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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내가 어머니와 이모들과 수많은 사촌들과 비슷할 줄 알고 나를 님프라고 불렀다. 하급 여신 중에서도 가장 말단인 우리는 능력이 워낙 미미해서 영생이나마 가까스로 보장할 정도였다.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고 꽃을 가꾸며, 구름에서 물방울을 파도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었다. 님프라는 단어에서 우리 미래의 모든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언어로 님프라는 말에는 그냥 여신만이아니라 신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 P9

삼촌들 중에는 앉아 있는 의자보다 체취가 약한 이들도 있었지만 나의 외할아버지 오케아노스는 강바닥의 진흙처럼 진한 체취를 풍겼고, 아버지는 방금 전에 불을 지핀 이글거리는 화염과도 같았다.프로메테우스에게서 풍기는 푸른 이끼 냄새로 사방이 진동했다.
나는 빈 잔을 내려다보며 용기를 냈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 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신이라면 누구든 그렇지. 그들은 몸이 바스러져서 땅속으로 흡수된단다. 영혼은 차가운 연기로 바뀌어 저승으로 날아가고.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없지. 뭐든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고."
한기가 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 무슨 수로 견뎌요?"
"최대한 잘."
횃불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시커먼 물처럼 우리를 향해 찰랑찰랑 다가왔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 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 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P33

단검을 꺼냈다. 방으로 들고 가자 청동 칼날이 양초 불빛을 받고반짝였고 사자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 부드럽고 주름 하나 없는 내 손바닥을 놓았다. 흉터도 생기지 않고 곪지도 않을 것이다. 아주희미한 세월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동반될 고통은 두렵지않았다. 나를 엄습한 것은 다른 공포였다. 칼날에 베이지 않으면 어쩌나 연기를 가르듯 칼날이 나를 그대로 관통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칼날이 닿자 살갗이 찢어졌고 번개처럼 뜨거운 은백색의 고통이 쏜살처럼 나를 갈랐다. 나에게는 삼촌의 능력이 없으니 빨간 피가 흘렀다. 상처는 한참 동안 피를 흘린 다음에야저절로 아물어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걸 지켜보았고 그러는 동안 새로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 손이 자기 거라는사실을 깨달은 갓난아이처럼 너무 미숙한 발상이라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그랬다. 나는 갓난아이나 다름없었다.
그 생각이란, 내 인생 자체가 뿌연 심연이었지만 내가 그 어두컴컴한 바다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사는 생명체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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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주니어 선수들가운데 햇병아리 페더러와 같은 재목이 있는지 없는지는 물론 알수 없다. 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고, 그것도 여러 형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 P407

이 문제가 그저 취향이나 개인적 특징의 문제만은 아니다. 좋•은 소설가는 대부분 지식인이다. 젊은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평론가와 교사도 그렇다(놀랄 만큼 많은 편집자도 그렇다). 그리고 텔레비전, 광고, 그것들이 반영하고 정의하는 대중문화는 지식인이 무엇을 자신이 관심을 쏟아도 좋은 대상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TV와 광고가 심리적 범유행병이 되기 전에 정신적 가치를 형성했던 선배들은 요즘도 바버라 터크먼 식으로 뚜렷하게 구분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들이 볼 때 한쪽에는 진정한 ‘품질‘을 갖춘 것, 세련된 사람들이 생산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다. 반대쪽에는 그저 ‘인기‘와 ‘대중적 매력‘만 있는 것,대중이 요구하는 것, 평등주의적 자본주의 탓에 이른바 민주적 시장에 현혹된 사람들이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 있다. 이전 세대의 계몽된 심미주의자들, 박식하고 진보적인 사람들, 대충 1940년에서1960년 사이에 젖을 뗀 사람들은 이처럼 진정한 고상함과 진정한 진보주의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아무렇지도않게 잘 활동한다. - P420

모든 사람은 여러 사건과 변화로 구성되고 최소한 시작과 중간이 있어서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자기 인생을 이해한다. 우리는 시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내재된 속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C.Y. 작가들의 입장에서, 미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노출되는 이야기 패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아무리 너그러운 기준으로 봐줘도 이야기 예술로서 텔레비전은 몹시 저급한 형태다. 텔레비전은 변화시키거나, 계몽시키거나, 확장시키거나,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려고 애쓰는 이야기 예술이 아니라 심지어 꼭 ‘즐겁게해주려고‘ 애쓴다고도 할 수 없다-그저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이야기 예술이다. 텔레비전의 유일한 목적은-공공연히 인정되는 목적은-지속적 시청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전이암처럼 효율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현실은 이야기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에 반드시 심각한 영향을, 대가와 함께, 미친다. 어떤이야기 예술이 진정한 예술인가 하는 독자들의 기대 자체에 영향을미친다. - P429

여러분이 1987년 현재 젊은 작가들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기꺼이 인생을 바칠 경우, 여러분은 우리가 그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고 믿어도 된다는 것. 그리고 돈 때문에 글을 쓰는것이 아닌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란 글쓰기가 예술이고, 예술은 의미이고, 의미는 힘이라는 것이다. 고양이를 색칠하는 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 텅 빈 공허를 발 디딜 바닥으로 바꾸는 힘, 빚을 보물로 바꾸는 힘.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은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사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뛰어난 이들은 아직 한 명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중 두엇은 심지어 ••• 독학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말로 유행과 흐름과 학계가 우유를 묽게 만들고 있다면, 적어도 그 덕분에 크림이 떠오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
(1988년) - P449

내가 아는 한, 픽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비유는 돈 드릴로의 《마오 II》에 나온다. 그 책에서 드릴로는 한창 집필 중인 책을 가리켜 작가를 쫓아다니는 추악한 기형의 아기로 묘사했다. 아기는 늘 작가를 따라 기어 다니는데(이를테면 작가가 식사를 하려고 찾은 식당에서 문득 바닥을 질질 기며 나타나거나, 아침에 침대 발치에서 그날 맨 먼저 보이는 얼굴이라거나), 추악한 기형이고, 뇌수종이 있고, 코가 없고, 팔이 뭉툭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지능이 떨어지고, 입에서는 뇌척수액이 질질 흐르고, 작가를 향해늘 앵앵거리고 우물거리고 울어대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 추악함때문에 틀림없이 얻어낼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작가의 온전한 관심을. - P453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혹은 모든 역설이 우리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것이다. 재미를 새롭게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픽션 쓰기는 이제 당신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말로 알고 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처음에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싶었던 당신의 부분,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이제글쓰기의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적이다. 그리고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1998년)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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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교수의 공적을 수백만 쪽에 달할 도스토옙스키의 초고와 메모와 편지와 일기와 동시대인들의 인물평과 다양한 언어로 쓰인 비평을 소화하여 달여낸 공적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우선 전기와 비평에 대한 접근법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결합하려고애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통의 문학가 전기는 작가의 개인적 삶에 (특히 이면이나 신경증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작가가 몸담았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은 거의 무시한다. 한편 다른 연구들은-특히 이론적 의제를 품은 연구들은 작가와 작품을 작가가몸담았던 시대의 편견, 힘의 역학, 형이상학적 망상이 빚어낸 단순함수로만 취급한다. 어떤 전기 작가는 대상의 작품을 이해하는 작업은 이미 다 완료되었다고 가정한 뒤, 자신이 생각할 때 논쟁의 여지없이 벌써 다 정해졌다고 보는 그 의미에 맞추어 작가의 개인사를 추적하는 데만 시간을 쏟는다. 반면 우리 시대의 ‘비평 연구‘들은 거꾸로 작품을 밀봉된 상태로 취급할 때가 많다. 비단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어떻게 그 작품에 특정 작가의인간성, 스타일, 목소리, 시각, 기타 등등에서 나오는 독특한 개인적마법이 깃들어 있는지 설명하는 데도 유용한 작가 개인의 환경과믿음에 관한 사실들은 무시하는 것이다. - P347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결정적이고 큰 변화의 계기였던 사건은 1849년 12월 22일의 가짜 처형이었다는-이 쇠약하고신경증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젊은 작가가 자신이 딱 죽을 거라고 믿었던 그 짧은 오분 내지 십 분의 시간이었다는것이다. 그때 도스토옙스키 내부에서 벌어졌던 일은 일종의 개종 체험이었으나, 구체적으로는 이야기가 좀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후 그의 글에 영향을 미친 기독교적 신념은 특정 종파나 전통의 신념은 아니었으며거기에 러시아의 신비주의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가 결합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요소는 다음 세기에 소련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적잖이 억압하거나 왜곡한 요인이었다. - P362

 하지만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할 것이다(혹은 펄쩍펄쩍 뛰고 주먹을 흔들며 우리에게 날아들어 외칠 것이다). 상황이 정말 그렇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그 영역을 포기한 탓도 있다고. 무자비한 엄격함과 남을 심판하려는 열성으로 보아 자신이 남들에게 적용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적 가치‘를 사실은 잘 모르는 게 분명한 근본주의자들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정부에 대한 편집증이 지나친 나머지 정부를 실제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우파민병대들과 음모론자들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그리고 학계와 예술계에서는 그 부조리함과 독선이 갈수록 심해지는 정치적 올바름운동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발화와 담론의 형식에만 집착하는그들의 태도는 우리가 지닌 최선의 진보적 직관이 이토록 무기력해지고 미학화했다는 사실을, 진정 중요한 것들로부터 이를테면-동기, 감정, 믿음으로부터-이토록 멀어졌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말이다. - P367

<백치>에서 이폴리트가 읊는 유명한 "필수 설명"중 한 토막을 보자.

"개인의 자선을 비난하는 사람은," 나는 말을 시작했다. "인간본성을 비난하고 개인의 존엄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공적 자선 단체와 개인적 자유는 서로 다른 문제이고,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개인의 친절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입니다. 남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충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생한 충동이기 때문입니다∙∙∙. 말해보십시오, 바무토프,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그렇게 관계 맺는것이 연관된 사람들의 운명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주요한 소설가가 인물에게 이런 말을 시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다른 냉소적인 주인공이 비판할 수 있도록 제시된 위선적인 장광설이 아니라, 인물이 자살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늘어놓는 열 쪽짜리 진지한 독백의 일부로)? 우리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는이유가 바로 요즘 소설가들이 그런 것을 상상하지 않는 이유다. 우리 시대의 기준에서 그런 소설가는 가식적이고 장식적이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오늘날 진지한 소설에 이런 연설이 직설적으로 나온다면, 그에 대한 반응은 분개나 비난이 아니라 그보다 더나쁜 것, 즉 치켜올린 눈썹과 아주 쿨한 미소일 것이다. 그 소설가가 거물이라면, <뉴요커>에 정색한 비아냥이 실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 소설가를 웃음거리로 치부할 것이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생각하는 진정한 지옥이다).
그러니 그는 우리는, 우리의 소설가는 진지한 예술을 통해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일은 감히 시도하지 않을 못할)것이다." 그런 작업은 메나르의 《돈키호테> 같아 보일 것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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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청객들의 이름은 동양하루살이, 깔따구, 그리고 최근 언론에서집중 조명을 받은 러브버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곤충들이 모기처럼 피를 빨지도 않고, 파리처럼 세균을 옮기지도 않으며, 농작물을 직접 해치지도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마리가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은 시민들에게 압도적인 공포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작은 곤충의 집단적 움직임에서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등장한 용어가바로 ‘생활불쾌곤충‘이다. 이 표현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행정적 필요에서 비롯된 말로, 서울시가 처음 사용했다. 병을 옮기지 않아도 대량 발생 자체로 시민의 생활을 크게 불편하게 만드는 곤충들을 묶어 지칭한 것이다. - P89

사실 생활불쾌곤충이라 불리는 곤충들은 자연 속에서는 결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루살이 유충은 강바닥 모래와 자갈 틈에 숨어들어 미세한 유기물을 섭취하며, 이 과정에서 물을 정화한다. 하루살이가 많이 발견되는 강은 수질이 양호하다는 생태학적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러브버그 유충은토양 속에서 낙엽과 부패물을 분해해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 깔따구 유충 또한 하천과 습지에서 유기물을 분해하며 물질 순환을 돕는다. 즉, 이들은 환경의 청소부로서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성충이되어 인간 생활권과 마주치는 순간, 그 기능은 잊히고 오직 불쾌한 존재로만 인식된다. - P90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이 세 지역의 러브버그 역사를 비교하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드러난다. 모두 도시화와 기후변화, 그리고 빛 공해 (lightpollution)라는 세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고속도로의 가로등과 습한 기후가,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도시 녹지와 온난한 해풍이, 한국에서는 도심 공원 및 산림과 인공 불빛이 러브버그를 불러 - P94

들였다. 결국 러브버그는 인간이 만든 도시 환경의 ‘생태적 부산물‘이자 뛰어난 ‘적응자‘이다.
반면, 각 지역의 현재 상황은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 플로리다는 이미대규모 발생이 한 세대를 지나면서 자연 조정단계에 들어섰고, 오키나와는지속적 확산 초기 단계, 한국은 급격한 확장기에 있다. 이처럼 세 나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러브버그의 발생 양상을 통해 도시 생태계의 성숙 단계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 유입된 러브버그의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의러브버그는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니고, 중국의 산둥반도에 서식하는 러브버그와 그 유전자형이 일치했다. 다시 말해 최근 중국 산둥반도에서 서식하는러브버그가 우연한 기회에 인천 송도지역으로 들어와 적응하면서 국내에서급격하게 개체 수를 늘려 나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산둥반도 지역에서도 러브버그가 대발생할까1980년~2000년 사이에 출판된 중국곤충학회지에 실린 문헌에 따르면, 러브버그는 중국에 분포하고 있는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량 발생으로 기술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중국 산둥반도에서는 러브버그가 대발생하지 않는 걸까? 이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토양 건조도와 도시 불빛 구조가 한국이나 일본처럼 집중되지 않아 도시형 생태 조건이 덜 맞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국 남부지역에는 러브버그와 유사한 종들이 다수 분포하며, 이것들과 비슷한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단일종이 개체군 폭증을 일으키는 대발생 현상을 생태적으로 제약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일한 기후권이라도 지역 생태망 내의 종 다양성 차이와 도시 구조 및 교란 요인의 차이로 인해 대발생이 억제되는 구조로 판단된다는 의미다. - P95

먼저 기후변화를 보자. 전 지구적 기온 상승은 곤충의 생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균기온이 높아지면 곤충의 발육 속도가 빨라지고, 번식 속도가 빨라진다. 여름철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지면 곤충의 번식 기회가 늘어난다. 특히 러브버그나 깔따구처럼 특정 온도와 습도 조건에서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곤충은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 러브버그대발생이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도 여름철 고온 다습한 환경이 반복되면서 생육 조건이 최적화된 결과다.
도시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도시의 확장은 곤충들에게 새로운 서식지를 제공한다. 강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와 상가, 인공습지와 빗물받이는곤충들이 산란하고 번식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깔따구는 원래 습지나 하천 주변에서만 대량 발생했지만, 이제는 도시의 정수장에서 쉽게 발견된다. 도시는 곤충에게 새로운 서식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거대한 생태계다. 문제는 그 공간이 사람의 생활권과 겹친다는 점이다. 인간이만든 편리한 시설물이 곤충에게는 최적의 서식지가 된다.
도시 불빛 문제도 심각하다. 곤충학에서는 이를 ‘생태적 덫 (ecologicaltrap)‘이라고 부른다. 곤충들은 본래 달빛이나 별빛을 기준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도시의 가로등, 네온사인, 대형 전광판은 곤충에게 강력한 인공 신호를보낸다. 곤충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빛에 집단적으로 몰려든다. 한강 다리에설치된 조명이 하루살이를 유인하고, 계양산 일대의 인공 불빛이 러브버그를 모이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도시의 밝은 불빛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곤충에게는 거대한 함정이 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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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갖춘 정치인이기를.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좀 외로울 따름이다. 참으로 점잖고 순수한 사람들도 곁에 두기가 버거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블루밍턴 사람이 톰프슨 아주머니 같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가령 아주머니의 아들 F는 물론 훌륭한 인간이지만, 이렇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도이것이다. 참사의 공포 중 일부분은, 비행기의 남자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미국이 정확히 어떤 미국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 숙녀들의 미국보다는 나의 미국에, F의 미국에, 딱하고 혐오스러운 두에인의 미국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 P302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잔인하고 지나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어떤 자료에서는 바다에 랍스터가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하다"라고 말했고, 플리머스 식민지의 청교도들이 물을 어정어정헤치면서 손으로 원하는 만큼 잔뜩 잡았다는 이야기, 초기 보스턴에서는 거센 폭풍이 지나가면 해변에 랍스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이렇게 널브러진 랍스터를 악취 나는 골칫거리로 여겼고, 갈아서 비료로 썼다. 예전에는 보통 죽은 랍스터를 요리한 뒤 보존했다가 먹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보통은 소금에 절이거나 엉성한 밀폐 용기에 보관했다. 메인 주 최초의랍스터 산업도 1840년대에 바닷가를 끼고 생겨난 십여 곳의 통조림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랍스터는 그곳에서 멀게는 캘리포니아까지 배로 운반되었는데, 수요가 있었던 것은 옳지 싸고 단백질이 풍부하다는점 때문이었다. 랍스터는씹을 수 있는 연료나 다름없었다. - P309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은 정말로 영혼에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좀 울적하고 착잡한 눈길로 ‘그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길을 찾자‘ 하는 방식으로 유익하다. 내 경험상, 국내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거나 긴장을풀어주는 경험이 아니었다. 장소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정신에 이로운 효과를발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나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경험이었고,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겸손함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엿한 개인이라는 환상을, 내가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거나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위협하는 경험이었다.
(경고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말은 내 동행들이 특히나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낀 대목으로, 휴가 여행의 재미를 확실히 망쳐버리는 이야기다.) 내게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 P313

미국 문화에서 ‘랍스터‘ ‘물고기fish‘ ‘닭chicken‘ 같은 단어들은 동물과 그 고기를 동시에 지칭하는 데 비해 포유류는 대부분 ‘소cow‘ 대신 ‘비프bee‘ ‘돼지pig‘ 대신 ‘포크Pork‘처럼 식재료로서 고기를 한때 그 고기였던 산 생물과 분리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완곡어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고등 동물을먹는 데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어법에도 드러날 정도라는것, 하지만 그 불편함은 포유류를 벗어나면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까?  - P324

랍스터들의 그런 감정이 설령 감정의 원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데 이 대목에서, 원시적인 형태라는 점이 애당초 왜 문제일까? 원시적이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해서, 그 생물체로 만들 요리에 대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 생물체에게 고통을 끼치는 데 일조한 사람이 그 고통을 덜 절박하거나덜 불편한 것으로 느껴도 좋단 말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PETA식의 비난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다만 메인 랍스터 축제의 그 많은 웃음, 생기, 공동체의 자긍심 속에서 떠올린 몇몇 심란한 의문을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다. 더솔직하게 말하자면, 메인 랍스터 축제에 참가했다가 문득 랍스터도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가급적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랍스터 축제는 고대 로마의 서커스나 중세의고문 축제와 비슷한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비교가 지나친 것 같은가? 지나치다면, 정확히 왜 지나친가? 아니면 이 질문은 어떤가. 혹시 미래 세대는 우리 세대의 산업적 농업과 음식 문화를 우리가 네로 황제의 오락이나 멩겔레의 인체 실험을 보듯이 보게 될까?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이런 비교가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교가 극단적이라고 느껴진 까닭을 찬찬히 짚어보면, 내가 동물은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 P333

이런 생각을 그냥 제쳐놓아도 좋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당신 내면의 근거는 무엇인지? 달리 말해, 당신이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고서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인지? 만일후자라면, 왜 생각하기 싫은지? 대충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진정한 미식가의 특징은 음식뿐 아니라 음식의 전체 맥락까지도 남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관심을 더 기울이고, 생각을 더 해본다는 것 아닌가? 아니면 미식가가 남들보다 더 많이 들이는 그 관심과 감수성은 오직 감각적 측면에만 적용되는가? 모든것이 정말로 취향과 표현의 문제일 뿐인가?
그러나 비록 진심이기는 해도, 맨 마지막 몇 가지 질문은 미학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그런 관계가 있다면 말이다) 더 크고 더 추상적인 질문과 분명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좋은 생활을 위한 잡지‘
라는 <고메>의 모토에서 ‘좋은good‘이라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그리고 이런 질문은 워낙 깊고 위험한 바다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은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해와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물을 수 있는 질문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2004년)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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