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보다 좀 더 연배가 높은 윗세대의 진보적 백인 예술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서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평등한 사회를이루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다. 그들은 가령 나딘 고디머, 아톨 퓌하르트, J. M. 쿠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남아공 작가들에 준하는 남아공 예술가들이었지만, 작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노벨 평화상이든 다른 어떤 상이든 후보로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해외에서는 비교적 무명이었다. 그들의 영웅주의는 지금도 활발하게 토론되는 주제이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의 질도 마찬가지다. 시각 예술은 늘 글보다 간접적인데, 이 사실이 예술가들에게 자유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편 그들이 천명하는 이상을 살짝 흐려 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가 해체된것은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으나, 진보적 백인 예술가들도 분명 깊은 인류애와 도덕적 정의감으로 잔인한 나라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요즘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체제를 짐짓 경멸하고는 그 경멸을 마케팅한 위선자들이라는 이유로종종 비난받는다. 남아공 백인들은 진보주의자라는 딱지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딱지 못지않게 당혹해한다. 백인의 진보주의란 어쩐지 의무감에서 나온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의무감이란 예술의 대립항이기 때문이다. - P216

지난 1980년대, 해외로 쫓겨난 ANC 멤버들이 기획하고 유엔이힘을 실어 주었던 문화적 보이콧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겉보기정통성을 훼손하는 데 기여했다. 보이콧에 따라, 외국 예술가나 운동선수나 학자는 남아공에 가지 말 것을 요청받았다. 거꾸로 남아공인들은 해외 전시회나 대회에 참가하지 말 것을 요청받았다. 이런 문화적 보이콧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물론 그로 인한 고립이 남아공 흑백 예술가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뜻밖의 희망은 있었다. 보이콧이없었더라도 어차피 흑인 예술가들은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대체로단절되어 있었을 것이다. 반면 백인 예술가들은 보이콧이 없었다면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 텐데, 보이콧 때문에 이제 그것은 아주 부유해서 제 돈으로 여행 다닐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꿈꿀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메릴린 마틴은 내게 <문화적 보이콧은 미국과 유럽에 이어져 있던 탯줄을 자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오늘날 남아공 예술계의 독립성과 생명력은 그 고립이낳은 직접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윗세대의 선도적 예술가 중 하나인 수 윌리엄슨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문화적 보이콧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자해를 행한 셈이었죠. 하지만 우리가 결국 남아공인이라는 정체성을 제고하는, 뜻밖의 긍정적 영향도 낳았습니다.」 - P217

제인 알렉산더는 추방자 혹은 부랑자인 흑인 남자들의 모형을 실물 크기로 제작한다. 석회로 모형을 뜬 뒤 넝마를 입힌 작품들은 으스스하고, 쓸쓸하고 매혹적으로 인간적이다. 그녀는 내게 애석하기는 해도 슬프지는 않다는 듯한 느낌으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남아공에는 나 같은 작가들을 위한 자리는 없을 거예요. 모두가흑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상, 낙원처럼 보이는 세상을 원하죠. 흑인 예술가들은 소련 예술가들이 레닌을 묘사했던 방식으로자신들의 지도자를 묘사하고 있고, 백인 예술가들은 기회 균등 조치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나야 할 겁니다. 예전에 잠깐 유색인 학교에서 가르쳤던 적이 있어요. 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도 한 이유였죠. 그런데 어느 날 유색인 교사가 와서 내 자리를 원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 십 년 후에는 내 작품들이 창고에 처박혀 있을 거예요. 당신이 볼 때는 투쟁에 공감하는 듯한 작품들이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현재의 정치 상황, 타협의 정신, 백인들이 들이는 노력, 변화의 추동력에 관해서 말했다. 그녀는 조용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많은 백인들이 불평등을 최대한 빨리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일을 한시바삐 끝내고 싶기 때문이에요」 - P221

이런 환경에서 백인들의 역할은 좀 곤란한 데가 있다. 요하네스버그 예술 재단을 운영하는 백인 관장 스티븐 섹은 이렇게 말했다.「두 단계 과정입니다. 식민주의자들이 파괴하고, 후원자들이 재건을 돕죠 요즘은 흑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마치 백인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흑인들의 작품에 진정성이 더 있었던 것처럼. 최근에 몇몇 흑인 학생들이 색채 이론 수업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유화 화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 구슬 공예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들의 정체성을회복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는 제자리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궁극의 아파르트헤이트식 조치일까요?」 백인들은 가르치려 드는 태도로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낮잡아 보면서도 동시에그것을 감상적으로 다룸으로써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흑백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비하하는 뉘앙스가 있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한 용어인 타운십 예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이 말에는 분리된 예술, 좀 더 원초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예술이라는 뉘앙스가담겨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이것보다 더 싫어하는 용어는 과도적예술이라는 표현이다. 언론에서 종종 쓰이는 이 말에는 논리적 수순으로 볼 때 흑인 전통 예술은 결국 백인 예술로 대체될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 P224

화가 샘 늘렝게트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묻습니다. <어떻게 타운십에서 그렇게 행복한 작품을 그립니까?>타운십에 전쟁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음악, 결혼식, 파티도 있습니다. 바로 옆 골목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요. 폭력이 발생하면, 외부인들은 그것만 보죠. 그건 잘못입니다. 나는 현실의 비율을 예술에도 반영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30퍼센트가 폭력이라면 70퍼센트는 즐거운 축제 같죠. 요전 날 아침에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가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분명 현실의 일부이고, 따라서 내 예술에도 반영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곳으로 외출했습니다. 그렇게 삶의 균형을 맞춥니다.」 - P228

모든 사람들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동등하게 중요하다고단언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고 그 말들이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협화음을 끌어낼 따름이다. 천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으면서 개개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취사선택해야만 한다. 새로운 남아공은 열한 가지 언어를 공식 언어로 쓸 것이라는 결정이 발표된 날로부터 일주일 뒤, 노벨상에 두 차례 후보로 올랐던 인권 운동가 헬렌 수즈만을 만났다. 수즈만은 내게 <통역 과정에서 얼마나많은 것이 사라질지 생각하면 끔찍해요>라고 말했다. 다양성 인정이 아무리 시급한 과제이더라도, 중앙 정부가 당연히 갖춰야 하는 모종의 통일성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 P236

내가 저녁 식사에서 나눴던 대화는 메트가 고궁박물원의 중국미술 작품들을 빌려서 뉴욕에서 열 전시회 이야기였다. 전시는 예정일이 채 두 달도 안 남은 상태였다. 그 전시는 양측이 5년 넘게벌여 온 신중한 협상의 결실이었고, 양국 간 최고 수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협력을 뜻하는 작업이었다. 전시는 원래 섬세한 국제 외교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전시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미국이 한편으로는 중국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인권 유린을 가볍게 꾸짖는 이 시점에, 또한 중국이 꼭 자기 나라에서 이탈한 지방의 한 성처럼 여기는 타이완을 무력으로 통합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이 시점에, 이 전시는 타이완의 존재감과 차츰 커져 가는 자결의 의지를 미국 관람객들에게 상기시킬 것이었다. 1996년 3월 19일 화요일로 예정된 개막일은 타이완에서 첫 대통령 자유선거가 치러질 날로부터 겨우나흘 전이고, 타이완이 그처럼 자유를 과시하는 데 대해 본토는 벌써부터 귀가 먹을 듯 시끄럽게 칼을 덜그럭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서양에서 열린 중국 미술 전시들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일 것이었다. 중국 미술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 주는 작품들이 소개될 것이었다. 그 역사를 대여해 주는 것이 중국이 아니라타이완인 것은 1949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달아나면서 최고로귀한 유물, 회화, 서예, 도자기, 옥, 청동 작품들을 싹 쓸어 갔던 사정 때문이다. 중국은 그 작품들을 도난당한 것으로 여기고, 응당 베이징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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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가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욕조 마개를 막은 다음 수돗물을 제일 세게 튼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P23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나를 끌어당겨 풀밭에 다시 안전하게 올려놓은 다음 혼자 내려간다. 양동이가 옆으로 잠시 떴다가 가라앉아서 꿀꺽꿀꺽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물을 삼키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들어올려진다. - P30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달이 다시 나오자 아저씨가 램프를 끄고, 우리는 달빛 속에서 사구를 내려왔던 길을 쉽게 찾아 따라간다. 사구 꼭대기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직접 신겨준다. 그런 다음 자기 신발을 신고 끈을 묶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돌아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
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 P75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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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
들판에 군데군데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길을 따라 푸릇한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 소를 팔아 치웠던 카뉴 시장을지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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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문명과 현대화와 서구화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페이리는 내게 말했다. 「그러나 서양이 중국보다 앞서서 새로운 방식에 도달한 것은 근대에 와서였습니다. 그전에는 중국이 더 발전된 문명이었죠.」 중국인들은 서양이 산업화를 서양 고유의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진저리를 낸다. 상하이의 기자 보샤오보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공장을 보면 서양 문물이라고 하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백 년 전부터 공장이 있었습니다. 서양은 우리 나라에서 화약을 접한 뒤 당장 그것을 가져다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독립혁명이나 제1차 세계 대전을 중국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자동차를 몰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서구식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그냥 현대적 생활 양식입니다.
서양은 또 수묵화가 아닌 미술은 죄다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중국 예술가들은 서구에서 발달한 시각 언어를쓴다. 하지만 종이는 원래 아시아에서 만들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종이에 그린 모든 그림을 아시아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 모든 유화는 서구식이라고 불리는가? 왜 서양은 개념 예술, 설치미술, 모더니즘, 추상 미술을 모두 자기 것으로 여기는가? 홍콩의 딜러인 앨리스 킹은 귀화 양식을 현대적으로 활용한 작품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중국 그림이라는 게 정확히 뭐죠? 중국에 있는 사람이 그린 그림은 다 중국 그림인가요? 인종적으로 중국인인 사람이 그린 그림은 다 중국 그림인가요? 아니면 양식의 문제인가요? 서양인도 한지와 붓을 써서 그리면 중국 그림인가요? 서양에서는현재 중국 작품들을 곧잘 단순한 모방작으로 폄하한다. 이에 대해 위안밍위안 예술가 마을에 사는 화가 왕인은 말했다. 우리는 예술가로서 우리나라의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서양의 눈에 진부해보이더라도」 - P186

왕도 끄덕였다. 「옌 씨가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법대로 하자고 주장함으로써 관행에 계속 불복하는 것입니다. 옌 씨는 강한 개인이라는 이유로 구타당했던 것이고, 역시 개인으로서 그 사건을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기든 지든,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런생각을 알리고 싶습니다. 개인도 항의할 수 있다는 것, 신념을 지킬방도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 나는 쑹쑹의 이발을 떠올렸다. 이제야 그 퍼포먼스가 왜 그렇게 큰 분노를 일으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 퍼포먼스가 어떤 측면에서 성공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사소한 사건이 어떤 점에서는 폭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술은 자신의 위험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한 성공한다.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개인성이라는 개념, 라오 리가 전형으로서 체화하고 있는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거의 들어보지 못한 생각이다. 그런데 만일 이 개념이 중국의 방대한 인구에게 널리 스민다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결정권을 얻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은 중앙 정부의 종말이자 통제의 종말이자 공산주의의 종말일 것이다. 중국의 종말일 것이다. 중국에 운이 따른다면, 휴머니스트들과 절대주의자들의 이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결정적으로 이겨 버리는 것은 비극일 터이기때문이다. 불의는 물론 끔찍하다. 그러나 중국의 종말 역시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덩샤오핑도, 라오 리와 그를 따르는 예술가들도. - P194

서양미술계는 소련/러시아 미술보다 중국 현대 미술을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그 수용은 서양문화사를 재고하는 작업, 즉 유럽 및 미국 문화가 아시아에 수출한 것 못지않게 아시아로부터 배운 것도 많다는 점을 깨닫는 작업과 시기가 맞물렸다. 아시아가 서양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피상적으로는 칠기나 자기를 애호하는 취향에 머물러 있지만, 철학적으로는그보다 더 심오하다. 미니멀리즘과 형식주의는 아시아 사상이다. 일시성을 칭송하는 아시아의 전통 없이 플럭서스Fluxus 운동이 가능했을까? 우리가 현대 아시아 미술을 모더니즘 미술의 표절로폄하하던 것은 이제 그만두었으니, 다음으로는 모더니즘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아시아를 표절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서양화가들이 서예의 붓질에서 약간의 기법을 배운 것도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이 동양의문자 기반 언어에서 배운 최고의 가르침은 은유적 풍성함으로 언어와 시각적 재현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방법이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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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알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댄버스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들이댔다. "물론 그렇겠죠. 이제 알았나요?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그분은 아직도 이곳 안주인이에요. 진짜 드윈터 부인은 바로 그분이지요. 그림자이고 유령인 건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아무도 원치 않아 내쳐진 잊혀져버린 존재가 바로 당신이에요. 자, 그런데도 맨덜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왜 그분께 맨덜리를 맡기고 떠나지 못하지요?"
나는 창문 쪽으로 물러섰다. 다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다. 댄버스 부인은 내 팔을 붙잡았다.
"왜 가지 않는 거예요? 우린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도 마찬가지죠. 당신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분을잊지 못하니까요. 드윈터 씨는 그분과 함께 이 집에 홀로 있고 싶어 해요. 교회 지하 묘지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그분이 아니라당신이에요. 죽어야 할 사람은 드윈터 부인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댄버스 부인은 창문을 열고 나를 그쪽으로 밀었다. 흰 안개 때문에 형체가 희미해진 테라스가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를 봐요. 정말 쉽지 않겠어요?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목이 부러진다 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주 빠르고 편한 방법이죠. 물에 빠져 죽는 것과는 달라요. 왜 당장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안개가 창밖을 가득 채웠다. 끈적거리고 습한 공기가 내 눈에, 콧구멍 안에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꼭 잡았다.
"두려워 마세요. 밀어버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 옆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대체 당신이여기 맨덜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별로없는거죠? 지금 당장 뛰어내려 끝장을 내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요."
테라스의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수국이 잔뜩 무리 지어 있었다. 돌바닥은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폭신할 듯했다. - P381

"물론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드윈터 씨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잠수부는 보트 주위를 돌다가또 다른 한층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실 문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꽉 잠겨 있고 선창도 닫혀 있더랍니다. 돌을 하나 주워 선창을 깨고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물이 가득 차긴 했어도 안쪽도 멀쩡하더라는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놀라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고 합니다."
설 대령이 말을 멈추고는 누구 엿듣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려는듯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선실 바닥에 반듯이 누운 시체가 보였다는 겁니다. 물론 뼈만 남은 시체였지요. 하지만 사람이 틀림없다고합니다. 머리통과 팔다리가 보였다고 하니까요. 그는 바로 물 위로 올라와 제게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장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다음에는 충격을 받아, 마지막으로는 공포에 휩싸여 그를 응시했다.
"혼자 배를 탔던 게 아닌가요?" 나는 속삭였다. "누군가 함께 있었다는 얘기군요? 아무도 모르게?"
"그런 것 같습니다."" - P408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이겼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의 손 아래 있는내 손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우리 사이에는 늘 레베카의 그림자가 있었소. 그놈의 그림자가우리 둘을 갈라놓곤 했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을 이렇게꼭 껴안아줄 수 있었겠소? 죽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레베카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오. 그 비열한 미소가 또렷하오. 레베카는이미 그때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거요. 결국에는 자기가 이긴다는걸 알고 있었소"
"맥심" 내가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얘길하고 싶은 거예요?"
"그 보트, 그 보트가 발견되었소. 오늘 오후에 잠수부가 찾아냈다는군"
"저도 들었어요. 설 대령이 알려주었죠. 당신은 잠수부가 선실에서 보았다는 그 시체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요."
"결국 레베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누군가 함께 바다에나갔던 거예요. 이제부터 그자가 누군지 찾아내야죠. 그럼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소."
"전 당신과 함께예요. 제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 레베카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없소. 레베카 혼자였소"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얼굴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실 바닥에 있는 시체가 바로 레베카요." - P412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졌다. 레베카가 마침내 장막에서 걸어 나와 살아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 말에게 채찍을 내리치던 레베카 승리감에 도취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발코니에 몸을 기대던 레베카해변에서 깜짝 놀란 표정의 벤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은 친절해. 다른 사람과 달라 날 정신병원에 넣지 않을 거지?"라고했었다. 밤에 그 숲길을 따라 걸어온 다른 사람, 키 크고 늘씬한다른 사람이 있었다. 뱀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맥심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전히 서재를 이리저리 오가면서말이다. "결혼한 지 닷새째 되는 날 결국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았소. 몬테카를로의 언덕 위로 올라갔던 때를 기억하오? 거기 다시 서서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거요. 그 여자는 거기 앉아 깔깔 웃어댔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소.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지.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추악한 얘기였소. 그제야 난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어떤 괴물과 결혼한 것인지 알았소. 혈통과 두뇌, 미모라고? 오 맙소사!" - P423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말이야, 맥스, 당신은 물론이고 세상 그누구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해. 그 아이는당신 성을 물려받고 여기 맨덜리에서 자라겠지. 당신이 할 수 있는일은 하나도 없어. 당신이 죽고 나면 맨덜리는 그 아이 것이 되지이 역시 당신이 막지 못하는 일이야. 그 아이가 유일한 상속인일테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맨덜리를 위해 후계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 아들이 밤나무 아래에서 유모차를 타고 잔디밭에서 목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행복의 계곡에서 나비 잡는 모습을당신도 즐겁게 지켜봐야 해. 내 아들이 날이 갈수록 커가는 것, 당신이 죽으면 이 모든 게 그 아이 소유가 되리라는 것은 맥스, 당신인생 최대의 악몽이 아니겠어?‘
그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담뱃불을 붙이고 창가로 가서 섰소, 그리고 웃어대기 시작했지. 한참을 그치지 않고 웃었소. 영원히 그렇게 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 ‘오, 하느님, 정말이지 얼마나 기막히게 재미있는지! 자,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 말뜻을 당신도 이해했겠지? 멍청한 주민들, 눈먼 소작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늘 바라마지않던 일이라고 주인 나리에게 축하 인사를 하겠지. 난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이제까지 완벽한 아내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를 거야. 아니, 추측조차 못 할걸‘
그 여자는 창가에서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았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담배를 쥐고 있었지.
내가 죽여버렸을 때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소. 총알은 정확히그 몸을 관통했다오. 그 여자는 금방 쓰러지지 않았소.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소......"
이어 맥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속삭임으로 변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이 차디찼다. 나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 누워 잠자는 재스퍼의 등을, 가끔씩 바닥을 살짝 내리치는 그 꼬리를 쳐다보았다.
"난 생각을 못 했소."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지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그토록 피가 많이 흐른다는 걸 말이오." - P434

"부인께서는 그렇게 진실을 요구했고 전 알려드렸습니다. 어떤환자들에게는 그편이 더 좋은 법이지요. 괜히 복잡하게 말해봤자 좋을 게 없거든요. 댄버스 부인인지 드윈터 부인인지 하여튼 그 부인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분이 아니더군요 여러분도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인께서는 침착했습니다. 전혀 충격을 받지않더군요. 이미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료비를 내고 나갔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파일함을 닫고 서류철도 덮었다. "제 진단 소견은 이랬습니다. 그때는 통증이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곧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이고 서너 달 후에는 모르핀을 맞아야 한다고요. 이미 수술할 때가 지났으므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르핀을 맞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째깍거렸고 소년들이 테니스를 쳤다. 하늘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 P572

"줄리언 대령이 진실을 눈치챈 것 같소?"
나는 내 안경 너머로 맥심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분명 알았을 거요 분명히 맥심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해도 절대로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절대로"
"그야 그렇겠지"
그는 지배인에게 다시 술을 시켰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구석 자리에서 말없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레베카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요. 마지막 허세였지. 내가 자기를 죽이게 만들고 싶었던 거요. 모든 것을 다 내다보았겠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어댔던 것이고 죽으면서도 그렇게 웃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나는 침묵했다. 그저 브랜디소다를 마셨을 뿐이다. 이제 다 끝났다. 다 정리가 되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맥심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질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한 방 먹인 셈이지. 가장 멋진 한 방이었소. 지금도 나는 레베카가 이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 P583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하늘을 보았다.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듯 붉은 기가 돌았다. 붉은 기는 조금씩 퍼져갔다.
"오로라는 겨울에 보이는 거지요? 지금 같은 여름에는 안 보이지요?"
"저건 오로라가 아니오. 저건 맨덜리요"
나는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맥심 맥심, 저게 뭐죠?"
그가 속도를 냈다. 차는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다. 래니언은 이제 발밑에 있었다. 왼쪽에는 가느다란 은빛 강줄기가흘렀다. 9킬로미터 떨어진 케리스로 가면서 점점 더 넓어질 강줄기였다. 이제 맨덜리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달이 없었다. 머리 위쪽 하늘은 완전히 깜깜했다. 하지만 지평선은 깜깜하지 않았다.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함께 불탄 재가 날아왔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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