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당황의 연속 •

‘의좋은형제축제‘라는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의좋은 형제? 밤마다 쌀가마니를 서로의 집에 몰래 옮기다가 달빛 아래 딱 마주쳤다는 그 동화 속 형제? 근데 이걸로 축제를, 그것도 사흘씩이나 한다고? ‘의좋은 형제‘와 ‘축제‘라는 이 터무니없는 조합(누군가에게는 ‘의좋은‘과 ‘형제‘의 조합부터가 터무니없겠지만) 앞에서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순간부터 집에서 쌀봉지만 봐도 피식거리며 축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P15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랬다. 마술을 보는 그 시간 동안 그가 우리에게 부린 마술. 이렇게 감화되면 안 되는데…… 얼마간의 냉소를 다시 장착해야 하는데 ...... 하는 각성의 순간도잠시. 그 또한 마술쇼가 끝나고 다른 팀이 무대에 오른 후에도 축제장 한편에 서서 인형을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이들, 마술 공연 때는 없었는데 어디선가 몰려든 아이들에게까지 계속 인형을 만들어 주느라 예정보다 한 시간가량 더 지체했던 마술사 앞에서 다시 사그라들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정성껏 인형을 만들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 P25

하나의 예술이자 수련인 어떤 행위, 그것도 이제는 고리타분하게 여겨져 세상으로부터 저 멀리 떠밀려 버린 듯한 어떤 행위를 끝까지 붙들고 모든 것을 쏟아 내는 사람들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조마조마한 존경심을 갖게 한다. 몇 시간 뒤, 무대 옆 게시판에 입상자 명단과 장원작이 나붙자 입상을 고대했을 백발의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내심의 섭섭함을 숨기거나 혹은 숨기지 않은 채 치열하게 작품에 관해 토론하고 바닥에 쭈그려앉아 노트에 장원작을 베껴 적는 모습 또한 그랬다. 주름진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꿈틀댈 때마다 그들의 진지하고 오래된 열정이 꿈틀대는 것 같아 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들 만큼. - P38

이미 수차례 읽은 책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라는 한 문장이면 끝나는 뻔한 이야기. 하지만 ‘이곳‘ 안에도 또 ‘이곳저곳‘이 있었다. 읍내를 통째로 무대로쓰는 이 거대한 연극의 한가운데에서 과거와 현재가 자꾸 겹쳤다.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휴대폰 가게, 영어 학원 등이 자리한 읍내가 너무 현실적이고(현실이니까……….) 일상적인(일상이니까….) 공간이라서 더 그랬다. 아까 마주친 학생들과 주민들을 행렬 안에서 발견해서 더 그랬다. 자꾸 상상하게 됐다. 동네 친구들끼리 모이면 장난이나 치고 깔깔대며 소소한 일상을 일궈 가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전란 앞에 의기투합하여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평범한 날들과 작별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7시에 GS25 앞에서 만나!" "김밥천국 앞에서 윗동네랑 합류하자!" 같은 약속아래 모여 드는 모습을 그 안에서 모두가 의병으로서 만나는 모습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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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잎에 감싸인 여름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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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마지막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천우신조덕이라고 생각하면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철저하게 방재를 한 주택은 요새지, 주택이 아니야. 살기 편할지 어떨지 의심스러워. 요새에 산다는 건 늘 재난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지"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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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닿는 부분은 현관손잡이 빼고는 나무가 좋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현관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니까 금속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좋지. 밖에 있는 문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으면 실내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 같아서 뭔가 쑥스러워." - P145

"우리 집 같은 전통 화과자점은 십 년을 하루같이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게 일이야 똑같다는 데 가치가 있어. 새로운 작품을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만들어도 손님들이 신기해하는 잠깐 동안만 팔리고 손님들은 결국 늘 먹던 것을 원하더라고. 장인기라고 하면 숙련이라든가 세련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인내력과 지구력이야.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사실 아버지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부러울 거야." - P150

감자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흙은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금방 하얗게 말라간다. 오랜 시간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쪼이고있던 새끼 곰 등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면 이런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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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같은 종류의 인간 본성을 공유한다는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풍부하지만, 그것이 개인, 인종, 성별 간의 차이역시 우리의 본성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는 점에서 옳았다. "인간은 본성은 비슷한데 습성이 다르다." "
현대 생물학에 따르면 사람들을 비슷하게 만드는 힘은 사람들을 다르게 만드는 힘과 다르다. (실제로 서로 다른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경향이있다. 유사성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차이점은 행동 유전학자들이 연구한다.)자연 선택은 유능한 유전자-원활하게 기능하는 기관들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를 집중시키고 무능한 유전자를 걸러 내어 한 종을 균일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하나의 표준 종합 설계도를 완성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우리는 깃털이 같은 새 떼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신체기관(두 눈, 간, 네 방으로 나뉜 심장)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똑같은 정신 기관이 있다. 언어의 경우가 가장 뚜렷한 증거이다. 신경학적으로 온전한 모든 아이는 어떤 언어라도 획득할 장비를 갖추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은 마음의 다른 부분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처럼 빈서판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들간의 차이보다는 인류의 심리학적 통일성에 더 주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55

끊임없이 진화하는 미모든 종은 유전적 변이성을 품고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변이성이적은 종에 속한다. 유전학자들은 우리를 "작은" 종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마치 바퀴벌레처럼 지구 상에 창궐해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농담처럼 들린다. 사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유전적 변이의 양이, 구성원이 적은 소수의 종에게나 기대할 만큼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수에 있어서는 인간이 침팬지를 압도하지만, 인간들보다 침팬지 사이에는 더 많은 유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진화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약 10만 년 전)에 우리의 조상들이 집단적으로 병목 지점을 통과했고, 그로 인해 작은 양의 유전적 변이를 가진 소수 종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살아남아 재기하기 시작했고, 약 1만년 전 농경 발명 이후 인구 폭발을 거쳤다. 그 폭발로 인해 인류가 수적으로 희박했을 때 존재했던 유전자들이 무수히 복제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가 많이 축적될 시간이 별로 없었다. - P256

병목현상을 겪은 후 여러 번 인종 간의 차이가 출현했다. 그러나 여러 민족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차이가 아주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사실 우리의 직관이 경험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인종 간의 차이는 대개 기후에 적응한 결과이다. 열대 지방에서 피부의 색소는 일종의 햇볕 차단제였고, 툰드라에서 눈꺼풀은 고글이었다. 기후 요소에 직면하는 신체기관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직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종간의 차이가 실제보다 더 뿌리깊다고 착각하기 쉽다. 기후에 적응해 피부색의 차이가 나타나는 한편, 이웃한 집단들을 내적으로 비슷하게 만드는 진화 작용도 전개된다. 희귀한 유전자가 풍토병에 대한 면역력을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양 집단의 구성원들이 짝을 짓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유전자는 압지로 빨아들인 잉크처럼 한 집단에서 이웃 집단으로 스며들게 된다.  - P257

보다 현실적인 경우에는 차별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때 각 사안의 특수성에 의존해야 한다. 모든 10대 청소년에게 운전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책임감 있는 10대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일종의 연령 차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적 성숙도를 측정하기 위해 테스트 방법을 개발하는 재정적 비용이나 분류상의 실수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비용―가령 10대들이 자신의 차를 숲 속에 감춰 놓는 경우―을감당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인종별 신상 파악― "흑인 운전자"에 대한 검문을 끔찍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2001년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테러 이후, 여론조사에 응답한 미국인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이 인종별 신상 파악-"아랍계 탑승객" 조사에 반대하지않는다고 답했다. 이 두 가지를 별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리화나 판매책을 체포하는 이득이 무고한 흑인 운전자에게 돌아가는 손해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목숨을 건 공중 납치범을 막는 이득은 아랍계 승객들에게 돌아가는 손해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비용 대 편익 분석은 또한 인종적 특혜를 정당화하는데도 이용된다. 사업장과 학교를 인종에 따라 다양화했을 때 얻는 이득이 백인을 차별하는 비용보다 크다는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 P265

 자칫 재능을 죄악으로 추락시켜 그 해결책을 재분배가 아닌 복수에서 찾을 수도 있다. 20세기의 수많은 잔학 행위가 평등주의의 이름으로전개되었는데, 성공을 범죄의 증거로 여기고 부유층을 공격했다. 소련에서는 쿨락("부르주아 농민")이 레닌과 스탈린의 손에 절멸되었고, 중국문화혁명에서는 교사, 전(前) 지주, "부농"이 모욕과 고문과 살해를 겪었으며,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 하에서는 도시 거주자와 지식 전문가들이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죽거나 처형되었다. 교육과 기업 정신을 자산으로 해 번영을 이루었던 소수 민족들, 가령 동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인도인, 나이지리아의 이보스인,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중국인, 전 세계의 유대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조직적인 학살의 희생자가 된 것은 그들 중 두드러지게 성공한 사람들을 기생충과 착취자로 몰아붙인 결과였다. - P271

 시어도어 루스벨트, H. G. 웰스, 에마 골드만, 조지 버나드 쇼, 해럴드 라스키, 존메이너드 케인스,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마거릿 생어,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 홀데인과 허먼 밀러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우생학을 옹호했다. 왜 그들이 한 방향으로 줄을 섰는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보수주의 가톨릭과 성서 벨트의 신교도들이 우생학을 싫어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식 · 과학 엘리트들이 신을 갖고 놀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우생학을 좋아한 이유는 그것이 현 상태보다는 개혁을, 자유방임주의보다는 행동주의를, 이기심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사회적 목표를 위해 국가의 개입을 확대하는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우생학이 미국과 서유럽의 강제 불임 수술로 이어지고 후에 나치 독일의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우생학을 포기했다. 우생학의 역사도, 인간 본성 개념으로 제기되는 도덕적 문제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좌파-우파 논쟁으로 압축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되는 두 가치관의 충돌이란 측면에서 새롭게 분석되어야 하는 경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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