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 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 그 약초의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닙니다. 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 P89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생각과점점 부풀어오르는 숨가쁜 희망으로 따끔거리는 살갗을 달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미르라나무문이 등뒤에서 닫히고 우리는 복도에 섰다. 아이에테스는 기적을 일으켜 아버지의 말문을 막은 것치고는 표정이 침착했다. 내 입에서 천 개의 질문이 쏟아져나오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이렇게 한참이 걸릴 줄이야.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 P90

"게다가 모두들 이 능력을 갈구하거나 찾아 나선 적이 없다고도해두었소. 어떤 악의를 품거나 반란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고 다들약초의 마법을 우연히 발견한 것뿐이라고."
나는 놀라서 남동생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키르케만 예외일 뿐. 그 아이가 그 능력을 공공연하게 찾아 헤맸다고 고백했을 때 그대들 모두 이 자리에 있었소. 그 아이는 손을 떼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말을 거역했소."
외할머니가 상아를 깎아 만든 의자에 앉아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내 권위에 도전했소. 독약으로 동족을 변신시켰고 다른 반역 행위도 저질렀소." 새하얗게 이글거리는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우리 이름을 더럽혔소. 우리가 보여준 애정에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였소. 그렇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제우스와 합의를 보았지. 키르케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무인도로 추방될 거요. 바로 내일."
천 개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소리를 지르며 애원하고 싶었지만숨이 막혔다. 그 가느다란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이에테스가대변해줄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나머지 전부와 함께 나를 돌아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한 가지 더," 아버지가 말했다. "언급했다시피 이 새로운 능력은나와 페르세의 합궁이 그 원천인 게 분명하오."
의기양양한 어머니의 얼굴이 내 흐릿한 의식을 뚫고 환하게 빛났다.
"따라서 합의를 보았소. 그녀와는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자매들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돌벽을 맞고 메아리쳤다.
외할아버지가 천천히 일어섰다. 턱을 문질렀다."자," 그가 말했다. "이제 연회를 벌일 차례구나." - P98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올 일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두려운 사실이었지만 공포로 얼룩진 긴 밤을 보내고 났더니 모든 게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못난 겁쟁이의 면모가 진땀과 함께 날아갔다. 아찔한 번뜩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새장에서 사육당하는 새는 되지 않을 거야, 흐리멍덩해서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이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 P108

"당연하지. 제우스는 너희가 우리 모두에게 대항하는 독약을 만들고 있다고 확신해, 너하고 네 남동생 둘 다. 그가 얼마나 안달복달하는 성격인지 알잖아." 그는 무슨 공범인 양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제우스의 분노가 가벼운 농담이라도 된다는 식이었다.
"그럼 제우스의 염탐꾼으로 온 건가요?"
"나는 사자使者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지. 하지만 아냐, 이 문제는 아버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내가 찾아온 건 형이 나한테 화가 났기 때문이야."
"형이라고요." 내가 말했다.
"응." 그가 말했다. "너도 그에 대해 들어봤을 텐데."
그는 망토 안에서 리라를 꺼냈다. 황금과 상아로 무늬를 새겼고새벽처럼 환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내가 이걸 훔친 것 같거든." 그가 말했다. "그래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곳이 필요해. 너라면 나를 가엾게 여겨주지않을까 싶었어. 여기라면 그가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거든."
내 뒷덜미가 곤두섰다. 제정신이 박힌 자라면 누구나 햇빛처럼 고요하고 역병처럼 치명적인 아폴론 신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가 이미 하늘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지는 않은지, 황금 화살로 내 심장을겨누고 있지는 않은지 어깨 너머로 확인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공포와 경외라면, 하늘을 쳐다보며 무슨 허락이 내려질지 궁금해하는 거라면 지긋지긋한 마음도 있었다.
"들어와요." 내가 말하고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 P119

"이 섬의 이름을 알아요?" 내가 물었다.
"내가 명색이 여행자의 신인데 세상에 이름 모르는 곳이 있을 리없지.""알려줄 수 있어요?"
"아이아이에라고 해." 그가 말했다.
"아이아이에." 나는 그 발음을 음미해보았다. 어두워진 허공 속의날개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접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섬인지 아는구나."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예의 주시하고있었다.
"당연하죠. 제 아버지가 제우스 앞에서 모든 능력을 내던지며 충성을 맹세한 곳이잖아요. 여기 하늘 위에서 티탄 신족 거인을 쓰러뜨려 땅을 피로 적셨고요."
"우연의 일치로군." 그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다른 데도 아닌이 섬으로 너를 보내다니."
그가 내 비밀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해답으로 넘칠 듯이 채워진 잔을 얼른 내밀고 그가 원하는 걸 뭐든 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신세를 진 일이 없었다. 그는 내가 내주는 만큼만 나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강가의 돌처럼 노란 내 눈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내 독약을 두고 한 판단이 틀렸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물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약을 먹이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 있겠다는 거예요?"
"나는 위험한 일이면 뭐든 좋아하거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 P123

"내 아이를 낳아줄래?" 그가 물었다.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뇨. 절대, 절대."
그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식의 날카로운 대응을 좋아했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피 한 방울 흘릴 일이 없었으니까. 해답을 강구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는 것이 그의 천성이기에 오로지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물은 거였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빠졌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뱅충이는 모두 사라졌다. 낮동안 드러누워서 그의 꿈을 꾸거나 베개에 대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남편이 아니었고 심지어 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독사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런 조건으로 만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 P124

"여기서 멀지 않아. 인간의 배를 타고 하루도 안 돼서 닿을 수 있어. 마음에 드는 해협을 찾았거든. 한쪽에는 소용돌이가 있어서 배가됐든 물고기가 됐든 지나가는 걸 뭐든 빨아들이지.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는 그녀가 머리를 숨길 동굴이 있고, 소용돌이를 피한 선박은 그녀의 입속으로 직행해 먹잇감으로 전락하지."
"먹잇감이라고요." 내가 말했다.
"응. 그녀는 선원들을 잡아먹거든. 입 하나당 한 명씩 여섯 명을 한꺼번에 노 젓는 속도가 느리면 열두 명을 잡아먹지. 싸우려고 드는인간도 가끔 있지만 어떤 식으로 끝날지 너도 알잖아. 비명소리가 제법 멀리에서도 들리지."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얼어붙었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헤엄치며오징어의 차가운 살을 빨아먹는 그녀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스킬라는 예전부터 밝은 빛을 좋아했다. 남을 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빨이 가득하고 불사로 무장한 게걸스러운 괴물이 되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제우스나 너희 아버지는 가능하지,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뭐 하러 그러겠어? 괴물은 신들에게 요긴하거든. 다들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드릴지 생각해봐."
목구멍이 조여왔다. 그녀가 잡아먹은 인간들은 예전의 글라우코스처럼 행색이 남루하고 절망적이며 공포로 너덜너덜해진 뱃사람이었다. 그들 모두가 죽었다. 내 이름이 찍힌 싸늘한 연기가 되었다.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