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크 수도원의 젊은 베네딕트 회 수련사였던 내가 루드비히 황제의 직신(直臣)이었던 선친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의 평화로운 독방에서 나올 때의 사정은 대강 이러했다. 선친께서는 이탈리아도 두루 견문케 하고 황제 대관식도 직접 보게할 요량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그러나 피사가 포위되자 선친께서는 전투에만 몰두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선친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반은 좀 한유(閑遊)하고싶어서, 반은 마땅한 스승 밑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욕심으로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방랑했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이 방만한 자유가 사색의 삶에 평생을 던져 넣은, 한창 나이의 젊은 나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선친께서는, 전부터 나를 눈여겨보시던 마르실리오와 이 문제를 상의, 결국은 나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인,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의 수하에 넣기로 작심하시게 된다. 당시 윌리엄 수도사께서는 모종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큰 도시 및 큰 수도원을 차례로 순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윌리엄 수도사의 필사 서기(筆寫書記) 겸 시자(侍者)로 시봉하게 되었으니, 그 뒤로 한번도 후회한 적이없다. 그분과 더불어 나는, 지금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후세사람들에게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될 터인 저 놀라운 사건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 P35

윌리엄 수도사의 외모는 남의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시선도 능히 끌 만큼 준수했다. 키는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러나 몸매가 호리호리한 탓에, 그 큰 키는 실제보다도 더 커 보였다. 그의 눈은 매섭고 형형(炯炯)했으며, 가늘고 매부리처럼 살짝 아래로 기울어진 코 때문에 그의 얼굴은 파수 보는 사람처럼 늘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표정 때문에 그분 앞에서 말을 머뭇거릴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히베르니아 사람들이나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얼굴이 대개 그렇듯이 주름살로 뒤덮인 그의 긴 얼굴도 주저와 당혹을 숨기기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그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배짱이 별로 두둑하지 못한 분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할 때마다 그런 얼굴을 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표정이 지니는 매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내가 그 호기심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걱정으로 받아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이성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마땅히 그런 걱정을 경계하고, 진리에만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마음이 어리던 나는, 그의 귓속에서 비죽이 비어져 나온 노란 털 무더기와 짙은 금빛 눈썹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는 꽃 피는 봄을 쉰 번이나 본 분이어서 당시 이미 노경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과 지칠 줄모르는 정력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격정의 충동을 받으면 그의 정력은 고갈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뒤로 물러앉아 가만히 정관만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그의 정신은 가재가 되어 살금살금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것같았다. 그는 그런 상태에 들 때마다 독방의 잠자리에 누워 얼굴 근육 한 올 움직이지 않은 채 이따금씩 몇 마디씩 단음절로 중얼거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눈에는 공허하고 정신이 나가 버린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식물인간이된 상태에서 환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즐기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나날의 삶에서 보여 주는 그의 절제하는 모습은, 환상을 즐길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을 도무지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그는 여행 중에 이따금씩 풀밭 가에서나 숲 어귀에서 발길을 멈추고 풀잎 (늘 같은 종류의 풀이었던 것 같다) 같은 것을 뜯어 가만히 씹으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는 했다. 때로는 그 풀잎을 뜯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절박한 사태를 맞아 긴장할 때 그것을 씹고는 했다(우리가 문제의 수도원에 있을 동안에는 풀잎을 씹는 그의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게 도대체 무슨풀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맛보게 해 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 P38

내가 이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뜻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울타리를 쳐서는 안되기 때문이야.」 내가 그에게서 들은 말 가운데 허무맹랑하게 들리던 것은이것 때문이 아니다. 내 나이 이제 지긋해지고, 그래서 그때보다는 머리가 훨씬 잘 여물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가 어떻게 해서 오캄 사람 윌리엄이라는 친구분의 생각을 그렇게잘 알 수 있는지,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로저 베이컨을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열렬하게 신봉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암흑 시대에, 현자라고 하는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네 무리들과 서로 모순되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온당하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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