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스스로를 믿고 불안에 떨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에 만족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삶은 쾌락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굶주려 있는 것을 기꺼이 채워 즐기고자 이곳에 모인 것이었다. 욕장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다수는 거나하게 술까지 마신 상태였지만, 포조의 묘사에 따르면 몸싸움은커녕 작은 말싸움 한번 벌어지지 않았고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눈앞에 펼쳐진 직관적이고 남의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활달한 모습을 보면서 포조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가 잃어버린 쾌락과 만족감의 형태를 이곳에서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닥쳐올 재앙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 채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비참한 운명을 맞으리라는 공포 때문에 우리는그런 걱정을 결코 멈추지 못하고 항상 재물에 대한 갈망으로 허덕이면서단 한순간도 영혼과 육신에 평온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나 작은 것에도만족하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보냅니다.

포조는 욕장에서의 광경을 묘사하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이곳이 에피쿠로스적 사고의 위대한 중심지라는 것을 내가 든 몇몇 예를 통해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불안하고 일에 얽매여 있고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이탈리아인과 낙천적이고 속편한 독일인을 비교하면서, 포조는 자신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의 추구가 최고의 선으로 보이는 순간을 곁눈질했노라고 믿었다. 물론 이런 쾌락의 추구가 기독교의 정통 교리와는 어긋난다는 것은 포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덴에서 포조는 자신이 익숙히 알고 있던 기독교 세계의 규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정신세계의 문턱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포조는 독서를 통해서 종종 그 문턱에 서곤 했다. 사라진 고전 문헌에대한 그의 열정은 식은 적이 없었다. - P220

그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만한발견 성과는 퀸틸리아누스의 『연설 교육론(Institutio Oratoria)』 전권을찾아낸 것이었다. 『연설 교육론』은 고대 로마인이 연설과 수사학에 대해서 남긴 책 중 가장 중요한 저서로서, 그때까지만 해도 포조와 그의 인문주의자 동료들에게는 책의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었다. 이제 그 유명한 책의 전체를 찾아냈으니 그들로서는 대단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놀라운 보물! 오, 예상치 못한 기쁨!" 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연설을 통해서 대중을 설득했던 세계, 그 잃어버렸던 세계 전체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후스와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를 콘스탄츠로 끌어들였던 것은 연설을 통해서 공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밝혀서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꿈이었다. 후스의 경우에는 그대로 묵살당하고 말았지만, 350일 동안 사슬에 묶인 채 갇혀 있던 지하감옥에서 끌려나온 히에로니무스는 최소한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는 있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히에로니무스의 ‘단어의 선택‘과 그의 ‘연설의 말미‘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는 포조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죄수의 라틴어 수준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포조의 심금을 흔들고 이단으로 지목받은 자에 대한 고발 내용이 정말 옳은가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만든 것은 죄수가 구사한 바로 그 라틴어의 수준이었다. 최소한 이 이상한 순간만큼은 포조는 자신의 자아를 둘러싼 긴장상태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할 수가 없었다. 포조의 내부에서는 사악한 교황 요한네스 23세를 위해서 일하는 관료로서의 자신과 자신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공화국 시절의 고대 로마가 향유하던 자유롭고 깨끗한 공기를 염원하는 인문주의자로서의 자신이 늘 충돌했다. 그리고 그는 이 긴장을 해소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버려진 보물들을 품고 있는 수도원 도서관에 몸을 던졌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포조는 이렇게 썼다.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순수하며, 이토록 도덕과 기지로 가득 찬 이런 영광스러운 인물이 그 끔찍한 감옥을 어찌 더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곳은 정말이지 더럽고 간수들은 야만적이고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찍이 포조는 레오나르도 브루니로부터 훌륭한 연설가였으나 끔찍한 운명을맞은 히에로니무스에 대해서 경솔한 찬사를 바쳤다고 주의를 받은 바있었다. 그러나 언뜻 그와 비슷해 보이는 이 글은 브루니의 주의를 받고도 포조가 저지른 또 한번의 경솔한 실수가 아니었다. 글에 묘사된 영광스러운 인물이란 포조가 성 갈렌 수도원에서 발견한 퀸틸리아누스의 원고를 가리켰다.

그는 슬픔에 잠겨 있었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곡이라도 할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수염은 지저분하고 머리카락은 먼지가 덕지덕지 끼어있었는데 표정으로 보나 안색으로 보나 부당한 처벌을 선고받았음이 분명했지요. 그는 손을 뻗어 로마인들의 충심을 갈구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마치 이런 부당한 처벌에서 자신을 구함이 마땅하다고 호소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 P223

루크레티우스가 가져온 질병에 붙일 수 있는 다른 단순한 병명은 이른바 무신론(atheismus, atheism)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처음 발표된이래로 이 작품은 종종 무신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루크레티우스 본인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으며, 신의 존재를 믿었다. 다만 신이라는 존재는 아마도 인간 존재 자체나 인간이 하는 여러 짓거리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크레티우스가 생각하기에 신성(神性)은 본질적으로 그 어떤 곤란이나 소란에 마음 쓰지 않으면서 영생과 평화를 즐기고 인간사에는 무관심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바다를 넵투누스, 곡물을 케레스, 포도주를 바쿠스라고 부르는 데에서 쾌락을 느낀다면 좋을 대로 하라.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둥근 세계에 ‘신들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고 썼다. 그리고 만약 신들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종교 성지를 방문해도 "평화와 고요함 속에서"(6:78) 지내는 신들의 모습을 명상하는한, 그 어떤 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디 잠시라도 이런 허튼 생각은하지 말기를. 당신이 이들 신적인 존재를 화나게 할 수 있다든가 혹은 달랠 수 있다고 말이다. 의례 행렬, 동물 희생제의, 열정적인 춤, 북이나 심벌즈, 피리 등의 악기 소리, 눈처럼 흰 장미꽃잎, 거세한 사제들, 어린아이 모습을 한 신의 조각상. 이 모든 숭배의 표현은 그 나름대로 장엄하고 감동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일종의 무신론자이며, 어쩌면 그것도 특히 교활한 무신론자라고 주장할수도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종교, 거의 모든 신자에게 신의 분노를 달래거나 신의 보호와 호의를 구하고자 하는 희망 없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에 무관심한 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그와 같은 신에대한 희망과 불안이야말로 미신의 유해한 양상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인간의 오만과 불합리한 인간의 공포가 결합되어 드러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생각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거나 혹은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정말이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신이라는 존재의 행복이 우리가 웅얼거리는 몇 마디 말이나 반듯한 행동거지에 달려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 P230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전문용어 사용을 좋아하지 않았던 루크레티우스는 이 기본적인 입자들을 일컫는 표준적인 그리스 철학용어인 ‘원자(atom)‘, 즉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일상적인 라틴어 단어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이를테면 "최초의 것들", "최초 시작점들", "물질의 본체", "사물의 씨앗들"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사물은 이런 씨앗들로부터 형성되고 해체의 과정을 거쳐 다시씨앗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씨앗들은 불변하며, 분해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 수가 무한하다. 이들은 끊임없는 운동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모양을 이루며, 다시 갈라지고 결합하기를 반복한다. - P233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시간은 처음과 끝이 있는 하나의 물질이지만 한계가 없으며 무한하다. 거대한 별에서부터 가장 하찮은 풀벌레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보이지 않는 입자들로 만들어졌으며, 이 입자들은 파괴될 수 없으며 불멸한다. 비록 그 입자로 만들어진 우주에 존재하는 개개의 특정 사물들은 무상한 것이지만 말이다. 즉 우리가 보는 형태가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리 영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모였던 입자들은 언젠가는 흩어져서 다시 개개의 입자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입자 자체는 영원한 것이니 부단한 결합과 분해, 그리고 재분배의 과정을 거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부단한 과정 속에서 창조와 파괴 중 어느 하나도 결코 우위를점하지 않는다. 세계에 존재하는 총 물질량은 언제나 똑같으며 산 것과죽은 것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유지된다.

파괴적인 운동도 움직임을 영원히 멈추게 할 수는 없고 한 존재를 영원히 묻어버릴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탄생과 성장을 가져오는 운동도 이미 창조된 사물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킬 수 없다. 이처럼 태고 이래로계속해서 이어져온 탄생과 파괴의 격투 속에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항상 동등한 경쟁을 벌여왔다. 지금은 여기에 있는 것이 다음에는 또 저기에 존재한다. 생명력이 승리를 거두었다가 또 반대로 정복을당하기도 한다. 빛의 해안에서 장례식장의 만가(輓歌)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하나로 섞인다.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죽음과 검은 장례식의 비탄이 뒤섞여 들리지 않는 때는 없으니, 이런 뒤섞임이 없는 낮을 뒤따르는 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밤을 뒤따르는 새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2.569-80)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호르헤 산타야나는 이생각-파괴할 수 없는 물질로 구성된 사물들의 부단한 변형을 가리켜 "인류를 강타한 가장 위대한 사고"라고 말했다." - P234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개개의 입자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무질서의 반복은 어떤신성한 계획의 산물이 아니다. 신의 섭리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에 내재하는 포괄적인 계획이나 지적인 설계를 겉으로 구현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탁월한 안무가가 있어 물질내부의 입자들의 동선을 짜주지 않으며, 만물의 씨앗이 누가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회의 같은 것을 열지도 않는다.

그러나 태고부터 우주에서는 이 셀 수 없이 많은 입자들이 충격에 의해서 뒤흔들리고 떠밀려서 다양한 모습으로 온갖 종류의 움직임과 결합을 실험해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한 것과 같은 배열이 나오게 된 것이다.‘(I.1024-28)

존재에는 무슨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연이 지배하는 끝없는 창조와 파괴만이 있을 뿐이다. - P236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큰 물질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유기체뿐만 아니라 무기물과도 연결된다. 인간을 비롯한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떤 신비로운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들과 완전히 똑같은 물질로 되어 있다.
인간은 상상과는 달리 결코 이 세상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있지 않다. 비록 이와 같은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특성 중 많은 부분을 다른 동물도 가지고있다. 물론 각각의 개별적 존재는 유일무이하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롭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물질의 풍부함 덕분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거의 모든 생명체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송아지가 제어미를 알아보며 암소가 제 새끼를 알아보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세상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인생에서 경험하는 매우 강렬하고 사무치는 많은 경험들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에만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 P239

•인간 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꿈꿔온 것처럼 모든 것이 풍족했던 낙원 같은 시대는 없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남녀가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자연이 제공하는 풍부한 과실을 즐기며 살았던 그런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의 인류는 야만적이고 거친 생활을 개선시켜줄 수 있는 불이나 농경기술, 다른 어떤 도구도 가지지 못한 채 먹기 위해서, 그리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했다.
생존을 위해서 사회적인 협동을 도모하는 기본적인 능력은 아마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관계를 구축하고 확립하여 관습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일구어 더불어 사는 능력은 서서히 발달했을 것이다. 처음에는협동 행위의 종류가 많지 않았다. 사냥과 음식 채집, 그리고 무작위적인 짝짓기-상호 욕망, 물물교환, 강간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가 유일한 협동 행위였다. 루크레티우스의 냉담한 표현에 따르면, 초기 인류 사회의 사망률이 매우 높기는 했지만, 전쟁과 난파, 과식 때문에 치솟고 있는 당대의 사망률만큼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언어가 기적적인 발명품으로서 인간에게 그냥 주어졌다는 생각은 더무니없다. 루크레티우스는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상황에서 불분명한 고함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이것이 조금씩 발전하여 똑같은 물건을 가리킬 때는 동일한 소리를 공유하는 데에까지 나아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한데 모여서 선율이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새들의 노랫소리와 갈대가 빚어내는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모방했고 이로써 점진적으로 음악을만들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문명화된 세계의 예술은 하늘의 입법자가 규칙을 제정하여 반포하듯이 인간에게 하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種)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정신적 힘을 공유함으로써 수고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성과이지만 순수한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예술은 신에 대한 두려움, 부에 대한 욕망, 명예나 권력에의 집착과 연계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모두의 너머에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욕구의 근원은 한 종으로 인간이 자연에서 마주친 적들을 이기기 위해서 애쓴 태곳적경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던 거친 야수들과의 맹렬한 싸움의 결과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으나, 그 싸움의 기억은 불안과 탐욕, 공격적인 충동을 널리 전파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바로 자신들을 겨눌 수 있는 그들만의 무기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 P2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