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는 그러한 조건은 일단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유재산이 있는 한, ‘고귀, 장엄, 광휘, 위풍에 대한 인간의 마르지 않는 욕망은 불가피하게 다수의 인간을 비참한 상황속에서 분개한 채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게 만드는 부의 불공평한 분배틀 낳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모어는 공산주의 같은 생각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토피아인은 신의 섭리나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노예 신분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엄벌에 처한다. 신의 섭리와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루크레티우스의 시 전체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말하자면 모어는 포조에 의해서 100여 년 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된 이래 가장 일관되고 지적으로 이 시를 수용했으나, 동시에 시의 기둥을 다시부정함으로써 세심하게 그 핵심을 제거한 셈이다. 모어는 자신이 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영혼이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우연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은 체포해서 노예로 만들었다. 영혼의 사멸과 세상의 우연성을 믿는 자들을 이렇게 가혹하게 대우한것은, 쾌락의 추구가 공적인 삶에서 물러난 소수의 혜택 받은 철학자 무리를 벗어나 일반 사회에까지 실현되기 위해서 모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모어는 사람들이 최소한 중요한 섭리와 계획─상태로서의 우주뿐만 아니라 그 근본구조까지 모든 것에 관한-이 있다는 것만큼은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쾌락에의 추구를 규제하고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기 위한 규범 역시 신의 섭리에 따른 계획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강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후세계에 보상과 처벌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야만 했다. 만약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지 않게 된다면, 모어가 보기에는 불공평한 현실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무거운 형벌과 과도한 보상을 대폭축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P289
그러나 브루노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브루노는 스스로에 대해서이렇게 썼다. "그의 지각과 이성의 빛은 저 진실의 회랑의 문을 열어젖히게 했다. 이제 지극히 성실한 탐구라는 열쇠로 그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그는 덮이고 가려져 있던 자연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두더지에게는 눈을, 눈먼 자에게는 빛을 주었으며……복잡한 속내를 감히 표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벙어리의 혀를 풀어주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태도로 그는 루크레티우스를 모델로 하여 지은 라틴어 시집 「거대함과 무수함에 관하여(De innumerabilibus, immenso, et infigurabili)』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는 일찍이 베수비오 화산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고, 그의 눈으로는 화산 너머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이 무한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은 자신이 속한 문화가 강요하는 좁은 정신적 틀 안에 스스로를 속박할 수 없었다. - P300
브루노를 침묵시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다시 암흑 속으로돌려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웠다. 진짜 문제는 일단 루크레티우스의시가 세상에 다시 발을 들여놓자, 인간의 경험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글귀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영향을 받은 자들의 대다수는 스스로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회화나 서사시적 사랑 이야기에 드러난 루크레티우스 시의 반향은 과학자나 철학자가 쓴 글에 나타난 경우보다는 당국의 심기를 덜 어지럽혔다. 성직자들은 사상경찰이 이단적인 생각을 품은 것으로 의심되는 예술작품을 감독하는 데에는 상당히 소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루크레티우스의 재능이 그의 급진적인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있던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었다. 화가로는 산드로 보티첼리, 피에로 디 코시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인으로는 마테오 보이아르도,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토르콰토 타소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피렌체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도 루크레티우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나타났다. - P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