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데리고 가라. 그녀의 치마를 꼭 붙들고 있던 엄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내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증조모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중조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녀는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일평생 입다물고 죽은듯이 살았던 열일곱의 증조모가 마지막 나날에야 자유로워졌다. 할머니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를 보고는 방긋 웃던 증조모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어마이, 어마이 왔어?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에게 두 팔을 쭉 내밀던 모습이 말이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성으로 오고 나서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형과 누나들도 보고싶고 엄마 아버지도 보고 싶고 두고 온 벗들도 생각났다. 건너 들었을땐 꿈처럼 느껴지던 개성의 거리도 온통 시끄럽고 번잡스러울 뿐 마음을 둘 장소가 아니었다. 겨우 얻은 셋방도 가축우리처럼 느껴졌다. 버젓한 마당과 우물이 있는 고향집이 그리워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깼다.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그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 P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