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반추하는 건 주로 사랑받은 기억입니다. 문명과는 동떨어진, 농사짓고 길쌈하고 호롱불 켜고 바느질하고 사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지요. 부족한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른 새벽잠 달아난 늙은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줍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어려서 대단한 울보였던 모양으로 너무 울어서 어른을 애먹인 에피소드가 다양한데 그중엔 노을이 유난히 붉던 날, 할머니 등에 업혀서 그걸 손가락질하며 몹시 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어릴적 일이니까 그걸 보고 왜 울었는지 생각날 리는 없고,
아마 강렬한 빛깔에 대한 공포감이었겠지 정도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때 느닷없이 그게 생생하게 되살아난것이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어쩌면 그건 기억도 상상도, 그 두 가지의 혼동도 아닌 이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어릴 적의 그 울음은 자연의 신비에 대한 나의 최초의 감동과 경외였다는 걸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초로初老의 나이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에서 깼을 때, 새로운 날이 밝아 있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노튼은 변하지 않았다. 노튼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여전히 내 옆에서, 여전히 내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에 만족한 채. - P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지난겨울은 추위도 유별났지만 큰 눈은 또얼마나 자주 왔는지. 나는 도시보다 기온이 3~4도는 낮은 산골 마을에 살기 때문에 거의 한 달을 집에서 꼼짝못 하고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나는 눈 공포증이 있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가볍게 넘어지신 줄 알았는데 엉치뼈가 크게 부서지는 중상이어서 말년의 5~6년을 집 안에만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부터이다.
- P11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 P13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깬 듯 부수수한 얼굴이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자고 있었다면 깨워서미안하지만, 졸리면 집에 가서 편히 자야지 그런 불편한자세로 자면 쓰느냐고 말하다 말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암말 안 했지만 참 별꼴 다 본다는 불손한 표정이 역력해서이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어서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 P48

그러나 그 작은 숲이 불안에 떨 적에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특히 요새처럼 숲이 진녹색으로 두렵게 번들거릴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상한 바람이 숲을 흔들 적이 있다. 그럴 때 숲은 온몸에 비늘을 뒤집어쓴한 마리 거대한 공룡으로 변한다. 중생대의 공룡이 멸종의 예감으로 괴롭게 몸을 뒤채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감이다. 숲의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연대하여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으로 변신한 걸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 제발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만일 사람들이 함께 그런 것을 느낀다면 어떡하든지 숲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다 콘크리트를 치든지 아파트를 짓든지 하고 말 것 같아서이다. 인간은 공포감을 느꼈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숲이 괴롭게 뒤채는 건 미구에 닥칠 그런 운명을 예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노튼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저 끔찍한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여삼추 같은 1초가 흐르고, 2초가 흐르고…… 그리고…… 니야아아아아옹.
숲 밖으로 귀가 접힌 회색 머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노튼을 마지막으로 봤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리고 이어 나머지 몸통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노튼은 길에 서서 특유의 ‘왜 그러세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노튼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잃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깐 동안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장을 지나 걷기 시작했다. 별장 앞에 올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노튼은 집으로 오는 내내 당연히 1.5미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을 테니까.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