까. 어쩌면 사랑은 새들보다 가깝고 빵보다 단단하며 조카보다 듬직한 무엇일지도. 퇴근하고 나니 비워져 있는 휴지통, 소화제를 먹을 때 옆에서 따라주는 더운물 한 컵. 늙은 부모의 터무니없는 세계관을 함께 끄덕이며 흘려듣다가 주차장에 내려와 시동을 걸기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뱉는 안도의 한숨. 물티슈와 수세미, 파스와 보행기. 암 보험과 노령연금과 장례 토털 케어 서비스카탈로그를 함께 뒤적거리기.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 둘다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개였는지 재였는지 이름과 얼굴은 지워졌어도 촉감과 온도와 음향, 아득한 형체로 남은 것들.  - P50

전철에서는 여전히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종종 잊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자동 재생 때문에 엉뚱한곡에 닿아 있었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았다. 인생은 지금이야. 아, 아,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아, 아, 아모르 파티. 알고리즘이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연자 선생님 멋있네. 나 이제 아모르 파티를 알겠네.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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