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자신의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자기를 둘러싼 어른들이 세파에 휩쓸려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 P179

그렇게 해서 교문을 나오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버렸는데 장미다발을 든 순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어서 이런 마중이 개가준비한 생일 이벤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황스러운건 내 마음이었다. 나에게는 심한 거부감, 당혹감 같은것이 일었다. 그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느라 순신이 입고 있는, 학교 이름이 또렷하게 박힌 교복 때문이었다는것을 지금도 아프게 기억한다. 그래서 웃으며 반겨주지못했다는 것을. 미소가 서서히 가시며 순신은 내 표정을 살폈다. 지금도 가끔 기억 속으로라도 손을 내밀어 안쓰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촌애라 공돌이랑 연애하네."
빽이 큰 소리로 말하며 지나갔고 나는 손을 뻗어 걔의 가방손잡이를 확 잡았다. 빽은 뒤가 들린 채 어어, 하다가엉덩방아를 찧었다. 리사는 가만히 서서 사태를 지켜볼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씨발년아, 말 곱게 해라."
그렇게 쏘아붙이고 돌아서자 당황한 순신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쫓아왔다. - P199

마리코 히메는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뛰었다. 여름 해도 다 졌으니 아홉시가 곧 다가올 것이었다. 쿠마 센세이를 끄집어내서 그 등을 타고 멀리멀리 가버릴 테다.
일단 우리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주어야지, 쌀만두를 쪄서 같이 먹어야지. 마리코 히메가 호미로 자물쇠를 내리치자 동물사의 동물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도망쳐!"
나 마리코 히메는 열심히 알렸다. 그 소리를 듣고 정작 갇힌 동물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경비원에게 마리코히메만 쫓겼다. 큰물새우리 근처에 숨었다가 쿠마 센세이에게 갈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모기 떼가 감히 나마리코 히메의 다리를 물어대는데도 기다렸다. 폐장한 창경원 안으로 총을 든 엽사들이 오가는데도 기다렸다.
이윽고 아홉시가 되었는지 고무장화를 비롯한 여러그림자들이 돌아다니며 동물 우리 안으로 고구마를 던졌다. 얼마 지나자 그것을 먹은 들소가 캥거루가 하마가 멧돼지가 타조가 사지를 떨며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왕의 마부였던 시절부터 길렀던 제주 말의 자손들을 죽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바로 죽지 않는 동물은 그림자들이 직접 들어가 해결했다.
"약이 모자란지 안 죽는데, 이봐, 창을 가져와 내가 찔러볼 테니."
쿠마 센세이 앞에서 오니 아이가 말했을 때 나 마리코 히메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대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기절해버렸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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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 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 개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본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 P156

"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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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의 글은 황교통(黃橋通), 곧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의 출근길을 회상하며 시작했다. 열여섯 소년은 냉맥주와 냉사이다를 파는 노점들을 통과해, 복숭아와 하귤을 문전에 늘어놓고 유람객과 총독부 의원의 손님들을 호객하는 장사꾼들을 지나 궁으로 들어온다. 가슴에는 이름표와 표찰이 달려 있고 갈색 작업복을 입었다.
출근부에 사인을 하지만 사무소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의 자리는 대온실부터 붉은사슴, 영양, 노루, 얼룩말들이 있는 동쪽 초식동물사까지 전체이니까. 궁에는 하루도 조용한 아침이 없었다. 홍화문을 들어서자마자 동물 소리가 포획하듯 귀를 덮었다. 귀 있는 사람이라면 듣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대만, 일본, 히말라야, 필리핀,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수십마리의 원숭이가 노는 소리, 제주 말과 요크셔 돼지들이 우는 소리, 삶과 늑대가 목적 없이 위협하는 소리, 동양 최대의 큰물새우리에서 들려오는 두루미와 흑고니, 왕관앵무와 펠리컨과 청둥오리, 가마우지 같은 새들의 지저귐, 노천방사장을 나는백여종 새 떼의 날갯짓, 그 모든 것이 동물사 냄새와 함께 아침을 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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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대답 못하면 쑥스러워하거나 창피해하거나 그래야 하잖아? 근데 얘는 그런 게 없어. 뭐랄까, 그냥 칠판이나 담장 같은 게 된 것 같아."
칠판이나 담장 같은 아이. 어쩌면 아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일들은 외부의 두드림에도 응답을 내놓을 수 없는 심한 무기력을 만들어내니까.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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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사는 할머니에게 냉랭했고 확실히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잃어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부산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고 할머니도 있으니까,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가족 아쉬운 줄을 모르게 마련이었다. 명절이면 섬 밭두렁에 도시 차들이 열 지어 주차되어 있고 거기서 내린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 사촌들을 따라 마을 구경 다니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게 마음 서늘하도록 부러운 사람도 있다는 걸.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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