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끔찍한 이유가 본질화(essentialization)하기 때문이거든요. 사람이 가진 특징 중 일부를 들어서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해버리는 것이요. ‘흑인은 이렇다‘, ‘이주노동자는 이렇다‘, ‘연변에서 온 사람들은 이렇다‘는 식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죠. 사실, 해당 집단에 속한 개개인 모두가 너무나 다양해서 한두 가지 특징으로 묶을 수는 없잖습니까. ‘한국인은 이렇다‘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위험하고 또 비과학적이죠. 조심스럽기는 한데, 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 중에 험한 말을 쓰는 분들이 간혹 있잖아요. 듣고 있으면 ‘무식해‘ 보이죠. 그런데 그 ‘무식하다는 느낌‘을 역사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해석해내지 않고 지능과 연결시켜버리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경제적인 계층을 ‘지능이 낮은 계층‘으로 본질화해버리는 거죠. 지능이 낮으니 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인데, 정말 끔찍한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와도 닿아 있고요. - P55
네. 이처럼 읽을 줄 안다 모른다를 결정하는 힘이야말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권력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때 말과 글이 누구의 말과 글이냐는 것인데요. 관공서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죠. 그건 그 사람들한테는말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살아남기 위해서, 속지 않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이해해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너무 어려워요. 리터러시라는 말은 이미 ‘누군가‘의 말과 글만 말과 글로 상정하고, 그 누군가가 아닌 사람들의 말과 글은 배제하고 출발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도 리터러시에서 중요한 것이 상호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네가 말을 못 한다. 네가 글을 못 읽는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가 될 때에야 비로소 리터러시가 상호적인 것이 되고 서로가 성찰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하고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힘쓰게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읽는 방식대로 읽지 않으면 ‘너는 문맹이야, 난독증이야‘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짓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모욕하고 비인간화하는 일이에요. - P64
리터러시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어떤 윤리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이게 얼마나 권력적인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리터러시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사회를 서열화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 또는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거죠.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리터러시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가 중요한 자산을 잃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정치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징적 자산을 잃었다는 거죠. 저는 정치를 잘 모릅니다만,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메타포를 가장 노련하게 다룬 분이 노회찬 의원이었다고 생각해요. 메타포, 은유라는 게 여러 가지 담화적인 또 사회적인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들을 좀 더 구체적인 것과 연결시켜서 이해의 지반을 만드는 것이에요. 정치적인 논의에서 어떤 벽이 있을 때 원론적인 얘기나 단순 정보를 반복하면 정치를 둘러싸고 있는 대중, 정당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 혹은 일반 뉴스 소비자들이 바로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죠. 이럴 때 적절한 메타포를 들어주면 대번에 이해가 되는데, 중요한 건 원래 사안의 핵심을 버리지 않고 메타포에 담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빠르게 적절한 메타포를 구사하는 정치인은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에요. - P67
이렇게 볼 때,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동일한 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요. 동일한 언어들이 반복되는 걸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동감합니다‘인데요.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을 이 사람이 썼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나하고는 다르게쓰거든요. 좀 더 디테일하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좀 더디테일하게. 대신 내가 좀 더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부분은 빠져 있겠죠. 이런 격차,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차이를 없애버리는 말이 ‘동감합니다‘예요. 생각해보세요. 동의한다, 동감한다는 말은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뜻이죠.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거기에서무슨 배움이 일어나고 도약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강화만 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게 강화라고 생각해요. 제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3부에서 제가 강조했던 게, 이런 의사소통의 공간은 서로의 감정의 강도만 강화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엄기호,2019). 공감이라는 이름으로요. 문제는 이 공간이 전혀 성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도 출간되었습니다(폴 블룸, 2019). 뭔가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 같고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도만 세질 뿐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터러시를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한 상태에서 계속 강화만 되는 것은 비문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고볼 수 있습니다. - P72
텍스트성이 자리 잡은 문화에서는 텍스트 간의 관계, 위계가 중요해져요. 어떤 텍스트가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더 큰가, 어떤 텍스트가 더 권위가 있는가, 이런 것이 중요해지죠. 리터러시 연구에 있어 기념비적인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월터 옹은 등위접속사에서 종속접속사로 넘어가는 것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이의 큰 차이라고 얘기했어요. 쉽게 말하면, 구술문화의 특징은 발화가 and로 연결되는 데 반해 문자문화는 that과 같은 종속절이 주요한 특징이라는 거죠. 구술성의 주요한 특징이 문장이 첨가적으로 이어진다는 건데요. 아이들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해요. "이거했고 그리고 이거했고그리고 이거했어." 이 말 속의 and에는 위계가 없어요. 계속 내용이 첨가되는 거죠. 하지만 문자문화에서는 위계가 생기죠. 영어로 I think that~이라고 하면 that절이 I think의 하위로 들어가죠. Before나 after같은 접속사는 시간적인 순서를 규정하고요. 문자문화가 발달할수록 and로 연결되는 문장보다는 주절과 종속절이 결합된 문장이 많아지는 겁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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