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만리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온 건 천하를 널리 구경코자 함이거늘. 대체 뭘 망설이는가. 만일 돌아간 뒤에 친구들이 열하가 어떻던가 하고 물어오면뭐라 답할 텐가. 게다가 열하는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인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셈인가."
결국 나는 일행과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정사 이하 수행원들의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는데 나의 성명만은 단자 속에 넣지 않았다. 본디 특별한 임무도 없거니와, 황제의 별상황제가 수행원에게 상으로 물품을 내려주는 것이 있을까 하여 미리 피한 것이다.
사람과 말들을 점검해 보니, 사람은 모두 발이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 실로 제때에 열하에 당도할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빼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장복이를 두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했다.
변계함과 참봉 노이점, 진사 정각, 건량 판사 조학동 등이관문 밖에서 손을 잡고 서로 작별을 고하니, 여러 역관들도다투어 손을 잡으며 무사히 다녀올 것을 빌었다. 떠나고보내는 모습이 자못 처연했다. 함께 먼 이국땅까지 와서 또 다시 작별을 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정이 어찌 그렇지않겠는가. 마두들이 다투어 능금과 배를 사서 바치기에각기 한 개씩을 받았다. 첨운패루 앞에 이르자 모두들 말머리에서 작별을 고하며 눈물을 떨구지 않는 이가 없다. - P150

그러고 보면, 이별의 괴로움 중에 하나는 가고 하나는남겨지는 때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때는 무엇보다 그이별의 장소가 슬픔을 부추기는 법이니, 그것은 정자도아니요, 누각도 아니요, 산도 아니요, 들판도 아니요, 오직물을 만나야만 한다. 그렇다고 꼭 큰 것으론 강과 바다거나 작은 것으론 도랑과 개천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흘러가는것이면 모두 물이 된다. - P155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구슬프게 눈물지을 때이다. 장복과 나는 어버이아들의 친함이나 임금과 신하의 의로움도 아니요, 남편과 아내의 지극한 정이나절친한 벗 사귐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이별의 괴로움이 이토록 지극한 걸 보면 이별의 장소가 오직 강이나 바다, 또는 저 하수의 다리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를테면, 이국이나 타향에서라면 이별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 셈이다.
아아, 슬프다. 예전 소현세자께서 심양에 계실 때 당시 신하들이 머물고 떠날 때나사신들이 오가는 무렵에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임금이 욕되면 신하된 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 마당에선 오히려 평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마 어찌머물고 어찌 떠나갔으며, 차마 어찌 견디고 어찌 보냈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비통한 순간이었으리라.
아아, 슬프다. 내 비록 쥐벼룩같이 미미한 신하지만 백 년이 지난 오늘, 그저 시험삼아 한번 떠올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싸늘하고 뼈가 시려 부서질 듯한데, 하물며그 당시 자리에서 일어나 하직의 절을 올릴 즈음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시 처지가 곤궁하고 위축된 것이 매우 심하고 의심스러워 꺼려지는 것이 너무 깊어서눈물을 참고 소리를 삼키며 얼굴엔 참담함을 드러내지 못했으니, 그 심정이야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당시 남아 있는 신하들이 떠나가는 이들을 멀리서 바라볼때 요동벌판은 끝없이 펼쳐지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아득한데, 사람은콩알만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져 눈길이 닿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끄트머리가 하늘에 잇닿아 그 경계가 사라져 버리고, 해는 저물어 관문을 닫아걸때 그 애간장이 어떠했을꼬.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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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는 장성 밖의 요충지다. 강희제 때부터 여름이면 늘 황제가 이곳에 행차하여 더위를 피하곤 했다. 궁전들은 별반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이궁을 ‘피서산장‘이라 부른다. 황제는 이곳에서 때로는 책을 읽고 때로는숲과 시내 사이를 거닐며 유유자적 노닐었다. 겉으로는 태평하게 휴가를 즐긴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험준한 요새인 이곳에서 몽고의 목을 틀어막고자 함이었다. 북쪽 변방 깊숙이 자리 잡아, 명목은 피서지만 사실은 황제 자신이북쪽 오랑캐를 막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마치 원나라 시절, 황제가 해마다 풀이돋으면 수도를 떠났다가 풀이 시들면 남으로 돌아온 것과 같다. 대체로 황제가 북쪽 가까이 머무르면서 자주 사냥을 나서면 북방 오랑캐들이 함부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한다. 그래서 황제의 행차 시기를 늘 풀이 돋아나고 시드는 때로써 정하는 것이다. 피서라 이름하게 된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올봄에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고서 곧바로 이곳 열하로 왔다고 한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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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 P40

그런 뒤 오대표는 이연에게 갑자기 이상한 걸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궁금한 듯도 하고 마땅한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아불쑥 튀어나온 말 같기도 했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뭔가 뺏고 싶다면 그에게 먼저 그걸 주어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때면, 사랑이나 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어떤 주문을 외듯,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 연인처럼 달뜬 목소리로말했다.
-좋았어요.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김과 박, 서를 등진 오대표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이연이 코트 호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썼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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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파티

며칠 전 이연은 성민으로부터 ‘다음 주말에 혹 시간 있느냐‘
는 연락을 받았다. 자기가 아는 대표님 댁에서 홈 파티가 열리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요즘 방역 상황이 안 좋아 인원이 많지는 않고 대여섯 명 정도 모일 거‘라면서. ‘누나도 알고 지내기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고 평소보다 말을 길게 했다.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 누나가 가장 유명하다‘면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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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 하였다. 이렇듯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치 않아서 자신의 옷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곧 성인과 부처, 현자와 호걸 등 세상을 하나의 노리개 정도로 간주하여, 천하를 다스리는것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럴 때,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 자취는 드러나게 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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