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런 걸 말하는 애가 아니었어."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것 같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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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의 발로는 마치 고철(古鐵)이 활기차게 못에서 뛰어오르고, 봄철 죽순이 성내듯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다. 거짓으로꾸민 감정은 마치 먹을 매끄럽고 넓은 돌에 바르고, 맑은 물에 기름이 뜨는 것과 같다.  - P205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도강록(渡江)」 칠월 팔일(갑신일)자에 실려 있는 <호곡장론(好哭場論)>을 읽어 볼만하다. 조선을 벗어나 요동벌판을 처음 본 박지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 가히 한바탕 울 만한 곳이야!" 그때 옆에 있던 정진사라는 이가 박지원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를 보고 갑자기 통곡을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에 박지원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 오직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 뿐 사실 일곱 가지 감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알지 못하네. 기쁨이 지극해도 울 수있고, 노여움이 지극해도 울 수 있고, 즐거움이 지극해도 울수 있고, 사랑이 지극해도 울 수 있고, 미움이 지극해도 울수 있고, 욕망이 지극해도 울 수 있지. 답답하게 맺힌 감정을 활짝 풀어 버리는 데는 소리 질러 우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법이 없다네." 그러자 정 진사는 재차 묻는다. "지금 울만한곳이 저토록 넓으니, 저도 선생과 같이 한바탕 통곡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일곱 가지 감정 가운데 무엇에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감정을 골라잡아야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박지원은 "그것은 갓난아이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이네"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배 속에서 막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맞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야말로 거짓 꾸밈없는 천연의 감정이자 최초의 본심이라고 말한다.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겠는가?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동안 어둡고 막혀서 답답하게 지내다가 어머니의 배 속을 벗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 손을 펴보고 다리를 펴보게 되자 마음과 정신이 넓게 활짝 트이는 것을 느낄 것이네. 어찌 참된 소리와 감정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크게 한번 발출하고싶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는 거짓 꾸밈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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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데리고 가라. 그녀의 치마를 꼭 붙들고 있던 엄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내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증조모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중조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녀는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일평생 입다물고 죽은듯이 살았던 열일곱의 증조모가 마지막 나날에야 자유로워졌다.
할머니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를 보고는 방긋 웃던 증조모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어마이, 어마이 왔어?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에게 두 팔을 쭉 내밀던 모습이 말이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성으로 오고 나서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형과 누나들도 보고싶고 엄마 아버지도 보고 싶고 두고 온 벗들도 생각났다. 건너 들었을땐 꿈처럼 느껴지던 개성의 거리도 온통 시끄럽고 번잡스러울 뿐 마음을 둘 장소가 아니었다. 겨우 얻은 셋방도 가축우리처럼 느껴졌다.
버젓한 마당과 우물이 있는 고향집이 그리워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깼다.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그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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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희령에 처음 간 건 열 살 때 일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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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드물긴 하지만 돌연변이가 개체를 희생하고 집단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 이 돌연변이는 생물학적 집합을 더 단단히 결속하는 바늘땀이다. 특수화specialization-하나의 세포가 체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는 것-는 대체로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이로운 단계로 간주된다. 좋은 잎, 좋은 방울 비늘조각, 좋은 뿌리가 되는 일에 전념하는 세포는 팔방미인 세포를 앞설 수 있다. 그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또다른 이점은 세포의 특수화 증가가 세포 개별성의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외톨이 뿌리 세포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잎 세포와 연결된 뿌리 세포는 다윈주의적 혁신의 성공 사례일지도 모른다. 단일 세포의 이기주의로 돌아갈 가능성을 차단했으니 말이다.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세포 사멸은 외톨이 세포의 진화적 가능성을 차단하고 집단에 유익을 주는 또 다른 돌연변이다. 우리의 신경계는 쓸모없어진 세포가 자기희생적으로 자살하여 솎아내기를 하지 않으면 오발의 난장판이될 것이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배아세포가 죽지 않으면 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붙은 채 태어난다. 특수화, 프로그래밍된 조기 사멸 같은 세포적 변화는 풀 수 없는 매듭이다. 생명의 끈은 한 번 묶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 짜임은 더욱 단단해진다. - P71

발삼전나무가 서 있는 한대림 가장자리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 흐름이 유난히 거세다. 오늘날 연료, 곡물, 목재는 가장 활발하게 이동하는 생물 에너지 형태다. 200년 전에는 모피와 담배가 화폐 역할을 했다. 여름이면 캐나다 중부와 북부 전역에서 올무꾼들이 모여 펠트를 꼬인 담뱃잎과 교환했다. 발삼전나무가 서 있는 길은 옛 교역로중 하나로, 높이 40미터의 카카베카 폭포를 지난다. 일꾼들이 녹빛 건플린트 도로를 묵묵히 걸어간다. 각자 40킬로그램짜리 짐을 두 개씩 짊어지고 내륙 수로인 카미니스티키아의 카누를 향해 간다. 일꾼들은 버지니아의 담뱃잎을 숲으로 나르고 펠트 수십만 장을 유럽으로 운반했다. 비버는 속 털로 펠트 모자를 만들 수 있어서 귀하지만, 사향뒤쥐, 여우, 수달, 곰, 구즈리, 심지어 북극의 물범까지 북부 지방의 온갓 모피가 실려 왔다. 모피 무역은 금세 무너졌으며 지역 경제는 광산과 목재 수출로 방향을 틀었다. 이것은 인류의 오래된 연결로 거슬러올라간다.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인도의 구리가 이 지역에서 남아메리카로 운반되었으며 도자기 제작 기술이 북쪽으로 흘러들었다. 이러한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발삼전나무의 나뭇진으로 자작나무껍질 카누의 솔기를 메우고 방수했기 때문이다. 무역과 지식을 나른것은 향기 나는 나뭇진이었다. - P74

한대림은 지구상의 나머지 지역보다 훨씬 빨리 더워지고 있다. 최근의 숲 유실은 대부분 잦아진 산불 때문이다. 산불이 나면 토양의 탄소가 연소될 뿐 아니라, 불길이 식물 덮개를 파괴한 뒤에는 나머지 흙이 무방비로 노출된다. 산불로 인해 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면 한대림은 탄소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흡수원sink‘에서 토양에서의 유입량보다 대기로의 유출량이 더 많은 ‘발생원source‘으로 바뀐다. 대기 중 탄소는 온실가스이기 때문에, 한대림이 탄소 흡수원에서 탄소 발생원으로 바뀌는 것은 대기 이불에 솜을 더 채워 넣는 격이다.
산불만큼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흙의 관계망 변화가 있다. 온도가 높아지면 토양 미생물은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다. 흙의 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미생물의 활동이 기하급수적으로증가한다. 더위가 며칠이나 몇 주간 계속되면 공동체의 구성이 달라져 추위에 적응한 미생물이 더위를 좋아하는 미생물로 대체되면서 미생물 활동이 더욱 가속화된다. 이 변화의 결과로 부패가 더욱 빨라진다. 죽은 바늘잎, 뿌리, 균류, 미생물은 흙에 사는 공동체를 통해 처리되며 잔해는 하늘로 올라간다. 생물학적 산불은 연기가 나지 않지만,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탄소의 지구적 흐름이라는 점에서는 불길의 드라마보다 더 중요하다. - P80

사발야자나무

조지아 주 세인트캐서린스 섬
31°3540.4" N, 81°09‘02.2" W

뉴턴의 구들이 허공을 휘돈다. 지구와 달이 태양 주위를 돌면서지상에 낮과 밤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달은 회전하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서로의 하늘에 호를 그린다. 중력의 끈이 모든 질량을 그 질량이 별이든, 달의 티끌이든, 대양의 물방울이든- 서로 연결하지 않으면구들은 튕겨져 나갈 것이다.
지구에서 달의 움직임을 좇아 물이 팽창한다. 땅도 달을 향한 중력의 끌림을 느끼지만 바위가 단단하게 버티고 있어 꿈쩍하지 못한다. 바다는 육지보다 순응적이어서 달의 인력과 지구의 회전에 반응하여 조석을 일으킨다. 어느 해안에 가도, 맞물린 궤도의 고리가 밀물과 썰물로 나타난다. 인류가 동력과 지력을 모조리 동원해도 이만한 부피의 물을 움직일 수는 없다. 육중한 바다를 들어 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회전하는 구는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관계로부터 고요히 힘을 발생시킨다.
구들이 회전하다 같은 축을 따라 정렬하면 태양과 달의 중력이 합쳐져 지구의 물이 가장 높이 올라가고 가장 낮게 내려가는 한사리가 일어난다. 며칠이 지나 달과 태양이 맞서면 중력이 약화되어 완만한 작은사리가 일어난다.
천 체기하학의 추상적 차원에서 상상한 물의 움직임은 질서정연하며 수학적 엄밀함으로 가득 차 있다. 불규칙한 해안선과 수심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인다. 지구와 대양을 다스리는것은 꾸준하고 예측 가능한 하늘의 손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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