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모든 기독교인의 핵심적인 가치로 성공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쾌락을 추구했다. 태고부터 살아온 아담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았다. 농부들의 오두막에서도,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도 시골길에서도 고위 성직자의 궁에서도, 그리고 수도원의 높은 벽 너머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과식을 했으며 시끌벅적한웃음소리와 함께 즐거운 춤판을 벌였다.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남녀가 서로를 탐하며 몸을 섞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권위를 가진 그 누구도감히 이런 쾌락을 공공연히 긍정하지 못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소심하거나 뭔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쾌락의 추구는 최소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쾌락의 추구 자체가 이미 철학적으로 지지나옹호의 여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에피쿠로스는 죽어서 땅에 묻힌 지 오래였고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4세기의 성 히에로니무스가 짤막하게 루크레티우스가 자살했다고 언급한 후로, 에피쿠로스의 로마인 수제자도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수제자의 유명한 시가 남아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매장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사본 한 권이 흘러든 것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9세기의 어느 날, 썩어 문드러질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사본을 한 수도사가 스크립토리움에서 베끼기 시작한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필사본이 약 500년이라는 시간을 견뎌 화재와 홍수, 무시무시한 시간의 이빨을 견디고 마침내 1417년, 자신을 자랑스럽게 포기우스 플로렌티누스라고 칭하는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포조의 손에 떨어지게 된 것도 정말이지 대단한 우연이었다. - P138